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가는 길

이와 같이 도(道)를 이루었다

칠통漆桶 조규일 2007. 10. 9. 21:25
제목  [23회] 끝없이 펼쳐지는 이 삶은 무엇인지요?
등록일  2005-02-11
조회수  191회

 이와 같이 도(道)를 이루었다. / 칠통 조규일


날 짜 : 2005/01/11 08:02:54


이와 같이 도(道)를 이루었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들과 불보살님들
모든 조사와 선지식들이

도(道)를 이루었을 때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분들이 하나같이
오온(五蘊: 색수상행식)이 모두 공(空)한 지를

확연히 비추어 알고
일체의 고통과 번뇌 액난으로부터 벗어나
도(道)를 이루었다.






이몸 이 육체는 물질로
살아서는 "나"이고 "나"라 하나
죽어서는 색(色: 물질)은
지(地),수(水),화(火),풍(風) 4대로 흩어진다.
살았을 때와 죽어서 그 흩어짐을 보면 이러하다.
살아서는 뼈와
살(육체)이지만 죽고나면 땅(地氣)으로 돌아가고
살아서는 몸안에 흐르는 피(血氣)이지만 죽어서는 물(水氣)로 돌아가며
살아서는
몸안에 공기이지만 죽고나면 바람(風氣)으로 돌아가고
살아서는 몸을 따뜻하게하는 맥박이고 온기(溫氣)지만 죽고나면 화(火氣)로 돌아간다.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마찬가지다.
수(受)는 감수작용이고
상(想)은
상상작용이며
행(行)은 의지작용이고
식(識)은 분별작용이다.



안이비설신의
눈(眼)이
색(色,물질)을 보고
귀(耳)가 소리를 듣고
코(鼻)가 냄새 맡고
혀(舌)가 맛을 보고
몸(身)이 촉감하고

뜻(意)으로 생각을 받아들여

즐겁다 괴롭다 괴로운 것도 즐거운 것도 아니라는
고(苦)와 락(樂), 사(捨:마음이
평온하고 집착이 없는 상태)를 형성하는 것이
수(受)의 감수작용을 일으키고
수의 감수작용은
안이비설신의(6受)로 제각각
또는 서로 뒤엉켜 또는 엉퀴고 설켜 일어나고
이렇듯
6상(6想=안이비설신의로 인한 각각의 想)
6행(6行=안이비설신의로
인한 각각의 行)
6식(6識=안이비설신의로 인한 각각의 識)의 행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이
마치 4대(지수화풍)의 동화작용에 의하여

전기불이 껴져 있기 위하여 수없이 많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과 같이
감수작용이 있으면 상상작용이 일어나고 상상작용이 일어나면
의지작용이 일어나며
의지작용이 일어나면 분별작용이 나타난다.




수상행식(受想行識) 어느 것 하나도

홀로 있어 스스로 존재하여 나타나는 것 없이
모여지면 있는 것 같이 나타나고
흩어지면 그 자취의 흔적도 없이 공(空)하다.




수상행식 4온이 공한 지를 모르고
4온을 엮어
"나"라 하고
이 4온을 영혼이니 업덩어리니
하며
4온으로 "내가" 살아갈 집을 형성하고
4온으로 "내가" 의지할 덩어리를 형성해 "내 마음"이라 하나
엮어진 4온을
하나 하나 풀어 놓으면
이것이랄 것 하나 없이 모두가 공(空)하다.



4온이 공(空)한데
4온 있다한들
공(空)하지 않을리 없고
공(空)한 곳에 "나"도 없고 "내 마음"도 없으며
영혼이니 업이랄 것도 없고
4온으로 인한
고통과 번뇌도 없게 되고 걸릴 것이 없게 되니
걸림 없는 곳 무엇에 걸리어 고통과 번뇌가 있겠는가?




공(空)에
상이 있는가?
고통있겠는가?
액난이 있겠는가?
번뇌가 있겠는가?




공한 4온과 색
5온이 모두 공(空)한데
무엇에 걸리어 도(道)를 이루지 못하는가?




5온이 공하니
걸릴 것 없이 자유자재한 공(空)한 곳이고
공한 곳 5온이 공한데
무엇에 걸리어
자유자재하지 못하는가?




