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가는 길

여래(如來) 4. 5. / 칠통 조규일

칠통漆桶 조규일 2025. 5. 26. 07:46

 

여래(如來) 4. 5. / 칠통 조규일

2006. 09. 27 07:46 칠통 조규일

옛날이 아무리 좋았다하더라도 지금만 못하고
미래가 아무리 좋아 보여도 지금만 못한 것이다.
좋고 새로운 미래의 날이 지금 여기 오늘에 있다.
오늘을 잘 지내면 더 좋은 내일이 다가올 것이다.
좋고 새로운 오늘을
지금 여기서 잘 보내도록 하는
하루가 되소서.





있는 그대로 본 성품이다 / 칠통 조규일


부처와 중생 그 이름과 상이 그러할 뿐
있는 그대로 본 성품이다

부처는 성품의 이름이 부처이고
중생은 성품의 이름이 중생일 뿐



부처와 중생의 상과 이름이 서로 다르고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할 뿐

성품으로 보면 본 성품으로 같다 하겠으니


불리어지는 이름과 보여지는 상이나 알고 있는 상을 떠나
이름과 상을 여의고 바로 본다면



보고 있는 그것이 바로 본 성품임으로
보고 있는 자체에서
있는 그대로 본 성품을 보리라.



본 성품을 보는 자
부처를 보고 여래를 보리라.

무엇이 본 성품이고
부처며 여래냐?

2006. 11. 11 07:50
*무위님의 한 생각 메모장에 적은 글을 읽고 댓글 달았던 글을 좀 정리했습니다.







본성의 속성을 보거나 이르러서 깨달았다 하지 마라 / 칠통 조규일


우리들 저마다는
본성이 빅뱅을 일으킴으로 생겨난
본성의 속성(屬性)을 보고 허공이라고 하고
공(空)이라 하며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듯한 공(空)이란 허공
본성의 속성에 본성이 있음으로 인하여
본성으로 인하여 저마다 나라고 하는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나는 형태의 형상인 몸으로 나투어 있지만

나는 물질인 몸과 몸이 형태의 형상을 받도록 한 업식이 있고
나의 업식(業識)은 제6식과 제7식 제8식 본성의 속성과 본성이 있다.

물질인 몸의 색(色)이 공(空)이고 공(空)이 색(色)이지만
공(空)은 본성의 속성이지 본성이 아니다
색(色)이 되도록 했던 것은 본성이지 본성의 속성이 아니다



공(空)이 색(色)이고 색이 공이되
본성(本性)인 자성(自性)이 본성의 속성(屬性)인 공(空)을 통하여 색(色)이 되고
색(色)이 본성의 속성으로 공(空)이 되었다 하여 본성이 된 것이 아니다



본성의 속성인 공(空)이 본성이 되기 위해서는
공(空)인 본성의 속성을 통하여 자성이고 본성인 자등명(自燈明)에 이르러야 한다

색(色)이 공(空)이고 공이 색이되
공이 색이 되게 하고 색이 공이 되게 하는 것은 본성의 속성(屬性)이고
본성의 속성은 본성이 색(色)이 되게 하기도 하고 공(空)이 되게 하기도 하지만
공(空)으로 본성의 속성일 뿐 본성이 아니고 자성이 아니며 자등명이 아니다



본성은 참 성품으로 자성이며 자등명이다
본성이고 자성이고 참 성품인 자등명(自燈明)은 빛이다
그것도 원만하고 원만한 밝디 밝은 빛이다

본성이 본성의 속성인 공(空)을 통하여 색(色)으로 드러나고
드러난 본성은 본성의 속성인 공(空)을 통하여 본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
공이 색이고 색이 공이라 하되
공(空)은 본성의 속성이지 본성이 아니며
본성이 색이고 색이 본성으로 본성의 속성인 공을 통하여 옮겨다닐 뿐이다

