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리
빛과 소리 / 칠통 조규일
힘겹고도 괴롭다.
알려주면 뭐 하나 알아듣지를 못하고 비슷한 질문으로 계속들 헛소리 하니.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계속 해야하나 마라야 하나 ??? 오랜 동안 망설였다. 그래도 인연 있는 이들이 있을까? 싶었는데...거의 벽이다. 새벽녘 참선에 들어 늘 싸운다. 그래도 해야한다. 하지 말아야한다. 해서 뭐하나...놓고서...
지금 쓰려는 이 글 역시도 차라리 질문과 대답을 읽지 않았다면 걸림도 없었으련만, 괜히 읽고서는 읽은 것이 그만 잠재되어 자꾸 방해를 한다. 여러 가지를....화두처럼... 각자의 믿음과 질문 그 대답들을 어찌 하겠는가?? 그 경지에 도달 내지는 이르지 못하고 믿고 의지하고 따르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럴 것이라 한다. 그러고 그 말을 믿는 이 몇몇이 생기면 이제는 그것이다. 확인도 해보지도 못하고는 확인이나 한 듯이...그리고는 그 속에 빠진다. 빠져서는 허우적거린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재미있다. 어떤 분을 믿고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자유이다. 자유에 앞서 인연이 닿지 않으면 배움의 인연이 이어지지 않는다..그러한 인연의 끈을 있어서의 믿고 의지하는 것을 말릴 생각도 없고 내 말을 믿으라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인 즉....그때가 이생이 될는지 아니면 먼 미래의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지만 틀린 것을 맞는 듯 해놓은 글을 읽는 이들이 그것을 사실로 믿을까 싶어. 그래도 지금까지 본인의 말을 믿지는 않아도 수긍했던 이들을 위하여 몇 자 적는다.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수행에 있어서의 빛은 참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제 3의 눈이 열리는 순간 일직선으로 꽂히는 빛줄기에....
인당으로부터 나오는 빛줄기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나오는 빛에서....
전체가 빛이 되고 나도 점차 빛이 되는
그래서 하나의 빛이 된 상태까지...
(위에 경험들은 여러 곳에 밝혔기에 여기서는 이 정도만을 밝힌다.)
그리고 주변을 밝히는 여래장의 여는 펼치게 되는 대광념처...
(의식테스트방법에 의한다면 의식이 아닌 법성으로 테스트해야하는 단계)
처음 빛으로 든다 그리고 주변이 청정해진다. 그러면서 주변이 밝아진다. 자신의 빛으로 하나의 도량이 형성된다. 하나의 도량이라 했으나 이 하나의 도량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빛이 발하여져 발한 빛이 주변을 맑히고 밝힌 공간을 말한다. 처음은 자기 자신이 주변으로 이는 ...점점 넓어진다. 빛으로의 도량이고 여래장이다. 처음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형성하여 도량이 펼쳐지나 점점 수행이 깊어지고 그 빛이 강해지면 심기생(心氣生)하는 것처럼 빛의 발산을 조절하게 되고 원하는 곳으로 도량 즉 여래장을 펼칠 수 있게된다. 이 단계가 수행의 대광념처 단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3의 눈, 혜안이 열리기 전 수행으로 인하여 보게되는 또는 접하게 되는 여러 종류의 빛이 있습니다. 이 빛들은 본성의 무량광에서 밝히는 빛으로 업장을 뚫고 지나가는 과정에서 무량광의 빛이 업장에 차단 굴절 산란되어 드러나는 또는 나타나는 빛입니다. 그래서 수행 중 드러나는 나타나는 빛의 색깔은 천차만별입니다. 이 빛의 빛깔로 하나의 형태의 형상이 같고 있는 업장 또는 현 상태의 의식 내지는 심리를 알 수 있습니다만, 업장으로 서로 다르게 보여지는 이 빛들도 한결같은 본성의 무량광에서는 다 같은 빛입니다. 다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장으로 인하여 차단 굴절 산란 혼합되어 본성의 빛과 다른 빛으로 인식하고 또는 다른 빛깔로 나타나는 보여지는 것입니다. 지금 본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체를 보고 보았던 경험과 체험을 통하여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저 역시 수행과정에서는 이러한 빛들에 대하여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수행 중 나타나는 보여지는 빛들에 대하여 각기 다른 작용인줄 알았습니다.
