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가는 길

본성은 닦을수록 밝아지지만 본성의 성품은 닦을수록 멀어져 간다.

칠통漆桶 조규일 2024. 12. 11. 07:26

본성은 닦을수록 밝아지지만 본성의 성품은 닦을수록 멀어져 간다.  / 칠통 조규일



"무아(無我), 무상(無相), 무주(無住)라 했고 그 실체가 없다"고 초기경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 곳도 없고 갈 곳도 없이 언제나 그 자리이다. 여여부동(如如不動)의 자리, 절대적인 자리이다. ㅣ

깨달음을 증득했다는 자, 혜오(慧悟)했다는 자, 해오(解悟)했다는 자들

무아(無我), 무상(無相), 무주(無住)를 말하면서

모두 다 여기에 머물러 있어서 그 이상을 이야기하면 알아들으려 하지 않고 귀를 막아버린다.
마치 귀머거리에 눈을 뜨고 있음에 또 눈을 떴음에도 눈 뜬 봉사다.

해오나 혜오 견성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 보기에 중생이 눈 뜬 봉사이겠지만

본인이 볼 때 해오(解悟) 혜오(慧悟) 견성(見性) 깨달음을 얻었다는 자들이

공(空)과 공(空)의 성품 공상(空相)을 깨고, 공(空) 이전의 것들을 밝혀 말하여 알려줌에도
눈 뜬 봉사로 귀를 막고 알아듣지 못하거나 또는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마치 거대한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고 마치 뚫을 수 없는 벽에 부딪쳐 있는 느낌이다.


이렇듯 혜오하고 깨달음을 증득한 각자들이 공(空)에 빠져 있고
공의 성품에서 공상(空相)에 놀아나는 것은 부처님의 잘못이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전한 제자들의 잘못이 크다.

본인이 보는 부처님은 그 이상까지 이르렀음이 분명하고 그러했기에
자등명(自燈明)이란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서
제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에서 기억해 내고 또 의논해서 서술했으니.

그것을 믿고 또 그것에 머물러 공(空)에 빠져
공의 성품인 공상(空相)에서 끝이 났다고 생각하도록 한 잘못이 매우 크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자등명이란 빛을 말했고
빛의 밝기도 인간의 몸으로 이룰 수 있는 한,  많은 부분 이루신 분이라 생각한다.

본인은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지금의 경계에서 부처님(선사님은)은 어떤 것을 더 밝혀서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가셨을까?'

라는 물음을 통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이 걸어온 길을 따라 수행 정진해 왔다.


그리고 본인은 깨달음을 증득 이후
본인이 밝힌 공의 성품에 있는 자등명에 대하여 설명을 했고 자등명에 대한 말을 참 많이 했다.

그럼에도 수행이 어느 정도 되어서
공(空)을 알고 공(空)의 성품을 알고 공상(空相)을 안다고 하는 수행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본인은 마치 외도라도 되는 듯 취급하고 아니면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한 자로 취급당한다.

본인은 그 누가 뭐라 해도 깨달음을 증득한 것 분명하고, 텅 빈 허공에 시방을 비추며 있는 빛 자등명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았고,

그것이 업을 주변에 붙이고 옮겨다닌다는 것을 알고 밝혀놓았다.
본인이 체험하고 경험한 것 분명하다.
누가 아니라 해도 본인에 있어서는 직접 보고 구경했으니 어긋남 없이 분명하다.

다만 본인이 말하는 공(空), 공의 성품, 공상(空相) 이전에 일들을 밝혀 놓음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것에 있어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고,
깨달음을 증득하고도 못 알아듣거나 견성(見性)이나 혜오(慧悟)하고도 못 알아듣는 것을 보면
마치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고 눈 뜬 봉사에 귀머거리라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무아(無我), 무상(無相), 무주(無住)로 그 실체가 없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 외에는 없다. 없다라는 것 자체도 그러하고 있다해도 맞지 않는다며 공상(空相)을 이야기한다.     

