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禪定) 삼매(三昧)란
선정(禪定) 삼매(三昧)란 / 칠통 조규일
"어떤 것을 선(禪)이라 하며, 어떤 것을 정(定)이라 하는가?"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생각과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禪)이다.
그러므로 선은 번뇌 망상과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 아니함이 선이고
머리(부분)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의식 뜻과 의지의 작용이 그치며 고요해지면서
가슴(부분)에 내려와 업(식)덩어리에 닿아 있는 것을 정(定)이라 한다.
이러하니 선정(禪定)이란
번뇌 망상을 쉬고 생각과 의식을 쉰 상태에서
마음이 업(식)덩어리에 닿아 업(식)덩어리를 바라보며
업(식)덩어리를 관하고 있는 것을 선정이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삼(三)이라 하며, 어떤 것을 매(昧)라고 하는가?"
본성이 여여하게 시방(十方)을 비추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제 7식과 8식과 9식을 삼(三)이라고 하고
선정(禪定)에 들어서
정(精)이라 하고 영(靈)이라 할 수 있는 업(식)덩어리를 바라보고 관하며
본성에 달라붙어 있고 에워싸고 있는 업(業)이라고 하는 7식과 8식 9식이
밝디밝은 본성의 자등명에 달라붙어 있고 에워싸고 있음으로
밝디밝은 자등명이 시방(十方)을 비추지 못함으로 어둡고 컴컴한 무명으로 인하여
삼독(탐(貪) 진(瞋) 치(癡))이 되고 있는 업식을 닦거나 떨어내며
본성이란 자등명으로 들어가는 길 없는 길을 만들어
마치 태양과 같은 자등명이 업으로 인한 무명의 어둠을 뚫고 들어감으로
마치 깊고 깊은 어둠의 무명이 밀려가고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이
새벽이 오도록 하고 동이 터 오도록 해서
자등명이 태양과 같이 시방을 두루 밝게 드러나도록
업을 닦거나 떨어내며 자등명으로 가는 것이 매(昧)이다.
이러하니 삼매(三昧)란
업(식)덩어리를 뚫고 들어가면서 길 없는 길을 만들며
태양과 같은 본성의 자등명이란 빛으로 가는 것을 삼매라 한다.
그러니 선정(禪定)삼매(三昧)란
번뇌 망상을 쉬고 생각과 의식을 쉰 상태에서
마음이 업(식)덩어리에 닿아 마음으로 업(식)덩어리를 바라보며
업(식)덩어리를 뚫고 들어가면서 길 없는 길을 만들며
태양과 같은 본성의 자등명이란 빛으로 가면서
본성의 자등명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선정(禪定)삼매(三昧)라 할 것이다.
자등명이란 본성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생심(無生心)으로
맑고 깨끗한 밝디밝은 물들지 않은 마음이고
물들지 않은 맑고 깨끗한 밝디밝은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며
물든 무명의 마음은 중생의 마음이다.
해탈이란 밝디밝은 본성을 달라붙고 에워싸고 있음으로 무명이 되도록 하고 있는
안이비설신 각각의 식과 제6의식과 제 7식 제 8식 제9식을 벗어버리고
본성이란 밝디밝은 자등명에 이른 것을 해탈이라 할 것이며
또한 이를 생사 윤회를 건너 피안(彼岸)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2008. 05. 14 08:36
* 이 글은 장선미 보살님의 [돈오입도요문론] 사경글을 어제 향기함에 올리면서
읽을 때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본인이 도반모임에서 설명한 것이 연상되었었는데
오늘 아침에 다르게 생각되는 것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향기함에 어제 올린 "무주처와 무주심"란 글에서 선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과
비교 검토해 공부하시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선정(禪定) 삼매(三昧)
"어떤 것을 선(禪)이라 하며, 어떤 것을 정(定)이라 하는가?"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생각과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禪)이다. 그러므로 선은 번뇌 망상과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 아니함이 선이고 머리(부분)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의식 뜻과 의지의 작용이 그치며 고요해지면서 가슴(부분)에 내려와 업(식)덩어리에 닿아 있는 것을 정(定)이라 한다.
