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옷을 빨래하듯 업의 때도 본래의 자기 자신을 위해서 빨래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마라
더러운 옷을 빨래하듯 업의 때도 본래의 자기 자신을 위해서 빨래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마라. / 칠통 조규일
수행을 하다보면 업이 들고 일어난다. 수행을 해서만 업은 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생활하다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부딪치게 되고 또 어떤 일과 일로 부딪치게 된다.
부딪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업으로 인한 것이다.
업으로 들고 일어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모두 다 업으로 들고 일어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업으로 들고 일어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이고 마음이고 자기 자신의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업을 자기 자신이고 생각하고 업을 자기의 마음이라고 하고 업을 자기 자신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 의식, 생각의 업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일어난 것이 업인지 모르고 자기 자신, 나, 내 것이란
생각 때문에 자신의 마음, 의식 생각을 나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업을 보호하려고 한다.
아니 업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자기 자신, 나, 내 것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업을 보호한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 나,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부딪치면 부딪침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별 소리를 다한다.
잘 소통이 되면 그냥 넘어가지먄 잘 소통되지 않아 부딪치면 업에 상처 입었다고
아니 자기 자신이 나. 내 것이라고 하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난리다. 그것이 업인지 모르고 보호하려고 한다.
수행은 닦는 것이다. 행을 통해 닦는 것이다.
단순한 행이 아니라 생각이 행, 의식의 행, 마음의 행....자기 자신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을 통해 닦는 것이다.
자등명을 에워싸고 있는 본래 변화 없고 흔들림이 없는 그 어느 것에도 상처 입지 않는 것 자기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업을 닦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닦는 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말로는 닦는다고 하면서 막상 일어나면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며 괴로운 것이 가라앉아 편안해지기를 하라고 힘든 것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업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거나 피하거나 회피하며 수행한다고 한다.
부딪쳐 들고 일어나면 좋아해야 하는데 부딪쳐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피한다.
들고 일어나는 업을 닦거나 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들고 일어난 것으로 괴로워하고 싫어하며 업을 보호한다.
자기 자신이 괴롭다는 이유로 힘들다는 이유로 공부를 하지 않는다.
수행한다는 것은 공부한다는 것은 닦는 것이며 씻는 것이다. 마치 빨래를 하는 것과도 비교를 할 수 있다.
더러워진 옷을 빨래하기 위해서 찌든 때를 벗기기 위해서 수행이란 공부란 물에 담구고,
수행이란 공부란 것을 하며 찌든 옷에 하이타이 및 각종 세제를 넣는다.
업이란 때를 벗기기 위해서 업이란 때를 씻기 위해서...
그러면서도 막상 업이 들고 일어나면 들고 일어난 업을 보호하려고 한다.
업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을 지나 업을 닦을 수 있고 씻을 수 있는데도 업을 닦지 않고 업을 씻지 않고 그냥 둔다.
마치 찌든 때의 옷을 세탁기 안에 담가 놓고 조금이라도 더 세탁이 잘 되도록 각종 세제를 넣어놓고
수행이란 공부란 물을 부어놓고 막상 때란 업이 들고 일어나자 힘들고 괴로우니 씻거나 닦지 않고
그냥 그대로 말렸다가 다시 입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업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체험하거나 경험해서 알 수 없다고 씻거나 닦아야할 업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수행한다고 하면서도 씻는 것을 싫어하고 닦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며 오히려 보호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업을 들고 일어나면 씻거나닦아야 함에도 씻거나 닦지 않고 보호하며 들고 일어난 찌든 때의 업을 그대로 말려서 입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때로 찌든 옷을 물에 담가 세제를 섞어놓고 빨래하지 않고 그대로 말려서 입으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때든 때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씻고 닦고 문지르며 깨끗하게 해서 그것도 먼지 없는 곳에 말려서 입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업이란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공부한다고 하면서 수행하려고 하면서 업이란 찌든 때를 물에 담구고 각종 세제로 업을 불어나게 해서는 불어난 것을 싫어하거나 들고 일어나는 것을 닦거나 씻기보다는 들고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 피하고 외면하며 수행이란 공부란 물에 담갔었다가는 들고 일어난 때, 들고 일어난 업을 흘러버리지 못하고 닦거나 씻어내지 않고 나라고 하는 업이 힘들고 괴롭다는 이유로 들고 일어나는 것을 피하여 더러운지 깨끗한 곳인지도 모른 채 말려서는 업이 달라붙은 채 그대로 둔다.
어떻게 보면 더 단단해진다. 처음에는 때란 업이 붙어 있다가도 수행이란 공부를 해서 때란 업이 들고 일어났다가 씻지 않고 닦지 않고 다시 달라붙으면 그렇지 않을 때 보다 더 단단하게 달라붙는다.
그래서 수행한다고 하면서 수행이란 공부를 하면서 아만 자만 자기 자신의 업만 더 보호하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조심할 일이다.
수행이란 공부를 하면서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려고 찾으려고 했던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고 공부하며 업이란 때를 물에 담구고 각종 세제를 부어서 업이란 때가 불고 들고 일어났는데, 들고 일어난 업의 때를 보호하며 그것이 가라앉아 다시 달라붙어 있기를 아니 더 단단하게 달라붙어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은 듯싶다.
혹여 나는 수행한다고 하면서 공부한다고 하면서 업의 때가 들고 일어나니 닦거나 씻는 것을 그만 두고 수행이란 공부를 그만두거나 아니면 수행이란 공부를 잠시 접으며 업의 때가 다시 달라붙어서 더 단단하게 굳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살펴보라.
