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담론

깨달음의 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칠통漆桶 조규일 2007. 4. 23. 13:46


깨달음의 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 칠통 조규일

 

 



흔히들 깨닫고 나면(알 수는 없으나) 내가 내가 아니였다고 말을 하는 것을 책이나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들을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의문이 하나 생기는데 깨닫고 나면 다른 의식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깨닫고 난 뒤의 의식이 별개의 의식인지 아님 깨닫기 전의 의식이 변형하여 깨달은 의식이 되는지. 이 두 가지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별개의 의식이라고 하면 왜 보통 사람은 깨달음의 의식이 발동하지 않는가? 이고
도대체 그 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깨우치는지 아니면 그러한 의식을 인식할 수 있는지 여기에 비밀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두 번째, 의식이 변형이 되어 깨달음에 이르는 것 이것은 의식의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타의 뚜렷한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개체의 한계로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깨달음의 의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 인식하는 주체의 의문 나는 점입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합니다.

"깨닫고 나면 내가 내가 아니였다고 말을 하는 것을
책이나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들을 접했다고 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잘못된 표현이라기보다는 돈오의 깨달음을 얻지 않은
깨달음(돈오)을 얻기 위하여 수행해 가는 과정에서
생각이 바뀌고 의식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어 가는... 바로 보기 위한...
수행 선상에서의 실체의 인식을 하나 하나 알아 가는 과정에서
나의 실체 실상은 내가 아니다라 다른 것이라는 인식의 생각
즉 가아(假我)와 진아(眞我)를 분별하여 안
가아와 진아의 인식이란 깨달음에서
나는 내가 아니였다고 한 것이지 돈오의 깨달음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돈오(頓悟)의 깨달음에서 이야기했다면
그들은 분명 나는 나다 나를 떠나 따로 내가 있지 않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수행하는 입장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돈오 깨닫고 나면 나를 떠나 내가 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이고
우주의 삼라만상이 내가 아닌 것이 어느 것 하나도 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일 것입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입니다.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처음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되
완연히 이루어진 깨달음에서 보면 산은 산, 물은 물이로다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에 있어서도 처음 나는 내가 아니되 ....
나라고할 것이 하나도 없다함에서...
나는 나이다 할 것입니다.

깨닫고 나면 다른 의식이 일어나는가?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깨닫고 난 뒤의 의식이
별개의 의식인지 아님 깨닫기 전의 의식이 변형하여 깨달은 의식이 되는지요?
별개의 의식이라고 하면 왜 보통 사람은 깨달음의 의식이 발동하지 않는가?
도대체 깨달음의 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깨우치는지? 아니면 그러한 의식을 인식할 수 있는지?
여기에 비밀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각자와 중생의 의식에 있어서 서로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이가 똑같이 생각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이 있는데
깨달은 이는 이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밝게 비추어 바라보며 나타내는 반면
깨닫지 못한 이들은 이것에 얽매여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부처와 중생 사이에 한 생각의 차이가 있고
깨달음과 중생 사이 무명이 있을 뿐입니다.
깨닫지 못한 이는 얽매여 있음으로 얽매임으로 인한 무명으로
본성 본 성품이 비추는 원만하고도 맑고 밝은 빛이
얽매임(무명)을 비추는데도 생각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의 얽매임이 견고하여
맑고 밝은 본성의 빛이 생각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를 밝게 비추어 보지 못하고
뚫지 못하고 일부분을 밝히니 밝힌 부분은 인식하여 확연하되
다 밝히지 못한 그것들로 인하여 계속 얽매여
얽매인 무명으로부터 무의식 잠재의식 의식에서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안팎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깨달은 이는 생각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이 확연하여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이루는 하나 ... 하나의 티끌이 여여(如如)하게 있어
본성의 원만하고도 맑고 밝은 빛이
사방 팔방 십방을 비추어 밝게 밝히니
밝히는 빛으로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니
이것을 깨닫지 못한 이 다른 의식으로 생각하나 다른 의식이 아닌 같은 의식으로 깨달은 이 밝게 비추어 드러나 보이는 것을 말하고 표현하는데
다른 의식이라 생각할 뿐 다른 의식이 아닙니다.
각자와 보통 사람과의 차이는 다른 의식의 차이가 아니라
밝음과 무명과 차이, 밝혀봄과 밝혀보지 못함의 차이
이는 밝게 비추어 밝혀 아는 지혜와 어둠을 밝히지 못하는 무명의 차이입니다.
깨닫지 못한 이라고 전혀 밝히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빛은 사방 팔방 십방을 비추어 밝게 비추나
생각 의식 잠재의식이 본성의 빛을 둘러 싼 정도의 차이에 따라
밝히는 밝혀지는 것이 다른 것처럼
전등의 밝기가 다르면 비추는 밝음의 범위가 다른 것처럼
즉 자등명(自燈明)의 등불, 본성의 빛은
깨달은 이나 보통 사람이나 맑고 밝은 빛의 밝음이 다르지 않고
우주 전체를 밝힘에 부족함이 없음에도
생각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의 얽매임과 느슨함 놓아버림의 차이로
그 밝기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밝기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밝히는 것은 같은데
본성을 둘러싼 그것들의 서로 엉겨붙어 한 덩어리된 것으로 인한
엷고 두꺼움 느슨함 놓아버림으로 밝히는 밝음이 투명한 만큼 허공만큼 다르니.
보통 사람에게는 깨달음으로 인한 그것들의 느슨함 놓아버림으로
가지게 되는 공간 허공을 본성의 빛이 비추는 깨달은 자만 못하기에
보통 사람에게서 깨달음의 의식이 발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를 좀더 쉽게 설명한다면
님이 화가 났을 때 님의 마음에 바늘 들어갈 틈이 없는 듯하지만
님이 즐겁고 행복할 때 님의 마음은 마치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아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웃으며 받아드리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이는 서로 다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님이 가지고 있는 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오는 곳은 한곳인데 갖기 다르게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늘 즐겁고 행복한 마음에
주(主)하되 주(主)없이 의식이 나오는 것이며
보통 사람은 늘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아닌 상태에
주(主)하여 있고 주(主)하여있는 곳으로부터 의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머무름의 주(主)가 있어 의식이 있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
머무름의 주(主)가 있는지 알고 있는 안다는 아는 것 식(識)이 있기에
안다는 아는 식으로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의식이 잠재의식이 되고 무의식이 되어 있습니다만
이를 확연히 아는 이 깨달은 자이고 이를 모르는 이 중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이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이 주(主)할 곳이 없는지를 알기에
이것들에 주(主)하여 있으면서도 주(主)함이 없이 나타내고 표현하니
머무를 곳 것이 없으니. 여여(如如)한...의식이 있되 의식이 없는
주(主)하면서도 주(主)한 곳이 없다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이는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이 나(자신)에게 있는지를 알고
이것들에 주(主)하여 있음으로 이것들이 자신에게 주(主)하여 있는지를 알고
주(主)함에서 나타내고 표현하다 보니 의식이 있고
의식이 있으니 잠재의식... 무의식이 있어...
이것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한 덩어리 되어 옮겨가고 나타나며
서로 얽어매는 것 덩어리에 주(主)하니. 윤회의 굴레에 있다할 것입니다.
이 덩어리를 영혼이라도 하고 오온이라고도 합니다.
아는 것 식(識)으로부터의 인식에 주(主)하되 주(主)함 없이 나타나면
깨달음에 있다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깨우치는지? 아니면 그러한 의식을 인식할 수 있는지?
여기에 비밀이 있지 않을까요?