이러하니 선정(禪定)이란 번뇌 망상을 쉬고 생각과 의식을 쉰 상태에서 마음이 업(식)덩어리에 닿아 업(식)덩어리를 바라보며 업(식)덩어리를 관하고 있는 것을 선정이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삼(三)이라 하며, 어떤 것을 매(昧)라고 하는가?"
본성이 여여하게 시방(十方)을 비추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제 7식과 8식과 9식을 삼(三)이라고 하고, 선정(禪定)에 들어서 정(精)이라 하고 영(靈)이라 할 수 있는 업(식)덩어리를 바라보고 관하며, 본성에 달라붙어 있고 에워싸고 있는 업(業)이라고 하는 7식과 8식 9식이 밝디밝은 본성의 자등명에 달라붙어 있고 에워싸고 있음으로 밝디밝은 자등명이 시방(十方)을 비추지 못함으로 어둡고 컴컴한 무명으로 인하여 삼독(탐(貪) 진(瞋) 치(癡))이 되고 있는 업식을 닦거나 떨어내며, 본성이란 자등명으로 들어가는 길 없는 길을 만들어 마치 태양과 같은 자등명이 업으로 인한 무명의 어둠을 뚫고 들어감으로 마치 깊고 깊은 어둠의 무명이 밀려가고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이 새벽이 오도록 하고 동이 터 오도록 해서, 자등명이 태양과 같이 시방을 두루 밝게 드러나도록 업을 닦거나 떨어내며 자등명으로 가는 것이 매(昧)이다.
이러하니 삼매(三昧)란 업(식)덩어리를 뚫고 들어가면서 길 없는 길을 만들며 태양과 같은 본성의 자등명이란 빛으로 가는 것을 삼매라 한다.
그러니 선정(禪定)삼매(三昧)란 번뇌 망상을 쉬고 생각과 의식을 쉰 상태에서, 마음이 업(식)덩어리에 닿아 마음으로 업(식)덩어리를 바라보며, 업(식)덩어리를 뚫고 들어가면서 길 없는 길을 만들며, 태양과 같은 본성의 자등명이란 빛으로 가면서 본성의 자등명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선정(禪定)삼매(三昧)라 할 것이다.
자등명이란 본성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생심(無生心)으로 맑고 깨끗한 밝디밝은 물들지 않은 마음이고, 물들지 않은 맑고 깨끗한 밝디밝은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며 물든 무명의 마음은 중생의 마음이다.
해탈이란 밝디밝은 본성을 달라붙고 에워싸고 있음으로 무명이 되도록 하고 있는 안이비설신 각각의 식과 제6의식과 제 7식 제 8식 제9식을 벗어버리고, 본성이란 밝디밝은 자등명에 이른 것을 해탈이라 할 것이며 또한 이를 생사윤회를 건너 피안(彼岸)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2008. 05. 14 08:36
자등명 직관 수행의 원리라 할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수행 정진하라."란 글에 간단히 대입시켜보면, 생각 의식 신의 머리부분을 쉬어줌이 선(禪)이요, 가슴부분의 업식덩어리에 마음이 닿아 있는 것이 정(定)이요, 7식 8식 9식(견성)등의 세 잠재의식이 삼(三)이요, 업식덩어리(7식 8식 9식)에 닿아 있는 마음으로 업을 뚫고 파헤치며 자등명이 드러나도록 함이 매(昧)요. 하여 선정삼매로써 본성의 자등명을 드러내야 한다. 마음으로 업식덩어리를 직관하여 들어가 자등명에 이르러서 자등명에 머무르고 자등명에 머물러서는 무생심(無生心)이 되고 무생심이 되어서는 텅 빈 허공에 자등명만이 시방을 비추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생각 의식 신의 머리부분을 쉬어줌이 禪이요, 가슴부분의 업식덩어리를 마음의 눈으로 바라봄이 定이요, 7식 8식 9식(견성)등의 세 잠재의식이 三이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업식덩어리(7식 8식 9식)를 마음으로 뚫고 파헤침을 昧라 ...하여 선정삼매로써 본성의 자등명을 드러낸다 하겠습니다. 2008. 05. 14 오후 06:34 칠통 조규일
삼매에 듦으로... / 칠통 조규일
수행에 관심은 있어서 가끔 책을 읽어보곤 했으나
간절함과 절실함이 부족해서인지 깊이 파고들진 못하고 있습니다
사념을 끊고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더군요
이 글을 쓰게된 동기는 제가 느꼈던 좀 이질적인 의식에 대하여 여쭙고저 함입니다