공(空)을 반야(般若)하니
반야는 본성의 속성을 반야(般若)라 하며
본성과 본성의 속성을 진실허공이라고
본성과 본성의 속성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을 일러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우리는 이를 알아야 한다
공(空)은 본성의 속성이지 본성이 아니다
반야(般若)는 본성의 속성이지 본성이 아니다




법(法)은 본성의 속성인 공(空)에서의 여(如)로 생멸하고
법계(法界)는 본성과 본성의 속성을 다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고



법성(法性)은 본성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닌 본성을 말하는 것이며
불(佛)은 본성과 본성의 속성을 다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라 하면
반야(般若)인 공(空), 본성의 속성을 말하되
본성이 시방을 비춤으로 본성의 속성으로 드러나 있는 것들을
밝고도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밝혀 아는 앎을 반야의 지혜라 할거다.

지혜(智慧)란
알고 있는 것 아는 것의 지식을 서로 비교하거나 견주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자등명이 시방을 밝게 비추는 가운데
아는 것 알고 있는 것의 길을 통하여 비춤으로
비추는 대상이 분명하고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드러난 것을 확연하고도 분명하게 알게 되는 앎을 지혜라 할 것이다.



그러니 지혜는 지식이나 아는 것 알고 있는 것 식(識)인 업에 있지 않으며
밝게 드러나는 본성의 자등명에 있다고 하겠다.



그럼으로 수행을 통하여 업이 닦이면서 녹으면서
본성의 자등명이 밝아지며 밝아진 만큼 지혜가 생긴다고 하나
지혜는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잃은 지혜를 찾는 것이라 하겠다.

어찌 잃은 지혜를 찾는다 하는가?
그것은 본성의 자등명 자체로 시방(十方)을 비추는 가운데
무명의 업으로 인하여 본성의 자등명이 비추는 시방이
업만큼 점차적으로 어두워짐으로 지혜를 잃었으니
업을 녹이고 업을 닦음으로 본성의 자등명이 점차적으로 드러나는 만큼
자등명이 점차적으로 더 밝게 드러나는 만큼
밝게 밝혀 아는 앎의 지혜가 드러나는 것인 만큼
잃은 지혜를 찾는다 하겠습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색(色)이 공(空)이고 공이 색이되
색을 통하여 공에 이르러야 하고
공에 이르러서는 법(法)에 이르러야 하고
법에 이르러서는 여(如)에 이르러야 하고
여에 이르러서는 본성의 속성을 통하여 본성(本性)에 이르러야 하고
본성인 자등명(自燈明)에 이르러서는 자성경계를 이루고 있는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깨뜨려야 한다 하겠습니다.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空)에 이르러서는 공에 빠져 무(無)라고 하거나 아무 것도 없다 하고
공에 이르러서는 법과 진리를 보고 법과 진리라 하고
공에 이르러서는 여(如)를 보고 여여(如如)라 하고 여래(如來)라 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공(空)에 이르러서
아무 것도 없다. 무(無) 법(法) 진리(眞理) 여(如)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고



공(空)에 이르러 본성의 속성으로 드러난
아무 것도 없다. 무(無) 법(法) 진리(眞理) 여(如)를 통하여 본성에 이르러야 하고



본성에 이르러서는 자성경계(自性境界)를 이루고 있는


자성경계의 일원상(一圓相)을 없애야 한다 하겠습니다

2007. 06. 25 10:47







법을 보는 이 여(如)를 보고 여(如)를 보는 이 여래를 본다 / 칠통 조규일


우주 삼라만상 그 어떤 어느 형태의 형상에서든
형체와 일합상의 상을 여의고
말과 언어 이름을 여의고
공(空)을 보아야 한다

공(空)을 확연히 보고 알아서는
공(空)을 통하여 여(如)를 보아야 하고
여(如)를 통하여 반야(般若)를 보아야 하고
반야(般若)를 통하여 여래(如來)를 보아야 하며
여래를 통하여 법신(法身)을 보아야한다.