본성을 둘러싼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들의 서로 엉겨붙어
한 덩어리된 것으로 인한 엷고 두꺼움 느슨함 놓아버림으로
밝히는 밝음이 투명한 만큼 허공만큼 깨달았다할 것이며
엷고 두꺼움 느슨함 놓아버림의 허공의 앎 의식만큼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한 의식이 놓아버림으로 우주 의식이 되었을 때
내면의 빛이 안팎 없을 때
바로 여기에 깨달음의 비밀이 있다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의식이 변형이 되어 깨달음에 이르는 것 이것은 의식의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타의 뚜렷한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개체의 한계로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깨달음의 의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 인식하는 주체의 의문 나는 점입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합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의식의 변형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의식의 연속성이 아니라
의식의 느슨함 놓아버림에 있다할 것입니다.
느슨함 놓아버림에 있는 만큼
의식의 한계가 없는 듯하나 한계가 있는 듯하고
한계가 있는 듯하나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놓아버림의 의식의 앎이 나에서 지구 지구에서 태양계
태양계에서 은하계 은하계에서...우주...
우주 전체로 너나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하나의 의식이 될 때
전체가 하나로 공명 현상이 일고
공명현상이 일어남으로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삼라만상 전체가 하나가 되었을 때
전체의 하나는 큰 하나이면서 큰 하나 속에 있는 작은 하나이기도 하고
이 작은 하나는 큰 하나이기도 합니다.

큰 하나 속에서 작은 하나를 볼 때
작은 하나는 큰 하나 속에 있는 큰 하나이고
작은 하나가 큰 하나에서 볼 때
작은 하나는 전체의 하나 큰 하나 일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하나가 전체의 하나 큰 하나를 보지 못하고
작은 하나에서 작은 여러 개체를 보았을 때
작은 하나는 작은 하나로 다른 작은 하나를 말하고 지칭함으로
님의 말처럼 나와 타인 우주의 삼라만상 개개가 뚜렷한 구분이 존재할 것입니다.
우주 삼라만상 개개가 뚜렷한 구분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하나의 개체로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불가능하다할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깨달음이 필요하고 깨달음의 의식이 있다하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의 의식이란 우주의식으로
우주 전체가 큰 하나의 의식으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전체가 하나인 우주 의식으로 우주를 보면
우주에 있는 삼라만상은 우주를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우주 안에 있는 아무리 작은 하나의 보잘 것 없는 개체라 할지라도...
작은 하나의 개체로의 의식으로 인식 존재하기에
의식으로 인식 존재한 하나의 개체로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하나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전체의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전체의 하나는 우주입니다.
전체의 하나의 의식은 우주 의식입니다.
우주 안에 아무리 사소한 작은 하나라 할지라도
이 작은 하나가 우주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 작은 하나는 작은 하나로 보일지 모르지만
전체가 하나인 우주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 작은 하나를
님은 작은 하나의 개체로 볼 것입니까?
작은 하나의 개체로 전체를 이해한다할 것입니까?
여기에 깨달음이 있고
전체가 큰 하나이고 큰 하나는 작은 하나이고
작은 하나는 큰 하나인 까닭입니다.

200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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