오래 전 이야기인데저는 앉아서 한가지 생각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이란 것이 제가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갈망 이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분별이 없어졌습니다
나와 네가 하나이고 위 아래가 없고 방위가 없고 시간관념이 없고
행, 불행 이 없고 내가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상태를 잠깐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자아와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있다면 오래 전에 (15년전)에 한 번 느끼곤 왜 소식이 없을까요?
아니면 거짓된 마음의 개체적 자아인가요?
또 한가지는 제가 어릴 적에 중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자기최면이라는 책을 구해다가 열심히 연구하고 실험해 본적이 있습니다
생각 속에서 칼라색으로 꽃밭을 만들고 벌과 나비를 만들고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즐겼습니다
물론 색상은 너무도 선명했고 음악은 때로는 스스로 작사 작곡이 되어서
저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즐거웠고 어느 날에도
저는누워서 눈을 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암시를 주며 흩어 내려가던 중
제 몸이 살아져버렸습니다 의식은 있는데 몸을 찾을 수 없더군요
무섭고 겁나서 한참동안 몸을 찾았습니다
손끝에서부터 감각이 찾아와 몸을 찾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최면을 그만 두었습니다
제가 알고저 하는 것은 몸이 사라진 상태에서의 의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순수의식 이였다고 생각은 안 들지만
혹시라도 사람이 몸을 버리고 죽으면 그 의식이 자리하지 않나요?
--- 수행하는 방법도 잘 모르고 해서 의식이라도 항상 현재에 머무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생각이 과거나 미래로 널뛰는 것도 사실은 피곤한 일이더군요
수행하다가 의심이 가면 여기 와서 여쭤보겠습니다
앉아서 한가지 생각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이란 것이 제가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갈망 이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분별이 없어졌습니다
나와 네가 하나이고 위 아래가 없고 방위가 없고 시간관념이 없고
행, 불행 이 없고 내가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상태를 잠깐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자아와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있다면 오래 전에 (15년전)에 한 번 느끼곤 왜 소식이 없을까요?
아니면 거짓된 마음의 개체적 자아인가요?
님이 느낀 것은 자아임에 분명한 것 같고
이성에 대한 갈망 집중 몰입 선정에 듦으로 해서
생각으로 의식으로 마음으로 하나가 된 것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수행이란 것을 하다보면
자기 자신의 경지에서 한 단계 한 단계 뛰어넘을 때마다
가지고 있는 경지를 올라섬으로 느끼게 되는 현상 중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일단 올라서서면 마음과 의식 생각이 환해지지요. 걸림 없이 막힘 없이...
막 한 단계 더 올라선 곳에서 보면
님이 앞에서 말한 것들을 느낄 수도 있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의식할 수도 있으며 마음으로부터 느낄 수도 있답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시간이 흘러감으로 해서
한 단계가 경지가 올라서서 처음은 확 트여져서 걸림이 없지만
한 단계 올라선 경지를 적응하여 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사리분별 망상이 일어나고 너와 내가 있게 되지요.