우주 삼라만상 모든 형체의 형상이
법으로 인하여 생겨났다가 없어지는지를 알아야 하고
우주 일체의 생멸법이 법 없이는 나오지 못하는지를 앎과 함께
법에서 나오는지를 알아야 하고
생멸법이니 연기법이니 인과법이니 하는 모든 법
일체법이 여(如)에서 나와서 여(如)로 사라지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물처럼 흘러가는 법(法)을 보고 알기 위해서는
여(如)를 알아야 하고
여(如)를 볼 줄 알아야 하며
진실한 이치 진리를 보고 알기 위해서도
여(如)를 알아야 하고
여(如)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여(如)를 알기 위해서는
공(空)의 허공인 시방(十方)을 알아야 하고
앞에 시방(十方)과 지금의 시방과 뒤에 따라가는 시방을 알아야 하고
앞에 지금 뒤에 따라오는 모든 시방이 같고 같은지를 알아야 하고
시방과 시방이 같고 같음으로 밀려가고 밀려오며
여(如)하고 여(如)함으로 가만히 머물러 있는 듯한 시방의 허공이
무너졌다 이루어지고 이루어졌다 무너지는지를 알고 알아
가만히 머물러 있는 듯한 허공이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지를 알아야 하고
성주괴공하며 여하고 여(如)하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물결처럼
한 파도가 이니 만파도가 밀려오듯
물처럼 흘러가는 법(法)이 생겨나고 생겨난 법이
앞에 지금 뒤의 시방과 시방이 같고 같음으로 법이 사라지는 지를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 법이 생하고 법이 멸하는 것임을 알고
모든 우주 삼라만상이 법에서 나와 법으로 소멸되는 지를 알아야 하며
일체법으로 일어난 우주 삼라만상은 여(如)로 인하여 일어난 태풍이고
태풍의 눈은 여(如)에 있는지를 알고
여(如)를 통하여 일체법과 반야(般若)를 알아야 한다.

일체법과 반야를 알아서는
일체법과 반야를 이루고 있는 여하고 여한 여래를 보고 알아야 하고
여하고 여한 여래를 보고 알아서는
여(如)에 들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야 한다. 하겠습니다.

그럼으로
우주 삼라만상이 인과와 연기로 인한 지를 알아야 하겠고
인과와 연기가 법으로 인하여 있는지를 알아야 하겠으며
법은 여로 인하여 있는지 알아야 하겠고
여는 여래의 여래장이 있음으로 있는지를 알아야 하겠다.

인과와 연기를 아는 이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이 여(如)를 보고
여(如)를 보는 이 여래를 본다 하겠으니.

여래를 보지 못하고 법신을 보지 못하는 이들은 법을 보아야 할 것이며
법을 봄으로 법이 나왔다가 사라지는 여를 보아야 할 것이며
여를 통하여 반야와 여래 법신의 부처님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 여에 들어가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야 한다.

우주 삼라만상 형태의 형상에서 공을 보지 못한다면
법과 여를 보지 못할 것이며
공을 보고 법을 보지 못한다면
여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며
법을 보고 여를 보지 못한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하겠으니

색에서 공을 보고
공에서 법을 보고
법에서 여를 보고
여에서 여래를 보고
여에 들어가 깨달음을 증득하라.

2007. 02. 01 14:19







이러함으로 이 경의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 칠통 조규일




09:38
모든 교화는 참된 것이 아니다.
말과 이름이 교화이고 일합상의 이름이 교화일 뿐
여래이신 부처님께서는 단 한 마디도 한 사실이 없고
한 마디도 한 사실도 없는데 설법한 일이 없겠는가?
설법한 일이 없는데 어찌 교화한 일이 있겠는가?
여래의 설법은 설법이 아니라 이름이 설법인 것과 같이
교화라 하나 교화 역시도 상의 이름이 교화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무량아승기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를 한다 하더라도 ...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보리심을 일으켜
이 경전을 수지하거나 내지는 사구게를 수지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앞의 복보다 클 것이다..
이러한 이유를 살펴보소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주는가?

