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 선문답

이렇게 한 그 곳에 깨달음이 있다.

칠통漆桶 조규일 2007. 7. 20. 15:26
제목  [40회] 이렇게 한 그 곳에 깨달음이 있다.
등록일  2004-06-14
조회수  13회


 이렇게 한 그 곳에 깨달음이 있다. 
 


대중에게 설법하셨다.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들음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무엇이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想)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경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범부의 행동도 아니고 성현의 행동도 아닌 이것이 보살행이다.'


지금 하는 일상생활과 인연따라 중생을 이끌어주는 이 모든 것이 도(道)이니,
도가 바로 법계(法界)이며
나아가서는 향하사만큼의 오묘한 작용까지도 이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심지법문을 말하며,
무엇 때문에 다함 없는 법등(法燈)을 말하였겠는가.


그르므로 일체법은 모두가 마음법이며,
일체의 명칭은 모두가 마음의 명칭이다.
만법은 모두가 마음에서 나왔으니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


경에서도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이 통달하였으므로 사문(沙文)이라한다'고 하였으니,
이 본원자리에서는 명칭도 평등하고
의미도 평등하며 일체법이 다 평등하여 순수하여 잡스러움이 없다.


만일 교문(敎門)에서 시절따라 자유롭게 법계를 건립해 내면 모조리 법계이고,
진여(眞如)를 세우면 모조리 진여이며,
이치(理)를 세우면 일체법이 이치이며,
현상(事)을 세우면 일체법이 현상이 된다.


하나를 들면 모두 따라와 이사(理事)가 다름이 없이 그대로 오묘한 작용이며,
더 이상 다른 이치가 없다. 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다.
비유하면 달그림자에는 차이가 있으나 달 자체는 차이가 없고,
여러 갈래 물줄기는 차이가 있으나 그 물의 본성은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삼라만상은 차이가 있으나 허공은 차이가 없는 것처럼
도리를 설명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으나 걸림 없는 지혜는 차이가 없듯
이 갖가지로 세운 법이 모둔 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세워도 되고 싹 쓸어버러도 된다.
모조리 오묘한 작용이며 그대로가 자기이니.
진(眞)을 떠나서 세울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운 그 자리가 바로 진이며,
다 자기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냐.


일체법이 불법이고
모든 법이 바로 해탈인데
해탈이 바로 진여이나,
모든 법은 진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이 모드 불가사의한 작용으로서 시절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


경에서도
'곳곳마다 부처님 계신 곳'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매우 자비로우며 지혜가 있어
선한 본성으로 일체 중생의 얽힌 의심을 부수어
유무(有無)등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망정이 다하고
인집.법집.(人.法)이 함께 공하여 비할 바 없는 법륜을 굴리고
모든 테두리(數量)를 벗어났다.
그리하여 일마다 걸림이 없고, 현상.이치 양쪽 다 통하니
마치 하늘에 구름이 일어났다가 어느덧 없어지듯 머문 자취를 남기지 않으며,
물에다 그림을 그리듯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대적멸(大寂滅)이다.


번뇌 속에 있으면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 이름한다.
법신은 무궁하여 그 자체는 늘고 줄음이 없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모나고 둥글기도 하면서
대상에 따라 형체를 나타내니
물에 비친 달처럼 잔잔하게 흔들거리며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유위(有爲)를 다하지도 않고 무위(無爲)에 머물지도 않으니
유위는 무위의 작용이며, 무위는 유위의 의지처이다.
의지처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도 의지할 것 없는 허공과 같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심생멸(心生滅)과 심진여(心眞如)라는 뜻에서 보자.
심진여(心眞如)라 하는 것은 밝은 거울이 물상을 비추는 것과도 같은데,
거울은 마음에 비유되고 물상은 모든 법에 비유된다.