그럼에도 수행하여 가면 또 다른 장애와 걸림을 만나게 되지요
이는 수행하면서 그럴 수도 있고 또 살아가면서 그럴 수도 있지요
문제는 장애와 걸림이 또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때 장애와 걸림은 앞에서 경험한 단계의 경지에서의 장애와 걸림으로
또 한 단계 뛰어 올라서기 위한 장애이고 걸림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는 과정에서
올라서 환하여 걸림이 없는 듯하다가
또 지나면 장애와 걸림이 생기고...
또 장애와 걸림을 넘어서면 또 환하여 걸림이 없는 듯하다가
또 장애와 걸림이 생기지요...
한 소식 돈오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님이 묻고 있는 자아임에 분명하고
자아가 한 꺼풀 벗겨질 때 느끼는 것으로
본래의 참마음에서 업을 가진 거짓된 마음의 개체적 자아로
수 없이 많은 내 안의 내가 한 꺼풀 벗겨진 것으로
본래 마음이 된 깨달음과는 관계가 없고
하고 있는 수행에서 그 당시 님이 가지고 있던 경지
수행의 단계에서 한 단계 뛰어넘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누워서 눈을 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암시를 주며 흩어 내려가던 중
제 몸이 살아져버렸습니다 의식은 있는데 몸을 찾을 수 없더군요
무섭고 겁나서 한참동안 몸을 찾았습니다
손끝에서부터 감각이 찾아와 몸을 찾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최면을 그만 두었습니다
제가 알고저 하는 것은 몸이 사라진 상태에서의 의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순수의식 이였다고 생각은 안 들지만
혹시라도 사람이 몸을 버리고 죽으면 그 의식이 자리하지 않나요?
집중이 잘되고 삼매에 잘 드는가 봅니다.
선정 삼매에 들면서 ...님이 말하는 것과 같이...
행하는 의식하고 생각하는 나는 분명 있되 육체의 나는 없는 듯하지요.
자기암시를 했으니 자기 암시했던 자신만 있지
육체가 사라진 듯 육체가 인식이 되지 않지요.
그러다 육체를 인식하고 의식함으로 서서히 육체의 모든 것들이
잠에서 깨어나듯 하나 하나 인식 의식되지요.
즉 님이 말하는 것처럼 감각이 찾아왔다기보다는
마음과 의식 생각으로 육체를 떠나 자기암시를 통하여 행했던 것에
집중 몰입 선정 삼매에 듦으로 육체를 느끼지 못하다가
마음 내지는 의식 내지는 생각이 깨어 육체를 인식하려고 함으로
마음 내지는 의식 내지는 생각이 육체를 의식하고 인식하려고 깨어남으로 인하여
감각으로 몸을 느끼고자 했던 곳으로부터 느꼈다고 해야하지 않나 싶군요.
이것은 어떤 의식이냐 하기보다는
집중 몰입 선정 삼매에 듦으로 해서
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으로 의식으로 생각으로
일심 일념으로 했을 뿐...의식으로의 새로운 전환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순수의식이라면 맑고 청정한 의식으로 우주의식을 순수의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주의식이라고 했으나 다른 말로 한다면 허공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주의식 허공의 의식이라 했으나 하늘의 의식
부처님 의식이고 하나님 의식이라할 것입니다.
님이 생각해 되돌아보면 알겠지만 그 당시의 의식은
최면을 통한 자기암시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최면을 통한 자기 암시 속에 있는 의식을 허공의 의식이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허공 의식이 아니라 님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의식이고
최면을 통한 자기암시할 당시의 의식이었을 뿐
그 의식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 것으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한 새로운 경험으로 경험한 만큼 의식하고 인식함으로
의식이 최면하기 전에 의식에서 변화했을 뿐
님의 의식 그대로에서 경험한 것이다 하겠습니다
사람이 몸을 버리고 죽으면
죽기 직전의 의식으로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벗듯
육체의 몸을 버리고 죽으면 육체의 몸만 버려질 뿐
기존 가지고 있는 마음 의식 생각은 그대로라고 하겠습니다.