09:41
그것은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하는 것이다.
여여부동이라고 하나 여여부동이 무엇인가?
살피고 살펴보소서.

왜냐하면 여여부동을 벗어나 있는 일체의 모든 법
즉 일체의 유의법은 꿈이나 환상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모든 교화는 참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경의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니라...()


마음을 항복 받기 위해서는



업으로 인한 인연법 및 연기법
법이라고 하는 법과 진리
일체법이 나오고 사라지는 여에 들어가야 하고
여에 들어가서는 여여부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써 마음을 항복 받게 되나니라..

......조병윤님의 2007 02 08 금강경 제32품 모든 교화는 참된 것이 아니다 사경을 읽고.....







여에는 법도 법 아님도 아닌 것이 여이다. / 칠통 조규일



08:26
여에는 법도 법 아님도 아닌 것이 여이다.



왜?
여에서 법이 나오고 여에서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로 인하여 있는 여래는
상도 상 아님도 아닌 상도 있고 없고를 떠나 있으며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얻지 않고 증득하고 증득하지 않고를 떠나 있다.


그럼으로 모든 법을 단멸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단멸한 것이기도 하여도
마음을 일으킨 자는 마음을 일으킴으로 법에 대해 단멸된 것이 아니기에
단멸상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여하고 여한 곳에 있는 여래에서 보면


여로 인하여 생멸하는 모든 법이라고 하는 일체법도
일체 모든 법으로 인하여 있는 우주 삼라만상도
끊임도 없고 멸함도 없다 하는 것이다...

여에는 법도 법 아님도 아닌 것이 여이다.



그럼으로 모든 법 일체법은 끊임도 없고 멸함도 없는 것이다


....... 조병윤님의 금강경 제27품 끊음도 없고 멸함도 없다 사경을 읽으며 ......







공불공여래장(空不空如來藏) / 칠통 조규일


 
10:22
공불공여래장(空不空如來藏)...


우리들 저마다 허공이라고 하는 허공은 허공이 아니라 이름이 허공으로
성주괴공하고 있고 성주괴공하는 허공은 허공이 있다가 무너지고 무너졌다가 있게 되어



있는 것과 무너지는 것이 마치 물결처럼 일어나 물결처럼 생겨난 것이
법이 되고 법이 되었다가 바로 서게 되며 바로 섬으로 여로 법이 사라지고



앞에 허공과 뒤에 따라 오는 허공이 같아짐으로 여(如)하게 되고
여(如)함으로 여(如)하고 여(如)하되
여에서 법이 생겨남으로 법으로 인한 법과 여로 인하여 진실한 이치가 있게 됨으로 
인연법과 연기법이 있고 우주 삼라만상이 있으되



우주 삼라만상이 마치 물결이고 파도고 포말이고 꿈이고 이슬 같은 것이
물의 표면이라고 할 수 있는 여(如)에 들어가고
여(如)에 들어감으로 반야(般若)에 들어가고
반야에 들어감으로 여래에 있게 되고
여래에 있음으로 모든 것들이 쉬게 되나니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쉬게 되는 것 곳이 여래장이니라.



여래장이라고 하나 여래장은 이름이 여래장일 뿐 여래장이 아니라 이름이 여래장이다.
이렇듯 허공은 허공이 아니라 여래장이다...



10:29
허공이라고 하는 허공의 여(如)하고 여(如)한 데서 ...
법이 일어나서 법으로 인하여 있게되는 생겨나는 지수화풍과
지수화풍이 있음으로 시방허공 즉 시방세계에 인과법이 있게 되고
연기법이 있게 됨으로 법과 진실한 이치로 모든 것들이 있고
우주 삼라만상이 있으나



이 모든 것들은 여래장이라고 하는 바다
그 바다에서 여(如)라고 하는 물의 수면 위
허공의 여(如)와 허공의 여(如)가 무너졌다가 일어서면서 즉 성주괴공하면서
바다의 수면 위에서 물결이 일고 파도가 치고 포말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성주괴공 속 법과 진실한 이치로
우주 삼라만상 수많은 것들이 인연법과 연기법으로 생겨났으나
여로 인하여 생겨난 이 모든 것은 여로 돌아옴으로 멈추게 되고
멈추어 여에 들어옴으로 여래에 들고 여래장 속에 있게 된다.