이는 자기 자신이 있는 경지에서 볼 뿐 전체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본성(本性)의 성품은 공(空)하되 본성(本性)은 공(空)하지 아니하고
빛 자등명으로 무량광 무량수이다.

본성(本性)으로부터 본성의 성품이 드러났고
드러난 본성의 성품은 공(空)의 성품으로 공(空)을 이루고 텅 빈 허공으로 있는 것이다.

이렇듯 본성의 성품이 공의 성품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본성의 성품은 공(空)하기 때문에 닦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고 보아서 자각(自覺)하면

자각하는 순간 공(空)의 성품으로 해오(解悟)하거나 혜오(慧悟)하거나 견성(여기서 見性은 본성을 봄이 아니라 본성의 성품을 봄이다.) 깨달을 수 있다.

혜오 견성 깨달음을 증득했다고 해서 본성인 자등명에 이를 수는 없다.

혜오 깨달음은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성품에 있고,

본성의 성품은 공(空)에 있어서 텅 빈 허공에서 공(空)을 통하여 공의 성품인 본성의 성품을 보면

보는 순간 자각하는 정도에 따라 혜오하고 견성하고 깨닫는 것이다.

혜오는 공(空)의 성품을 자각하는 것이고 견성은 공의 성품을 보는 것이고

깨달음(여기서 깨달음은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은
일체가 공의 성품으로 하나라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성의 성품을 보는 것으로 자각하여 해오하고 혜오하고 깨닫는 것이어서

한 생각 돌이키면 혜오하고 견성하고 깨닫는 것이고
공(空)하여 닦으면 닦을수록 멀어져가지만

업에 둘러싸여 있는 업(식)덩어리는 닦으면 닦을수록 밝아진다.
업(식)덩어리 안에는 텅 빈 허공(空)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등명이란 빛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은 공(空)에 있지 않으며 공의 성품에 있지 아니하다.

마음에 있고 마음이란 작용을 일으키는
업(식)덩어리에 있어서
닦으면 닦을수록 마음이 밝아지고 맑아지며 빛이 나는 것이다.

수행한다고 하면서 공(空)에 빠져 있거나 공의 성품에 빠져 있지 마라.

수행하면서 공에 빠져 있거나 공의 성품에 빠져 있게 되면
수행한다고 닦는 것이 오히려 공(空)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닦고 마음작용을 일으키는 업(식)덩어리를 닦는다면 닦는 만큼 밝아질 것이다.


수행 정진할 때는 닦을수록 밝아진다며 수행 정진했으면서도
본성의 성품을 보고 자각하고 혜오나 견성 깨달았다고 하면서
깨닫고 나서는 닦으면 닦을수록 멀어져간다며 닦지 않고 여여하게 지내려한다.


수행할 때는 닦을수록 밝아진다는 사실을
공의 성품에 이르러서는 닦을수록 본성과 멀어져 간다고 생각하고 여여하게 행하거나 행하려 하니.


수행 정진할 때  닦을수록 밝아진다는 것에 대하여 잊었단 말인가?

수행 정진할 때 무엇 때문에 수행 정진하면서 밝아졌는가? 밝아지는가? 밝혀내고 싶지 않은가?


이는 자기 자신이 이룬 것 곳에 대하여 머물러 안주하려 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많은 수행자들이 혜오 견성 깨달음을 증득하고서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본성의 성품이라고 하는 공의 성품에서 자각하여 혜오 견성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혜오 견성 깨달음은 서로 다른 경지가 아니라 혜오가 견성이고 견성이 곧 깨달음인 것이다.

그러나 업(식)덩어리라고 하는 업(식)덩어리 안에 있는 자등명이란 빛 본성에서 보면
혜오와 견성과 깨달음은 제각각 다르다.

오래 전에 본인이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한 것처럼.... 오랜 전에 혜오와 견성 깨달음이 같다고 하는 자들 다 가짜라 했다.