"영혼의 눈"이라고도 하고 "혜안"이라고도 하고 "제3의 눈"이라고 하는 것이 열리고, 가슴에서 빛이 나오는 그리고 눈을 뜨고 있음에도 눈앞의 사물들이 점차 흐려지면서 빛으로 변하고 결국에 눈앞 전체가 빛으로 변하고 그 빛 속에 본인도 빛으로 변하여 빛 속에 빛이 있는 상태가 되었으나 그것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곳 명상록에 제 3의 눈이란 글이 있으니 한 번 살펴보기를 권합니다.)
이렇듯 빛의 작용은 서로 달랐고 반응도 갖기 달랐다. 그러나 은백색(흰색. 백광)의 빛에는 다 같았다. 처음 인당에 빛이 꽂히고 일직선이 되었을 때는 천계로부터의 빛이었고 전체가 빛이 되고 그 속에 하나의 빛으로 되는 것은 어느 지정된 곳이 아니었다. 온 천지가 빛이었다. 무량광.... 빈틈없이..꽉 들어 차 있는 빛이었다.
보이는 나타나는 보고 인식하는 빛에 따라 어느 분의 말처럼 '천상의 빛' 또는 '신의 빛', '내면의 빛' '붓다의 빛' '마야의 빛'...이라고 하나 서로 다른 빛이 아닙니다. 다 같은 빛이되 본성으로부터의 업장 정도에 따라....즉 수행의 정도에 따라 빛의 색깔과 밝기 빛의 파장이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빛의 인식은 자기 자신의 수행의 경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천상의 빛' 또는 '신의 빛', '내면의 빛' '붓다의 빛' '마야의 빛'이 서로 다른 듯 이야기를 했지만 다 같은 빛입니다. 경지에 따라 인식이 다르고 보는 눈에 따라 다르고 수행하여 도달해 있는 경지, 곳, 처소에 따라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이른 도달한 이들이 말한 각각의 빛을 지칭하여 서로 다른 빛으로 이야기했으나 이 빛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본성의 무량광 대광의 빛을 보면서 그 빛 속에 각기 다른 티끌덩어리가 있어 그 티끌덩어리로 서로 다르게 보여지는 또는 서로 다른 곳 지역을 보면서 ...전체의 무량광을 보지 않고 티끌덩어리로 인한 빛을 보고 또는 도달해 있는 수행의 경지 위치에서 보는 한정된 보아짐으로 그렇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빛은 하나 같이 같은데 그것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별의 색깔이 달라 보이고 전등에 색깔이 무엇이냐에 따라 보이는 비취는 색깔이 다른 것과 같이 업장이 어떻냐에 따라 수행의 경지에 어떠냐에 따라 그 빛의 색깔은 달라 보입니다. 근본의 빛은 하나 같이 똑 같은 빛임도...
이를 두고 "이 빛은 미미한 밝기에서부터 태양광 보다 수백 수천만 배 이상의 밝은 빛까지 다양하게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우주와 본질세계에 편재되어 있다고 한 듯합니다만..." 그 근본의 빛의 색깔과 빛은 다 같은 빛입니다. 한량없는 전체에 있는 무량광에서 어느 한 부분 부분들을 지정 또는 이름하여 부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수행하여 천상계에 이를 정도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천상의 빛을 보게되고...천상계을 출입할 수도 있게 되는데...그곳의 빛이...천상의 빛입니다. '신의 빛' 여기서 말하는 신(神)은 어떤 신을 두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인간계와 왕래할 수 있는 신계 즉 천상계에 있는 분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분들을 인간계에서 보면 상은 형태의 형상을 하고있지만, 그 실체 실상을 보면 아주 작은 빛의 알갱이로 빛 자체였습니다. 이 빛은 제 3의 눈에 자극하여 꽂힌 빛과 다르지 않았고 전체가 빛으로 보이고 그 곳에 빛으로 녹아들어 있는 빛과 다른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은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빛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붓다의 빛'을 이야기하고 '마야의 빛'의 빛을 이야기했으나, '붓다의 빛'을 말함으로 깨달음에 있는 자, 깨달아 있는 자, 깨달은 자란 것을 강조 또는 깨달았다는 것을 내세워 차별하는 그럼으로 그 상대로 '마야의 빛'을 말하여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를 차별하려는 의도가 있고 자신을 믿고 의지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싶지만... '붓다의 빛'과 '마야의 빛'을 이야기 한 분이 수행과정에서 경계 조심하여야 할 빛으로 이야기했다면 지당하게 하겠으나 전달적 의미 내지는 수단적 의미로 사용했다면 틀리다할 것이다.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전체의 빛 속에 빛이 된 상태
즉 일체의 빛 오직 하나의 빛에 있을 때
이때는 깨달음이 아니라 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은 앞에서 말한 여타 빛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행 중 인식하고 생각하고 받아드리는 차원에서는 똑같은 빛임에도
다르게 인식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빛 속에 빛, 하나의 빛이 된 상태의 경험을 하고 그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어떤 몇 분이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했지만...