마치 업으로 인한 태풍에 속에 있다 태풍의 눈에 들어오는 것과 같고
태풍의 눈에 들어옴으로 모든 것들이 쉬게 되는 것과 같다





10:32
태풍의 눈에 들어서기 전까지
태풍 속에 있을 때는 그 어느 것 하나 태풍 아닌 것이 없으되
태풍의 눈과 태풍이 일어나고 있는 것과의 사이가 바로 여(如)라 할거고
그 여(如)를 통하여 태풍의 눈이라 할 수 있는 반야가 있고
여래가 있고 여래장이 있는 것이다.



이도 말과 글 이름이 그러할 뿐 그러함이 없으되
이를 살펴 알기 전까지는 이렇게 이끌고 올 수밖에 없음에
전할 것 없는 것을 말과 글로써 이름하여 말할 뿐이니
살피고 살펴서 확연히 알지어다



10:36
여래장(如來藏)은 여래(如來)로 있고
여래가 여(如)로 여(如)하되 여(如)한데서
법과 진실한 이치가 있게 되어
법과 진실한 이치가 있는 것으로 인하여 미세한 바람이 되고
바람은 거세져 태풍을 일으켜서 태풍이 있고 태풍의 눈이 있되
태풍의 눈이 여래고 부처고 반야이고



태풍의 눈을 벗어나 태풍이 불고 있는 태풍 속에 있으니
범부 중생으로 업으로 태풍이랄 것을 일으켜 이루고
태풍을 이루고 있는 것을 자성경계로 일원상을 이루고 저마다의 "나"라고 하되



"나"라고 하는 태풍은 본래 태풍의 눈을 성품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고 집착함으로 인하여 태풍이라고 할 수 있는 업을 끌어당겨 



업으로 인한 태풍을 자성경계로 저마다 "나"라는 일원상을 하고
범부 중생으로 법륜을 굴리되 굴릴 법륜이 있으랴



아무리 강하고 강한 태풍이라도 쉬고 나면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본래 태풍의 눈인 것과 같이
반야고 여래고 부처로다



범부 중생은 저마다 업으로 태풍을 일으키고 태풍 속에 있으나
여래를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래장에 있고
부처님 손바닥 안이로다.



여래장(如來藏)은 멀리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고 더불어 있으며
눈앞에 있는 허공에 있느니



일합상의 이름이 허공인 허공이란 공(空)에서


일합상의 이름이 공(空)이되 공(空)은 공(空)이 아니라 이름이 공(空)이니


공(空)이란 일합상에 여래와 부처 반야 여래장이 있으니
공(空)을 통하여 공(空)에서 여래를 보고 부처를 보고 반야를 보고 여래장을 보라.


   ...김경실보살님의 07.02.05 21:26 능엄경 사경 글을 읽고 일으킨 생각...  






관음법문(觀音法門)이란 어떤 법문입니까? / 칠통 조규일



법문(설법) 중에 최고의 법문이 관음법문(설법)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관음법문이란 어떤 법문이기에 법문 중 최고 최상의 법문이라 하는지요?

관음법문(觀音法門)이란 :
모든 형태의 형상 사물이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든 형태의 형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보고 듣고
보면 보는 성품 자체가 되고 들으면 듣는 성품 자체가 되어
삼라만상을 일여(一如)로 관(觀)하고는 자유자재롭게 여여(如如)하게
여법(如法)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설법(說法), 법문(法門)을 관음법문이라 합니다.