공(空)에서 공의 성품으로 보고 자각하고 자각하는 정도에 다라 다를 뿐 다른 것이 아니기에
같다고들 한 말들이었던 것이다.

선문답을 주고받다가 무슨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고 하는 말들,

거의 모두 다 공(空)에서 공의 성품을 보고
공의 성품을 자각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그러하기에 깨달았다고 하면서
돈오돈수(頓悟頓修)라 하지 못하고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말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하면 돈오점수를 말한 분들 확철대오가 아닌

수행 중에 한 생각 돌이켜 공의 성품을 자각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는 수행자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경우 수행 정진하여 자성경제의 일원상이 깨지면서 깨달음을 증득한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공의 성품을 자각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과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깨부수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공의 성품을 자각하고 깨달았다 하는 자들 돈오점수를 말할 수 있어도 돈오돈수를 말할 수 없으며,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깨부수고 깨달은 자들 돈오돈수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돈오는 점수가 아니라 돈오돈수라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로되,
공의 성품으로 자각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 어찌 돈오돈수라 할 수 있으며
깨달음은 돈오돈수가 아니라 돈오점수라 주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님께서 지금 보고 있는 텅 빈 허공을 통하여
공을 자각하고 공의 성품을 자각하면 자각에 따라 크게 깨달았다 할 것이다.

어느 곳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러나 이들은 업(식)덩어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업(식)덩어리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래서 자등명이란 빛에 대하여 알려주고 업(식)덩어리에 대하여 말하여 주고 밝혀 주어도 모른다.

그리고 "무아(無我), 무상(無相), 무주(無住)로 그 실체가 없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꽉 들어차 움직일 틈이 없다. 그러니 오고 감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생은 몰라서 그렇다 치자.

혜오했고 깨달음을 증득했다는 자들이 앞뒤가 꽉 막혀서
텅 빈 허공(空) 가득 꽉 들어차 있는 성품 공(空)의 성품에 빠져 요지부동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누구의 잘못인가? 부처님의 잘못이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전한 제자들의 잘못이고 깨달음을 증득하고 공에 머물러 더 이상 수행 정진하지 못하고서 공에 빠져서는 공놀이하면서 중생들을 깨우치도록 한 조사나 선지식들의 잘못이 크다.


본인의 말은 재가자라 믿지 못할지 모르지만 경허스님이라면 믿음이 좀 가는가?

경허스님은 열반송에 말씀하셨다. "이 다시 무슨 물건이리오."라고, 텅 빈 허공에 경계 없이 있는 빛 이 빛이 바로 본인이 말하고 있는 자등명이다. "영적 구조와 선 수행의 원리"란 책 뒷부분에 올려놓았으니 살펴 보라. 선지식으로 뛰어나다는 경허스님이 살아 생전에 보셨는지 보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죽음을 앞두고 쓰신 열반송에는 텅 빈 허공에 경계 없이 있는 빛 자등명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며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요."라고 스스로 물은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에게 화두로 던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빛과 경계가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요."라면서 텅 빈 허공 속 경계 없이 시방을 비추는 빛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경허스님이 죽음 직전에 쓰신 열반송에서 말씀하신 빛에 대하여 본인은 자등명이란 이름으로 밝혀 내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고 달라붙어 있는 것을 업이라 하고 자등명이란 빛에 업이 달라붙어 있는 덩어리를 업(식)덩어리라고 이름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못 믿는 것이다. 오히려 혜오나 견성이나 깨달음을 증득하지 않은 분들은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살펴서 받아들이는데,

불교 공부를 했다는 분들, 혜오나 견성이나 깨달음을 증득한 이들은 받아드리지 못한다.
오히려 벽에 부딪친 것과 같은 느낌이니. 이는 공부한 것이 혜오니 견성이니 깨달음을 증득한 것이 공(空)에 있고 공의 성품에 있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된다. 본인도 깨달음을 증득했을 당시에 어찌하면 텅 빈 허공의 공의 성품이 될 수 있을까? 해서 그것이 되려고 수행을 했으니 말이다.

