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相)에 대하여 / 칠통 조규일
우리가 나고 살아감은 상(업식)이 있어서 그 상(업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업식)에 매여 살려지는 자가 아니라 상(업식)을 쓰는 지혜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나란 것은 과거와 현생으로부터 쌓여진 의식(7식)과 잠재의식(8식) 무의식(9식)이 나라는 상을 형성하고 본래자리에서 나투어진 공한 나를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서 환상의 나를 실재로 알고 이 생겨서 스러질 나를 유지시키고 존재시키기 위해 탐,진,치 삼독심에 물들어 사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를 부정하고 참된 근본의 나를 되찾는 것도 좋겠으나 그보다는 이러한 나를 본래의 자리에서 나투어진 나로 정확히 알고 이러한 나를 쓰는 자가 되는 것이 주인공의 삶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모두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이 만법의 시작이고 끝이요 마음의 주인이 삼라만상의 주인이라고 믿습니다. 과연 이러한 견해가 바른 것인지 삿된 것인지요?
그리고 이러한 견해 아래서 상을 세우지 않고 중생을 위해 발원하는 것은 극미세소지우에 해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보시에 해당되는지요?
또한 중생이 본래 부처이나 스스로가 생사고에 들어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있으니 자신의 인연따라 가는 것을 옆에서 마음의 길만 알려주고 스스로가 그 길을 가도록 그냥 두어야 할지, 아니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 할지요?
본래는 무일물인데 중생은 스스로가 물건이라 하네, 이물건 저물건 없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소 . 그냥 흐름따라 흐르는 가운데 그 흐름 확연하면 좋겠네... 허이!
난 한 마디도 한 일이 없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나고 살아감은 상(업식)이 있어서 그 상(업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업식)에 매여 살려지는 자가 아니라 상(업식)을 쓰는 지혜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반야를 확연히 알고 반야에 의지하여 또는 반야와 함께 하며 반야에 실려 가는 업식을 보며 기연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이 방법이라면 방법이라 할 것입니다.
"나"란 것은 과거와 현생으로부터 쌓여진 의식(7식)과 잠재의식(8식) 무의식(9식)이 "나"라는 상을 형성하고 본래자리에서 나투어진 공한 나를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서 환상의 나를 실재로 알고 이 생겨서 스러질 나를 유지시키고 존재시키기 위해 탐,진,치 삼독심에 물들어 사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를 부정하고 참된 근본의 나를 되찾는 것도 좋겠으나 그보다는 이러한 나를 본래의 자리에서 나투어진 나로 정확히 알고 이러한 나를 쓰는 자가 되는 것이 주인공의 삶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모두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이 만법의 시작이고 끝이요 마음의 주인이 삼라만상의 주인이라고 믿습니다. 과연 이러한 견해가 바른 것인지 삿된 것인지요?
삿되지 않다 하겠으나 그렇다고 바르다고 말할 수도 없지요. 선악, 바르고 삿되고... 이분법적 논리는 마음에 있고 업에 있으며 반야 본래자리 주인공은 이분법을 떠나 반야 아닌 것이 없고 본래자리 아닌 곳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주인공의 주가 아닌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님이 말한 행에 있어서 주인공 또는 본래 자리, 반야에 의지하여 중도의 행을 행하거나 어떤 행을 행함에 있어 맑고 밝게 맑은 마음, 물들지 않음 마음을 따라 행한다면 자성불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 아래서 상을 세우지 않고 중생을 위해 발원하는 것은 극미세소지우에 해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보시에 해당되는지요?
어느 자리에서 행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행함에 반야에 의지하여 있거나 주인공 본래자리에서 중도의 행을 하고 행하되 행함이 없고 말하되 말함이 없고 머무르되 머무름이 없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그러하다면 주인공이라 하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보시라할 것입니다. 발원하고 기원하되 상이 있다면 보시고 상을 내지 않았다면 극미세소지우라 할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8만4천 수많은 법문을 하였음에도 제자들에게 "난 단 한 마디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살펴 확연하시면 이 질문에 스스로 확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중생이 본래 부처이나 스스로가 생사고에 들어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있으니 자신의 인연따라 가는 것을 옆에서 마음의 길만 알려주고 스스로가 그 길을 가도록 그냥 두어야 할지, 아니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 할지요?
그냥 두기보다는 알려주는 것이 좋으나 그렇다고 억지로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구제한다 하나 누가 누구를 구제할 수는 없고 방법 길을 알려주되 스스로 구제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제가 이것이 옳다고 하여도 스스로 받아드리지 아니하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으면 의지하게 되고 믿으면 말하는 것을 따라 행하려하지요. 서로 기연이 닿고 연이 닿아야 하지요. 그래야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으나 물을 억지로 먹게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그래도 시도하여 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행하여 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본래는 무일물인데 중생은 스스로가 물건이라 하네, 이 물건 저물건 없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소 . 그냥 흐름따라 흐르는 가운데 그 흐름 확연하면 좋겠네... 허이!
본래(本來) 무일물(無一物)이라 것도 없지요. 무엇이 본래 무일물인가? 입만 벙긋해도 어긋난다. 무엇을 말해도 어긋나 있지 않다. 본래는 어떠하기에 이러한가? 갈!
2004, 04, 29 06:39
_()_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_()_ [200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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