공안, 선문답

生死 (공안)

칠통漆桶 조규일 2006. 12. 9. 13:26
제목  [7회] 生死 (공안)
등록일  2004-02-08
조회수  15회


 生死 (공안) 
 
 


대매선사에게 협산스님과 정산스님이 동행하여 가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정산스님이 이르기를
'생사가운데 부처가 없다면 생사가 없는 것이다' 하니



협산이 이르기를
'생사가운데 부처가 있다면 생사에 미혹하지 않느니라' 하여서


두 사람이 서로 긍정하지 않고 산에 이르러서
대매선사를 친견하고 앞서 이일을 모두 말씀드렸다.


협산스님이 묻기를
'어느 것이 친하고 어느 것이 성그옵(疏:멀다)니까?' 하니


대매선사께서 이르기를
'하나는 친하고 하나는 성글도다' 하셨다.


협산스님이 또 묻기를
'어느 것이 친하옵니까?' 하니


대매선사께서 이르기를
'갔다가 내일 다시 오라' 하셨다.


협산이 다음날 다시 묻기를
'어느 것이 친하옵나이까?' 하니


대매선사께서 이르기를
'친한 자는 묻지 않고 묻는 것은 친하지 않느니라' 하셨다.


협산스님이 훗날에 이르기를
'내가 당시에 대매선사로 하여 한쪽 눈을 잃었었다' 하였다.


 


문) '하나는 친하고 하나는 성글다' 한 뜻을 한번 일러 보도록 하십시오.


 


*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어렴풋이 아는 것과 확연히 아는 것
똑같은 것을 보고 있음에
어떤 이는 눈 밝은 이고
어떤 이는 눈이 밝지 않다.
이는 통하여 있으면 통하여 있는 만큼 통함 속에서 통하여 보고
막힘이 있으면 막힘이 있는 만큼 막힘 속에서 보기에
막힘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어 있지요.



여기서는


문) '하나는 친하고 하나는 성글다' 한 뜻을 한번 일러 보도록 하십시오.
도 중요하지만 이 보다 더


문)협산스님이 훗날
'내가 당시에 대매선사로 하여 한쪽 눈을 잃었었다' 한 뜻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으니.


둘 다를 생각 알음알이 내어 말씀하여 보세요.
   


 


生死一如 자성불이 되어 생을 사는 것이 친함이요
자성을 알지 못하고 찾아 헤매는 중생심은 성근 자가 아닌지요...
공안을 해석하기 보다 사무치게 대의심으로 가도록 하기 위함이신지요?
한쪽 눈을 잃음은 생각조차 닿지 못하겠습니다...
밖으로 향하던 육근이 떨어져 나감인지요? 참 어렵습니다!
 



* 말씀하신 친한 자는 다시 일러야 할 것이며
성근자는 틀리지 않다 하겠습니다.
이것 아니 이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이곳을 통하여 공안이라고 한 것들이
제가 보건데 대의심을 낼 만한 공안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대의심으로 가도록 하기 위함보다는
자기 자신의 공부된 상태에서 
조금씩 인식하며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협산스님이 훗날
'내가 당시에 대매선사로 하여 한쪽 눈을 잃었었다' 한 것으로 보면
이 말을 했을 그 당시도 아직 공부됨이 부족하지요.
어찌 아직도 공부됨이 부족하다 할 수 있겠는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 '하나는 친하고 하나는 성글다' 한 뜻을 한번 일러 보도록 하십시오.
두 스님의 말씀은 부처의 자리는 생사이전의 자리인데
생사라는 자기견해에서 부처를 논하였으니
참견에서 보면 이미 멀어져 있는 전도된 사견이다.
그러니 이때의 친한 하나는 참 견해를 의미하고
성글은 하나는 전도된 견해를 의미한다.


 


말씀하신 것이 틀리지 않다 하겠으나
정산스님의 말이나 협산스님의 말은 둘 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대매선사는 '하나는 친하고 하나는 성글도다' 하였습니다.
그럼 왜! 하나는 친하고 성글도다 했는가 하면은?
그 대답은 '친한 자는 묻지 않고 묻는 것은 친하지 않느니라' 하셨습니다.
왜! 이미 아는 자는 자신이 말한 것에 의심이 없으니
물을 필요 없이 확연하기에 묻지를 않고
확연하지 않은 자는 어느 것이 친한지를 확인하고자 묻는 것이지요.
중생심에... 전도된 사견을 가지고 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처음부터 정산스님은 자기 자신의 말에 미혹되지 않았고
협산스님은 자기 자신이 말하였음에도 자기 자신의 말에 미혹되어
자기 자신의 말과 대매선사의 말에 미혹되어
한쪽 눈을 잃은 것이지요.



문)협산스님이 훗날
'내가 당시에 대매선사로 하여 한쪽 눈을 잃었었다' 한 뜻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으니.
협산스님의 한쪽 눈을 잃었다는 분별하는 마음(이분법)을 버리고
하나의 참된 견해를 얻었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한쪽 눈을 잃은 지도 모르고
미혹되어 자기 자신의 말과 대매선사님의 말에 떨어져
이것을 재료로 공부에 매진하여 확연히 알고는 
'내가 당시에 대매선사로 하여 한쪽 눈을 잃었었다' 한 것으로 보면
이 말을 했을 그 당시도 아직 공부됨이 부족하지요.
어찌 아직도 공부됨이 부족하다 할 수 있겠는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말 그러합니다... ^_^ 친절한 일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두 눈을 다 잃고 참 견해와 하나 되어 더 이상의 의심도 사라진 무심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말과 글을 벗어난 참 자리에 있다면 평상심으로 살아가지 않을런지요


예 아직도 무심진인이 되지 못하고..평상심을 갖지 못함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겠지요..수고 했습니다...저 역시 풀어서 헛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자비스런 가르침에 감사 드리면서
대매선사를 친견 후 대매선사의 말에 떨어져 협산스님이 계속 참구하여
확연히 아셨지만,
대매선사를 만나기 전의 상태나 미혹된 것을 확연히
알게된 나중의 상태나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녹여 버렸으면 업식의
사라진 자리임을 확연히 인식하셨을 텐데,
즉 그때의 미혹했던 나라고 하기전의 참된 나나
확연히 안다고 인식했을 때의 나라고 하기전의 나나
여여 한데 그것을 확연히 알았으면 되셨을 텐데
"(미혹했던)내가 당시에 대매선사로 하여 한쪽 눈을 잃었었다"는 견해를
밝히신 것은 좋지만,
"한쪽 눈을 잃었었던 나 이전의 상태나, 한쪽 눈을 회복한 나 이전의 상태"
가 여여함을 밝혀 주셨으면 참견에 가깝지 않았을까 또 다른 견해를 내어
봅니다. 
 
 예, 틀리지 않다 하겠나이다. 오히려 드러냄이 허물이 되고 있지요. 그 허물이 아직도 부족함을 말하고 있고요..그런 점에서 보니..제가 풀어 놓는 것이 허물이라면 허물이라 할 것이고 답하는 분들에게 미혹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되네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선사분들의 경지를 배워 보겠습니까? 그저 감사할 따름 입니다. 더구나 잠시나마, 선사분들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의심은 결국 마음을 굴리는(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으로 연결 되니 저로서는 많은 보탬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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