그러니 관음법문이란 여래(如來)의 여(如)가 되어 여(如) 상태에서 법문을 하면서
여(如) 상태로 이끄는 것이기에 법문 중에 최고의 법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래(如來)의 여(如) 어떤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사물의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여래(如來)라 합니다.


다가오는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보고 듣고
보면 보는 성품 자체가 되고 들으면 듣는 성품 자체가 될 때
여(如)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여(如)는 법(法)이 다하여 없어진 것이고
법이 생기지 않는 것이며 법으로부터의 원리고 법의 열반입니다.


그리고 범부 중생 성문 독각 부처의 경지 모두가 여(如)에서 비롯된 경지입니다.


이러한 여(如)는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상태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방해하는 아무 것도 없고
어디나 존재하고 부서지는 일도 없고
나뉘어지지 않는 불이(不二)이고
어떠한 때라도 여(如)가 아닌 일이 없고 항상 여(如)입니다.



여(如)에 들어감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든 법(法)과 상(相)에 들어가고
여(如)라는 존재 양상에 들어감으로 있는 그대로의 일체 법의 상에 들어가고
여(如)를 초월하여 다른 법을 설하는 것을 들어도
의심하지 않고 미혹되지 않고 시비(是非)를 말하지 않으며
여(如)는 여(如)에 의하여 작용하되 작용하면서도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법에 저절로 있는 여(如)에
일체 법은 모두 여(如)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로 어떤 분(스승)은 자신의 설법이 관음법문이라 말하고 가르치는데
말하고 가르치는 그 설법이 진정한 관음법문일까마는???
이름과 명성 명예를 쫓아 관음법문에 주(住)하여 머물러 있으니
이미 그것은 관음법문이 아니고 이름이 관음법문일 것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제자) 자신이 믿는 단체 스승의 법문이 관음법문이라 말하고
그 말만 믿고 의지 의탁하여 최고 최상의 법문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의 언어(말과 글)를 듣고 보고 진실한 관음법문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는


이름이 관음법문에 머물러 주(住)하여 관음법문이 아니면서도
관음법문인 것을 듣고 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래(如來)의 여(如)를 확연히 아니 적어도 어림짐작이라도 알아야할 것입니다.

2002. 6. 1









법과 진실한 이치로 인한 세계와 그 현상의 일합상 / 칠통 조규일



 



법과 진실한 이치로 인한 세계와 그 현상의 일합상 / 칠통 조규일





12:36
여하고 여한 곳 것에서 법과 진실한 이치가 있는 곳 것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의 세계가 생기고
생긴 하나의 세계는 있는 것을 씨앗으로 하나의 탄생이 되나니.
이렇게 탄생한 것이 탄생과 함께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이렇듯 이루어진 것이 하나의 세계이다.



15:19
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상은 하나라고 하나 하나라고 할 것이 없이
여러 가지들이 서로 어우러져 합하여져서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하나의 상은 여러 가지들이 서로 합하여져서 이루어진 상이라 하여
상이라고 할 때 하나의 상은 하나로 합하여진 상이라 하여 일합상(一合相)이라고
일합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어서



저마다 있는 티끌 수만큼 상의 수만큼 많고 많은 세계가 있는 것이다.


티끌이라 할 때 티끌은 티끌이 아니라 상의 이름이 티끌인 것이다.


모든 이름 있는 것들은 저마다 상을 가지고 저마다 세계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일합상이 이름이 세계인 것이다.



만약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즉 있다면 있는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이름이 세계로
곧 세계는 세계라고 하는 하나의 상으로 일합상의 이름이 세계인 것이고
또한 일합상은 일합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일합상인 것이다.



15:24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다 일합상이고


일합상은 이것이라고 할 것 없는 것인데...
범부 중생들은 일합상의 상이 실제로 있는지를 알고
일합상의 상을 탐내고 일합상인 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집착할 것이 없는데 상을 갖고
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상은 상이 아니라 이름이 상인 것이고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역시 세계는 하나의 상의 이름이 세계일 뿐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상(相:일합상)의 이름이 세계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 역시 세계가 아니라 이름이 세계이다.