만약에 법을 펼 자리가 있어서 법을 폈다면 아마도 본인도 거기서 머무르고 더 이상 수행 정진하기보다는 법을 펴고 때가 묻지 않도록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인은 다행인 것이 재가자다 보니
법을 펼 자리가 없던 관계로 자꾸만 내 안에 들어가 수행 정진할 수 있었고 수행 정진함으로 해서
 경허스님이 죽음직전에 열반송에서 남긴 텅 빈 허공에 빛을 보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수행 정진해 왔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고 복인가 싶다.

한 때는 법을 말함에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 송이 꽃을 피웠으되 꽃을 보거나 꽃향기는 맡는 이 없다며 복이 없구나' 생각했는데

지금에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것이 복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수행 정진해 온 것이고 수행 정진하며 밝혀 놓았으니 말이다.

믿고 믿지 않고는 접하는 수행자의 업이고 인연이다.



초기경전에 부처님의 말을 듣고 제자들이 "무아(無我)고 무상(無相)이고 무주(無住)로 그 실체가 없다."했으니. 부처님을 믿는 분들은 그리고 혜오 견성 깨달음을 증득한 분들은 본인의 말을 믿겠는가?  '텅 빈 허공에 덩그렇게 시방을 비추는 빛이 있다.'하니 외도라 하고 믿을 자가 못된다 하겠지만 본인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본인은 깨달음을 증득한 것 분명하고 텅 빈 허공에 시방을 비추며 있는 빛 자등명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았고, 그것이 업을 주변에 붙이고 옮겨다닌다는 것을 알고 밝혀놓았다. 본인이 체험하고 경험한 것 분명하다.

누가 아니라 해도 본인에 있어서는 직접 보고 구경했으니 분명하다.

그리고 함께 수행하는 도반산행에 오시는 분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고 있고 그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교공부 많이 했다는 분들 혜오나 견성 깨달음을 얻은 각자들은 본인의 말을 믿지 않고 공(空)에 머무르려 할 것이며 공(空)의 성품에서 공상(空相)을 말하며 공놀이하면서 본인을 매도할 것이다.

하심과 겸손한 자가 공부하려고 하려고 하지 않는 한 본인의 많은 말들을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말한다. '분명한 사실이니 만큼 믿고 수행 정진해 가라'고 말한다.

그래야 벗어날 수 있다. 아니고서는 업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깨달음을 증득하고 나서 어떤 분의 말처럼

"법을 펴려면 출가해야 한다. 아니고서는 법을 펼 수 없다. 출가한다면 아마도 지금의 000에서 한 손안에 들 경계이지만 출가하지 않는 한 어려울 것이다." 라고 했을 때 전생에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이가 또다시 처자를 버리고 출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수행 정진하여 마음이란 곳을 바라보면서 자등명이란 빛만이 보이는 데까지 왔으니

이 얼마나 많은 복(福)이고 행복인가?


2009. 01. 08 18:33 칠통 조규일

 

*어느 분과 손전화 통화하고 일어난 생각을 글로 써야겠다 생각하고 시간 날 때마다 쓰다보니. 3-4일이나 걸렸다.

이글에 앞서 공(空)을 통하여 공의 성품에서 어떻게 하면 불(佛)과 불성(佛性)을 자각하여 알도록 할까라는 생각에 글을 쓰려고 하던 차에 동시에 두 글을 쓰다보니 시간에 쓰다 그만 두고 그러다 어제 두 글을 다 쓰기는 했는데
퇴근 시간이 지나서 올리지 않았는데 또 퇴근길 생각이 미치는 부분이 있어서 더 글을 써 옮겨놓았습니다.
또 다른 글을 내일이나 모래 올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