마치 옷을 벗든 업든 내 육체는 그대로 이든
육체의 몸을 버리고 죽든 육체의 몸으로 살아 있든
자기 자신은 변함 없이 그대로라 하겠습니다
다만 육체의 몸을 빠져나오면서
육체의 몸을 벗음으로 몸으로 버리고 죽음으로...
죽는 순간 몸을 벗고 몸을 버리고..또는 빠져나오면서...
영혼이 나올 곳으로 벗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남으로
혼탁해져서 또는 혼미해져서 잠시 잠깐 ..또는 어느 정도..
의식이 혼미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죽는 순간에 가졌던 의식을 그래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후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 영혼입니까??(제 카페 칠통사랑방 게시판 520번에 있습니다) 란
글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06. 07. 26. 18:31
定과 靜, 靜에 들어가면 얻어지는 이득은? / 칠통 조규일
禪 定 三 昧 = 머리가 쉬고 가슴이 쉬고 7식 8식 9식으로 들어가 자아를 없애고 공의 성품을 알아내는 일이겠습니다. 선정삼매와 靜에 대하여 여쭙니다. 三昧와 靜이 같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걸림에서 선정삼매로 놓여지고 나면 편안하여 靜으로 들어가지는 발전된 과정의 하나인지 아니면 어느 때라도 선정삼매와는 무관하게 들어가 질 수 있는 상태인지요? 저는 아직 靜의 상태를 경험해보지 못했는데 오늘도 어느 걸림을 내 안에서 일을 해서(ㅎ)놓여지고 나니까 편안해지면서 고요히 들어가지는 느낌을 잠깐 받았습니다. 죽비 소리가 나서 깼고요. 靜에 들어가진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靜에 들어가면 얻어지는 이득은 무엇인지요? 09.05.27 23:49
삼매(三昧)는 업(식)덩어리에서 자아를 없애며 공의 성품에 드는 것이고, 靜은 공의 성품에 있는 것이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선정삼매와 다르게 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 저마다가 업으로 인하여 잠시도 고요하게 있지 못하고 흔들리기 때문에 고요한 공의 성품에 있으면서도 늘 물결과 파도 물거품의 흔들림에 있음으로 해서는 공의 성품이라고 할 바다 속 바닷물 속이라고 할 靜에 들어가지 못할 뿐입니다. 定은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라면 靜은 마음이라고 할 것도 없이 고요함 속에 있는 것이다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定은 바닷물이 출렁이는 물결이나 파도, 물거품에 있으면서 고요해지는 가운데 바닷물로 인한 파도, 물결, 물거품을 관(觀)하기 위한 것이라면 靜은 물거품, 파도, 물결을 여의고 바닷물 속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걸림을 제거하고 보니 편안해지면서 고요히 들어가지는 느낌을 갖게 된 것입니다. 定은 물거품, 파도, 물결이라고 하는 곳에서 물거품, 파도, 물결을 여의기 위하여 고요히 또는 가만히 있는 것이라면 靜은 물거품, 파도, 물결과 상관없이 바닷물이라고 하는 바닷물 속에 있는 것과 같으니 定에 들었을 때의 느낌과 靜에 들었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게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靜은 선정삼매와 다르게 靜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만큼 수행의 발전된 과정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수행이 깊어지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 靜이라 하겠습니다. 파도나 물결을 여의고 물 속에 들어간 것과 같은 靜에 들어 좋은 점은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이 흔들림 없이 고요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좋으며 또 마음이 흔들림 없이 고요한 가운데 靜이 깊어지고 깊어져야 바닷물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해인삼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靜에 들지 않고서는 해인삼매를 얻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2009. 05. 28. 07:28
* 김삼주 선생님의 질문하고 대답하기에...메세지는 계속되었습니다...댓글의 질문에 대답하고 다시 정리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