이 모든 것들이 법과 진실한 이치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이고
이렇게 나타난 현상이 저마다 하나의 상을 가지고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일합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조병윤님의 금강경 제30품 이치와 현상의 일합상 사경을 읽고....






말과 글 이름이 그러하고 밝힌 것이 또한 이러하다. / 칠통 조규일


우주라고 하는 상(相)
그 안의 근본 바탕을 여래(如來)라 한다



우주라고 하는 상(相) 그 안이 어떠하기에 여래라고 하는가?


우주라고 하는 상(相) 안은 가만히 있는 듯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성주괴공한다.



우주가 성주괴공한다 하지만 허공이 성주괴공하고 있는 것이다.
성주괴공 하는 속에 있는 이를 여래라고 하는 것이다



즉 우주 안에 근본 바탕에 여래가 있고


그 여래를 바탕으로 여래가 변하고 변하여 형태의 형상이 생기고
생긴 형태의 형상의 수만큼 많은 세상이 있고



저마다 각기 서로 다른 세상이 있는 만큼
세상 수만큼의 부처가 있는 것이고



근본 바탕 여래를 하나의 테두리로 자성경계를 이루니
저마다의 자성경계를 나라고 하고
나라고 하는 내 안에서 작용하는 대상들을 마음이라고 하되



마음은 나라고 하는 자성경계의 테두리 안에 있는 대상들이
안팎으로 작용하는 작용을 하나의 상을 갖고
작용하는 작용의 상의 이름을 마음이라고 해서 그렇지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이름이 마음이라 하되
마음은 마음을 떠나 따로 마음이라 할 것이 없는 마음으로



저마다의 마음은 저마다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가지고
저마다 만든 세상은 저마다 부처가 있고 여래가 있으나
저마다의 부처와 여래는 근본 바탕에서의 여래와 부처
그 이름뿐만이 아니라 모두다 같은 부처이고 여래로 모두 다 알고 있고
근본 바탕인 부처와 여래로 자성경계로 이루고 있는 마음을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이라고 하나



근본 바탕에서 보면 과거 현재 미래도 없고
마음에 얻고 잃을 것 없이 본래 부처로 여래고
여래로 근본 바탕이라 하겠으니



이도 말과 글 이름이 그러할 뿐이고
되돌아보면 이를 떠나 따로 없으니
말과 글 이름이 그러하고 밝힌 것이 또한 이러하다.


2006. 12. 01 07:38







여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 칠통 조규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여(如)가 있고 ..
여가 있음으로 법이 있고
법이 있음으로 법을 경계로 법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있는 법계를 세존이시고 여래이신 부처님이 두루 교화하다.


어찌 교화했다 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고 세존이신 여래에 그 뜻과 의미가 있으니 살펴 보라.



이러한 법계에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운 보시를 한다고 한들...


이것은 인연으로 인한 복덕이고 인연으로 인한 복덕이 아주 많다고는 하겠으나


법계를 이루는 법의 경계가 무너진 부처님이고 세존이시고 여래이신
여래는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며
복덕이 없기 때문에 여래는 복덕이 많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 뜻을 확연히 알려면 여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여래인가?
살피고 살펴보소서

2007 01. 25 08:50

.....조병윤님의 금강경 19품 "법계를 두루 교화하다"를 읽으며 일으킨 생각...






여래를 알려면 여여부동(如如不動)을 알아야한다 / 칠통 조규일


부처와 여래를 알려면 여여부동(如如不動)을 알아야하고
여래를 친견하려면 여여부동을 보아야 한다



여여부동을 확연히 알고 보게 되면
여래와 부처를 친견한 것이 되니라.