그러면서 일반인(저를 전혀 모르는 분인데...) 중에도
저렇게 깨달음을 얻고도 얻었는지를 모른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유형의 소리에 눈을 뜨고서야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견성(見性)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깨달음의 빛으로 '붓다의 빛'을 이야기했다면 이는 수행자(형태의 형상)가 무량광과 하나로 빛이 된 상태의 견성을 이야기한 듯하고, '마야의 빛'은 견성하지 못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수행 과정에서 보게되는 여러 가지의 빛을 경계하기 위하여 말한 듯합니다. 본인 역시도 빛 속에 빛으로 체험을 하고 다른 사람의 말만 믿고 거기서 수행을 접었다면 유형 무형의 소리에 눈뜨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실로 깨달음을 인식하기에는 본인 스스로가 아니다는 생각을 했고, 또한 전체가 하나의 인식이 아니었습니다. 유형 무형의 소리에 눈뜨고 나서야 박장대소하며 기뻐한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기뻐했는지 기뻐한 그것을 글로 옮겼었고 그때의 미소에 대하서도 글로 적어 책(빛으로 가는 길)으로 묶어 세상에 상재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 이것이구나 싶었고 그래 이거야 싶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이 가지 않았습니다.
"붓다급의 스승에 의해서만 열려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영혼의 눈'을 제3의 눈, 지혜안이라 말한답니다. 이 눈이 열리면 즉시 '내면의 빛과 소리'가 체험되기 시작합니다."
이 말인 즉 '내면의 빛과 소리'를 체험한 분들은 이미 제 3의 눈이 열리고 혜안이 열렸다는 말인데...진짜 그러한가? 지혜안(혜안)은 어떤 상태를 두고 말하고 제 3의 눈의 열림은 어떤 상태를 두고 말하는가? 이 글을 쓴 분이 "혜안과 제 3의 눈의 열림에 대하여" 여러 수행단체에서 아니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뜻과 의미를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뜻과 의미를 저버리고 또는 벗어나 그 단체에서 그 단체에 수행에 맞는 이름을 지정한 것이 '영혼의 눈' '제3의 눈', '지혜안'이라 했다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과대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명상록에 "제 3의 눈"이란 글에서 밝힌 것과 동일한 이야기인가? 상반된 이야기인가? 이 분은 제 3의 눈이 열렸어야 한다. 그리고 제 3의 눈에 대하여 확연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가?...확연하다면 맞다할 것이나 아니면 맞지 않다할 것이며 그 단체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는 전부다 아니 "내면의 빛과 소리"가 체험된 분들은 모두 다 '영혼의 눈' '제3의 눈', '지혜안' 열렸어야 한다 그러한가? 그러하다면 할 말이 없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그것이 법문 중의 최고의 법문 관음법문이다. 그러한가?
"석가모니 붓다께서는 '동쪽에서 샛별이 떠오를 때' 깨쳤다고 하지요. 이 때 말하는 샛별은 새벽에 동녘하늘에 떠오르는 금성(金星)이나 밝은 별을 의미하는 게 아니랍니다. 일종의 내면의 빛의 표식이지요."