업의 때를 닦고 씻기 위해 수행이란 물에 담구고 공부란 세제를 부어서 업이란 때가 불어나니 불어나는 업이란 때로 괴롭고 힘드나 그만 두거나 아니면 수행을 그만 두고 공부를 그만두거나 잠시 쉬며 말려서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서 자기 자신의 업이란 때를 보호하고 업이란 때가 더 단단하게 본래의 자기 자신에게 달라붙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보라.
업에 속고 있고 업이 자기 자신인지 알지만 본래의 자기 자신에서 보면 업은 때이다.
업이란 때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 생각하며 부딪쳐 일어나는 의식 마음을 보호하려고 하며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자신을 잘 살펴라.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업이란 때를 보호하면서 업이란 때에게 속으면서 업이란 때를 나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라고 하며 업의 때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라.
옷이 더러우면 빨래하면서 왜 본래의 자기 자신에 달라붙어 있는 업의 때는 닦거나 씻지 않고 보호하려고 하는가?
자기 자신이 입는 옷이 중요한가? 자기 자신이 중요한가?
옷은 보이니 중요하고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은 중요하지 않는가?
옷을 빨래하며 깨끗하게 하면서 업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보호하는 것은 자기 자신보다는 옷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육체에 묻은 것은 씻으면서 육체 안에 있는 영체에 있는 더러운 쓰레기 같은 업의 때를 벗기지 않고 씻지 않고 닦지 않는 것은 본래의 자기 자신보다 옷을 더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혹여 나는 그러하지 않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라.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본래의 자기 자신을 회복하라.
본래의 자기 자신을 찾으라.
옷을 깨끗하게 할 생각만 하지 말고 육체를 깨끗해 할 생각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할 생각을 하라.
자기 자신 안에 자기 자신은 나 몰라라 하면서 육체의 깨끗함만 쫓는 것은 아닌지?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늙고 병들고 아프고....죽을 것이다. 이러한 육체도 중요하지만 옷을 더 중하게 생각해서 옷에 묻은 때는 더럽다고 빨래하면서 마음의 업의 때를 왜 빨래하지 않는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다만 소중하고 귀중한 것에도 순서가 있다.
그 순서를 잊으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
더러운 옷을 빨래하듯 업의 때도 본래의 자기 자신을 위해서 빨래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마라.
옷을 깨끗하게 빨래해서 입는데 육체가 더러우면 보기에 어떠한가?
육체는 깨끗한데 옷이 더러우면 어떠한가?
영적공부를 한다는 사람이 옷을 깨끗해서 입었는데 육체가 더러우면 어떠한가?
옷도 육체도 닦고 씻어서 깨끗한데 영적으로 보면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의식, 부정적인 마음으로 육체 안에 영적인 부분이 각종 쓰레기, 오물로 새까맣다면 어떠한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중요한 순서가 있다.
그것은 육체 안의 내가 깨끗해야 하고 그 다음에 육체가 깨끗해야 하고 그 다음에 옷이 깨끗해야 한다.
옷을 깨끗하게 입고 육체가 더러워도, 육체가 깨끗하고 육체 안의 내가 더럽고 더러워도 그렇다.
옷이 더러워도 그렇고, 육체가 더러워도 그렇고, 육체 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이 부분이 더러워도 그렇다.
혹시 옷을 깨끗하게 멋있게 입으려고 하면서 육체를 씻지 않는 것은 아닌지?
옷을 깨끗하게 멋있게 입으려고 하며 육체도 깨끗하게 하면서도 육체 안에 영적인 부분은 각종 쓰레기 오물에 새까맣지는 않은지?
그대는 어느 것을 더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 의식하고 여기는가?
혹여 육체보다 옷을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본래의 나보다 육체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옷을 빨래하면서 육체란 몸은 씻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옷과 육체를 씻으면서 육체 안의 본래의 나는 씻지 않고 업의 때로 가득한 것은 아닌지?
육체 안의 자기 자신 안의 업의 때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도 본래의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업의 때에 놀아나고 있지는 않은지?
그대가 육체의 때에 놀아나는 사람을 본다면 그대는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육체의 때를 새까맣게 하고서 옷을 깨끗하게 멋있게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그대는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육체를 무시하고 옷만 보는 사람은 옷을 깨끗함으로 보면서 육체의 깨끗함은 보지 않을 것이며, 육체를 보는 사람은 육체의 깨끗함을 보며 옷을 깨끗함도 볼 것이고, 영적인 부분까지 보는 사람은 영적인부분의 깨끗함을 보고 육체도 보고 옷도 볼 것이다.
그대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옷만을 보는가? 육체를 보는가?
영적인 부분 본래의 자기 자신도 보는가?
옷만을 보는 사람은 육체를 보지 못하고 옷만을 볼 것이며 옷과 육체를 보는 사람은 옷과 육체를 볼 것이며 본래의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은 영적인 부분까지 보게 될 것이다.
보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다. 잊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본래의 자기 자신이든 영적인 부분이든 육체의 부분이든 옷이든 잃어버리지 않고 잊지 않은 한 아는 한 아는 한에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
육체가 더러운 사람이 옷을 깨끗하게 입지 않았다고 옷이 깨끗하지 않다고 욕한다면 이 사람 어떻게 생각되는가?
영적으로 더러운 사람이 육체가 옷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욕한다면 이 사람 어떻게 생각되는가?
그 어느 누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깊고 깊은 본래의 자기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겉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귀하고 소중할 것이다.
겉을 보는 사람은 겉에 얽매이며 업의 때에 놀아날 것이며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본래의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는 사람일수록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대는 어느 부류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고 깨어나라.
함 없이 깨어나라.
2015. 08. 09 13:54 칠통 조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