여여부동(如如不動)이란
여여한 가운데 여하고 여한 곳 것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여여부동을 볼 것인가?
자! 가늠하여 보라
그리고 확연히 알고 보라

우주 삼라만상은 여(如)하고 여(如)한 여여(如如)에서
여로 인하여 법과 진실한 이치인 진리가 있게 되고
법과 진리가 있음으로 법과 진리에 의하여
인(因)과 연(緣), 연기(緣起)에 의하여
서로 얽히고 설켜 뒤섞이며 어우러져 더불어 있는 것이로되



우주 삼라만상은 인연법과 연기법에 의하여 생멸하며 있는 것이고
인연법과 연기법은 법과 진리에 의하여 생멸하고 있는 것이고
법과 진실한 이치는 여(如)로 인하여 생멸하여 있는 것이고
여(如)는 여래(如來)로 있는 것이다.

우주 자체가 성주괴공하는
허공이 무너졌다가 일어서고 일어섰다가 무너지며
무너졌다 일어서고 일어섰다가 무너지며



앞에 시방 허공과 뒤에 시방허공이 마치 물에 물결이 이는 듯
앞에 시방허공의 여(如)와 뒤에 따라오는 시방허공의 여(如)가
여로 인하여 고요한 바닷물에 물결이 일어나듯 법과 진실한 이치가 나왔으되



일어난 물결이 마치 본래 바닷물인 여로 들어감으로 바닷물이 되는 것과 같이
여로 생겨난 법과 진실한 이치가 여하고 여한 가운데 여로 들어감으로
일어났던 물결이 없어지는 것과 같이 법과 진실한 이치가 사라져



앞에 여와 뒤가 여가 같아지면서 여여(如如)가 있게 되고
이렇게 여여하게 있는 여하고 여한 곳 것에 있는
부동(不動)의 여여가 바로 여래이고 부처이니라

그럼으로 부처와 여래를 알기 위해서는
여(如)하고 여(如)한데서 법과 진리가 나온 지를 알고
나온 일체법(一體法)이 여(如)로 사라지는 지를 알아서
여(如)한 곳 것에... 여여(如如)한 곳 것에 ...



여여한 가운데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는지를 알고
이를 명확히 보고 인식하고 알아야 한다.

이는 마치 우주라고 하는 허공이라고 하는 시방허공이 시방세계가 있는 그대로
여(如)라고 하는 바닷물과 여한 바닷물이
바다 위의 수면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 인식하되
여하고 여한 여여한 즉 물과 물이 부딪쳐서 물결이라는 법과 진리가 생겨났으되
생겨난 법과 진리란 물결이 앞에 것과 뒤에 것이 같아짐으로 여가 되는 것과 같이
물결이 물이 됨으로 다시 여로 돌아가서는 여여가 되고
여여가 된 바닷물이 되었으되 바닷물이 변화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바닷물 곳 것에 있는 바닷물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과 같이



우주가 여여하게 성주괴공하는 속
여여하게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래라 하는 것이고
부처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여래와 부처를 알기 위해서는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허공 속에서 여를 알고 알되 여여한지를 알고
여한 곳 것에 여여한 곳 것에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의 여여(如如)가 있는지를 알고

허공에서 여여부동(如如不動) 확연히 보고 알아야 여래를 보고 부처를 볼 것이다 .


그럼으로 여래는 여여한 가운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것이 여래인 것이다.


이도 말과 글 이름이 그러할 뿐 여래는 여래가 아니라 이름이 여래이고
여여부동이라 하나 말과 글 상의 이름이 여여부동일 뿐이로다.

2007. 02. 08 17:31







2006. 09. 28 06:54 칠통 조규일

만만해 보여도



그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2006. 09. 29 08:18 칠통 조규일

좋은 척하면서 교묘하게 애를 먹이는 이가 제일 나쁘다.



이것은 자칭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다.


혹시 그대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지 않는지 되돌아보고
허공을 던져주어도 받고도 남을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



생각이나 의식으로 자칭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진실로 현명한 사람이 되는 날이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