내면의 빛과 밖의 빛과 안팎 없이 하나의 빛이 되어 봤지만, 깨달음의 무형의 소리가 되어 깨치도록 했던 빛을 내면의 빛의 표식이라는 인식하는 자체가 아직 유형 무형의 소리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접한 것이 내면의 빛이다 보니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겠지만 깨닫도록 한 빛의 울림 진동 떨림 파장을 내면의 빛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석가모니 붓다께서는 "동쪽의 샛별이 떠오를 때" 별을 보고 깨쳤다는 것이 내면의 빛이 아니라....말 그대로 동쪽의 샛별이 유형 무형의 소리가 되어 깨치신 것입니다. 때가 되어서...인연이 되어서....샛별의 별빛이 유형 무형의 소리가 되어... 사소한 건드림에도 봉숭아 씨앗 주머니가 터지듯..샛별을 보는 순간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우주는 끊임없이 물결처럼 파노라마 칩니다. 울림 진동 떨림 파장의 의식으로 그 의식은 수치적으로 볼 때 600이란 수치로....우주는 끊임없이 600이란 의식의 파장을 보냅니다. 보낸다기보다는 파노라마같은 물결의 파장이 편재해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형태의 형상이 가지고 있는 업을 무량광으로부터 밝힘으로 우주에 산재해 있는 본성의 무량광으로 대상하는 울림이고 떨림이고 파장입니다. 수행자 의식이 점점 올라가 599.. 600이 되면 공명현상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때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입니다. 이때의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수행자가 우주의식에 부딪쳐 깨집니까? 아니면 끊임없는 우주의식의 파장이 수행자를 깨지게 합니까? 앞에서 말한 우주의 울림이고 진동이고 떨림인 파장은 그 자체로 무형의 소리가 되어 깨지게 하고 또는 사물과 사물로 인한 소리는 그 소리가 허공에 내재한 우주의 울림 진동 떨림 파장을 자극하여 수행자를 건드려 주는 역할로 깨우쳐줍니다. 앞에 무형의 소리는 우주의 소리인가 하면 뒤에 것 역시 우주를 벗어나 있지 않은 우주의 소리입니다. 다만 우리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파장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대음도 듣지 못하고 아주 적은 소리도 듣지를 못합니다. 즉 듣는 파장이 다르다 할 것입니다. 이렇듯 하늘망(인트라망)을 이루는 파장은 수 없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울림 진동 떨림의 파장이 있습니다. 산재해 있습니다. 파노라마처럼...
유형 무형의 소리를 이야기했다.
유형 무형의 소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울림이고 진동이고 떨림이고 파장이고 파문이고 물결이다.
무엇으로부터의 본성으로부터...
소리는 울림이고 진동이고 떨림이고 파장이다.
이것은 주기율이 있다. 높고 낮고 천차만별의....
인식하여 들으니 소리이고 인식하여 듣지 못하니.
울림이고 떨림이고 파장이고 무형의 소리이다.
이것은 어디로부터 본성의 빛으로부터 무량광으로 발하는 빛에 둘러 쌓인 업장으로부터 쉼 없이 흐르고 변하는 업을 지나 물결이 이는 듯 파문 파장이 이는 듯
크고 작게 넓고 좁게 천차만별로...주기율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 움직임은 시작된 곳을 시작으로 퍼지기 시작하여 끝에 다다라 아니면 어느 것에 부딪치고는 처음 시작된 곳으로 되돌아와 소멸된다.
이처럼 퍼지는 울림 진동 떨림 파장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대상이 있고 없고로 이름한 것이나 근본에서의 전달적 의미로는 상통한다.
근본적 의미로 상통하는 이것은 본성의 빛과 업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업 때문에....
최초의 빛 한 생각으로부터 울림 진동 떨림 파장으로부터....
그럼으로 최초 소리가 되는...모음과 자음의...모자(母子)로...생(生)하여...빅뱅하는....
수행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식의 소리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소리를 경험하게되는데
이 소리들은 울림 떨림 진동 파장의 크고 작은 넓고 좁은 주기율적 우주에 있는 하늘 망 인트라 망으로 그 울림 떨림 파장으로 듣지만...수행으로 인하여 내부가 어떻게 변화하느냐 또는 업장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느냐에 따라...그 변화로 인하여 듣지 못하던 소리도 듣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울림 떨림 진동 파장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큰 것은 작게 넓은 것은 좁게 점점 안정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성의 빛과 업장으로 인한 것이니. 이 또한 앞에서 빛을 설명한 것과 비슷한 그곳 지점의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를 두고 '천상의 소리' '신의 말씀' '잃어버린 화음' '성음'이니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리를 관하여 봅시다.