2005.1. 10 14: 31

제 목 : 끝없이 펼쳐지는 이 삶은
무엇인지요? 날 짜 : 2005/01/12 08:42:26









오온이 모두 공함을 증득하면 법공을 확연히 안 것인지요?
법공을 알아도 또 나아가야 하는 길은
어디인지요?
삶의 업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나 끝없이 펼쳐지는 이 삶은 무엇인지요?
맘에 와서 닿는 글을 보면서도 맘에 한가닥
의문이 생깁니다...
우문에 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쉽게 놓치기 쉬운 아주 좋은 질문에 감사합니다.




"반야심경"에서
공(空)을 의식 또는 인식, 증득하고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분들도 나오고
또는 자신은
도(道)를 증득하였다 하는 분들도
이 공(空)에서 오도송을 읊는 이들도 간혹들 있지요.
저는 이 공(空)을 증득함으로
비로서
도(道)의 길에 접어들었다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증득하지 못하고는
도(道)를 이루어갈 수 없다
하여도 틀리지 않다 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도(道)를 이루기 위해서는 오온이 모두 공함을 필히 증득해야 하고
도(道)를 이루는데
첫 관문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하니
님이 질문하신
오온이 모두 공함을 증득하면 법공을 확연히 안 것인지요?

아닙니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증득하였다 하여 법공을 확연히 안다 할 수 없으나
근기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하겠으나
유(有: 五蘊)에서 무(無: 空)를 안다고 하여
무(無: 空)를 앎과 같이 무(無: 空)에 있는
유(有:법공)를
확연히 안다고 할 수 있는 이 찾아보기 쉽지않다 하겠습니다.




유(有:五蘊)에서 무(無:空)를 알아다 하여
무(無:空)에서의 유(有:法)를 안다 할 수 없으며
무(無:空)에서 유(有:法)를
알았다 하여
유(有:法)에서 무(無:法空)안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법공을 알아도 또 나아가야 하는 길은 어디인지요?



(* 법공(法空)은 법도 법이 아닌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속 법공(法空)을 알았다 하면
법(法)도 법(法)이 아니고
법(法)이 아님도 법(法)이니
법념처(法念處)에 있다
하겠으나
제가 오념처(五念處)에서 밝혔듯이
대광념처(大光念處:=無量光)로 나아가야 한다 하겠습니다.
5념처와 대광념처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사견임을 밝혀드립니다.
대광념처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제 서재에서 "오념처"란 글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삶의 업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나 끝없이 펼쳐지는 이 삶은 무엇인지요?



대광념처에 있는 분으로는
5념처가 전체를 꿰뚫고 있을 것이며
법념처에 있는 분이라면
4념처 전체를 꿰뚫고 있을
것입니다.




삶의 업에 매이지 않는다 하나
삶의 업이 있는 그대로
법이고 진리이지
진리나 법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니
진리와 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만큼 삶의 업에 매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업에 메이지 않고 삶의 업에서 진리와 법을 본다 할 것입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이 삶을 모르는 이들은
꿈을 꾸는 것과 같고 꿈속의 일로 허망하다 하겠으나
진리와 법에서 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이
삶은
있는 그대로 진리 속 법의 삶이고
업의 삶이라 하나 업의 삶이 아닌
인과 연으로 이어지는 연기법의 삶이고 진리며 법이고

법이며 진리로 무량광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모든 것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겠으나
보는 사람이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진리나 법을 보지
못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법이나 진리를 알기 전에는
법과 진리로 드러난 것들이 꿈을 꾸는 것과 같고
꿈 속의 일로 허망하다
하겠으나
업이 되고 아니 되고을 알면
삶이 업으로 이루어지는 지를 알고
인연을 알면 업의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지를
알고
연기의 인연법을 알면 연기의 인연법에 의하여 생멸하는 지를 알고
진리를 알면 진리 속에서 인과 연에 의하여 진리로 생멸하는 지를
알고
법을 알면 법 속에서 인과 연의 법에 의하여 무생하는 지를 알고
무량광을 알면 무생하는 법이 무량광으로 드러나 있는 지를
알게되니




끝없이 펼쳐지는 이 삶은 있는 그대로
진리고 법이고 무량광으로
바라봄으로
바라보는 순간 드러난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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