여기에서 마음으로 법을 취한다면 바깥 인연에 끄달리게 되니
그것이 심생멸의(心生滅義)가 된다.
성문은 소리를 들음으로써 불성을 보고
보살은 눈으로 불성을 보니
그것이 둘 아님을 아는 것을 평등한 성품이라 한다.
이 성품은 차이가 없으나 작용은 같지 않아서
미혹에 있으면 식(識)이 되고,
깨달음에 있으면 지(智)가 되며,
이치(理)를 따르면 깨달음이 되고,
현상(事)을 따르면 미혹이 된다.
그러나 미혹해도 자기 본심에 미혹하는 것이며
깨달아도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한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 다시는 미혹되지 않으니,
마치 해가 뜸과 동시에 어둠은 없어지듯 밝은 지혜가 나오면
어두운 번뇌는 공존할 수 없다.


마음(心)과 경계(境)를 깨달으면 망상이 발생하지 않으며,
망상이 나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무생법인은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어서 도를 닦고 좌선할 필요가 없으니
닦을 것도 없고 좌선할 것도 없는
이것이 바로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다.


이제 이 이치를 알았으면 진정코 모든 업을 짓지 말고
본분따라 일생을 지내도록 하라.
가사 한 벌 누더기 한 벌로 앉으나 서나
끊임없이 계행(戒行)을 더욱 훈습하고 정업(淀業)을 더욱 쌓도록 하라.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깨닫지 못할까 무얼근심하랴.
듣느라고 수고하였다.
몸 조심하라."



* 살펴보라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어찌 하면 깨달을 수 있는가?
말에 있지 않고 행에 있다.
 
      날짜:2004/04/16 05:57   


 언어는 우리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었음이니
작위와 취사선택이 있음이니
언어로는 깨달을 수 없음이라
그러나 전한바 없이 전하는 것은 흐르고 흐름이니
그저 지극한 마음(일심)으로 경계를 수용하며 생활하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 아닐까요? _()_ [2004/04/16]



 칠통 
반야는 바닷물이고 나는 바다의 물고기다.
바닷물은 그 자체로 깨달음이다.
나는 깨달아 있는가? 깨달아 있지 않은가?
무엇이 깨달음으로부터 벗어나 있게 하고 있고
깨달음을 찾고 구하게 하는가?
지극한 마음도 일심도 경계가 아닌가? 다시 살펴보세요. [2004/04/17]


00:
 내 스스로가 틀과 경계를 만들고 스스로 구속하고 제한하고 있으니
나를 벗어난 곳에 진실한 내가 있습니다.
이 말하는 자 아직 이르렀으나 이르지 못한 자로소이다.
아직도 망념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차도 내가 만들어내고 내가 그 속에 있음을 어찌할꼬?
어찌하면 내가 만든 칠통을 타파하리오? [2004/04/17]


 오직 지극하게 할 뿐이로소이다. _()_ [2004/04/17]


 내 스스로 깨달음이란 상을 만들고 그에 내가 구속받고 있음이니
그마저 놓아버리고 오로지 지극하게 할뿐입니다.
일심이 무심되고 유상에서 무상으로 무상에서 유상으로 흐르고 흐릅니다.
경계 또한 경계가 아니라 자성의 드러냄이 아닌가 합니다. _()_ [2004/04/17]



 칠통 
눈을 뜨고 있음에 흙(경계)으로 덮고 보고,
귀로 듣데 흙(경계)에 묻혀 듣고,
느끼되 흙(경계)을 통하여 느끼고,
행하되 흙(경계)속에서 행하니.
어찌 흙속의 자성이 드러나 보고 듣고 느끼고 행할 것인가?
듣고 느끼고 행함이 바라봄에 드러난다.
뜬눈에 흙을 제거하고 한번 더 떠 보라.
눈을 뜨고 바라만 보면 된다. [2004/04/18]


 칠통 
이미 자성은 드러나 온 천지는 광명이다.
흙의 그늘에서 그늘 속 어둠 깊음의 엷고 깊음에
미명과 무명 칠흑이 있다하나.
뜬눈을 한 번 더 눈을 뜨고 보라.
천지 광명에 무엇이 있겠는가?
이미 드러나 있다.
눈을 다시 뜨기 어려우면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라.
님이 말하고 있는 그곳을 보라.
그리고 듣고 느끼고 행하라. [200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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