님은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어떻게 나는 소리입니까?
입이...입술이...혀가...목이...생각이...마음이....
목소리는 성대의 떨림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떨림??? 본성의 빛과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과의
마음 작용에 의하여 업식이 작용하니 그 업식으로
본성의 빛 무량광이 비추는데 변화해 보이는 나타나는 울림 떨림 진동 파장입니다.
이것이 소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업식의 작용 마음작용으로 소리로써 의사전달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빨리 이루어지다 보니. 이를 분명하게 모르는 것입니다.
본성의 빛 무량광에서 업식의 작용 마음작용으로 변화의 울림 떨림 진동 파장은
비교하여 말씀드린다면 밝디 밝은 빛이 있습니다. 그 빛에 티끌 즉 사물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십시오, 그러면 그림자가 바뀝니다. 그림자가 바뀌면서 비추는 곳이 바뀝니다. 이렇듯 업장의 어둠으로부터 밝게 드러나는 것이 울림 떨림 진동 파장이 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님이 내는 소리입니다.
그럼 최소의 소리 우주의 창조음은 어떤 소리이겠습니까?
최초의 빛 한 생각으로부터 울림 진동 떨림 파장으로부터....
그럼으로 최초 소리가 되는...모음과 자음의...모자(母子)로..최초의 소리가 생(生)하여...빅뱅으로....우주가 생겼다 했습니다.
최초의 소리는 무엇이고 우주의 창조음은 무엇입니까?
여기서부터 우리는 진화해 현재에 이른 것입니다.
수행자가 수행 중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산재해 있는 하늘망 인트라망의 총총함 만큼 그 울림 진공 떨림 파장의 의식에
싸이클이 맞추어지면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수행 중에 소리에 집착하면 이를 헤아릴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우주의 창조음을 최초의 울림 진동 떨림 파장...소리를 물었습니다.
인식할 수 있습니까? 가늠이라도 할 수 있습니까?
우주의 창조음 최초의 소리는 가늠할 수 없는 기울임 쏠림입니다.
우주는 깨달음의 의식인 우주의식을 끊임없이 보내고 있습니다.
보낸다기보다는 우주에 두루 꽉 차 내재하여 있습니다. 유형 무형의 소리로....
울림 진공 떨림 파장으로....그럼에도 우리는 우주의 의식을 감지하지를 못합니다.
단순히 안테나만 설치하여 우주의식에 맞춰 수신하면 되는데...왜???..안될까요?
안테나만 세우고 우주의 울림 진동 떨림 파장에 싸이클만 맞추면 되는데....
전등을 켜듯 스위치만 올리면 되는데 ....아니 전원만 꽂으면 되는데...
말이야 쉽지요. 하나님은 부처님은 우리 스승님은 무량광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무량광으로 보내지는 것에 플러그만 꽂고 쓰면 됩니다.
이는 모든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 근원에 있는 본래의 성품 성질입니다.
그럼에도 서로 통화가 되지 않고 우주의식을 인식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울림 진동 떨림 파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 업 때문에 ....
내면에 들어가 내면의 빛을 관하고 소리에 귀기울여 들어갈 때
내면의 빛을 관함으로 내면의 빛은 점점 밝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내면의 소리를 들음으로 점점 그 울림 진동 떨림은 안정적으로 변하고
그럼으로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안은 편안하고 밝은데 밝은 시끄러우니
안팎이 다른 관계로 자꾸만 차단 막을 치게되지요.
(이 현상에 관한 수행자 안팎의 대한 설명은 다른 곳에서 한 관계로 생략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껍질만 단단하게 만든 결과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위험 요소들이 있으니.
내면의 빛과 소리의 수행은 필히 스승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때 스승은 "내면의 빛과 소리"를 통하여 수행하는 수행자의
안팎에 있어서 밖에 쪽 껍질이 단단해져 가는 것을 어루만져주고 또는 녹이는
윤활제 같은 법문을 많이 하여야 하고 많이 들어야할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저는 "내면의 빛과 소리"에 대한 수행 방법 및 수행해 가는 과정을 정확히 알지 못함으로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만 빛과 소리에 대한 근원적 요소와 수행 중의 현상에 대해서는 틀림이 없다고 사료됩니다.
200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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