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가는 길
깨달음의 과정이 어렵지 깨달음 보다 쉬운 것이 없다.
칠통漆桶 조규일
2005. 10. 11. 13:17
깨달음의 과정이 어렵지 깨달음 보다 쉬운 것이 없다. / 칠통 조규일 깨달음의 과정이 어렵지 깨달음은 밥 먹는 것보다 쉽고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쉽다. 깨달음은 지금 그대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을 여의고 즉 경계를 여의고 보고 있는 대상 자체에서 분별 망상 없이 있는 그대로에서 없는 곳 없이 두루 오롯히 있는 본성의 성품을 통하여 본성을 보는 것이다. 보고 있는 대상에서 한 번 더 눈을 뜨고 보기만 하면 된다. 그대가 본성을 보고자 본성이 무엇인지 알고자 본성을 찾고 찾아 헤매며 얻고자 하는 깨달음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본성(깨달음)은 네 주변에 있고 네 눈앞에 있으며 너와 함께 하고 있다. 그냥 보기만 하면 된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눈 뜬 봉사가 눈을 뜨고 보기만 하면 보는 그곳에 있다. 보는 순간 보는 것을 통하여 보는 대상 속에 내가 있고 보는 대상 속에 내가 있는 것이 하도 이상하여 보는 시선을 나를 향해 나를 볼 때에 내 안에서 내 밖에서 보았던 대상들이 내 안에서 보고 내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인식 의식하며 이를 체험하고 경험했을 때 이를 깨달음의 순간이라 할 것이며 이를 두고 깨달음을 얻었다할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에 웃음이 없었다면 이는 트릭이다 왜냐하면 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깨달았다 말하면서 이를 말로 설명하면서도 웃음이 없었다 하고 또는 빙그레 웃었다 한다. 어떤 이들은 깨달았다 하면서 깨달음의 순간에 자기 자신도 모르게 웃게되는 웃음의 의미를 전혀 모른다. 이들 역시도 거짓된 자다. 왜 거짓이며 트릭이라고 하는지 깨달은 자는 안다. 깨달음의 순간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주변이 떠나갈 듯 웃을 수밖에 없다. 그 누구라 해도 웃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결코 멀리 있지 않고 어렵지 않다. 깨달음의 순간을 직시하고 깨달음의 경계선상에서 눈을 뜨고 있음으로 보되 알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되니 보는 걸림이 없으니 장애가 없고 장애가 없음으로 자연스럽게 보고 듣게 되는 것이다. 이 자연스럽게 보고 듣게 되는 바라봄에 아는 앎으로 자연스럽게 보고 분별 판단하는 바라봄에 장애가 없어서 비록 생각과 의식은 본성을 바라봄에 장애를 가질지라도 보는 눈으로부터 장애가 없음으로 걸림이 없으니 안으로부터 장애가 깨지기 전까지는 보지 못하는 것이니 이 보지 못하는 것에 자연스럽게 보는 것에 장애를 주어서 보는 장애를 가지고 바라봄에 있어 장애를 제거하고 눈을 뜰 때 눈을 뜨는 것과 함께 본성을 보고 깨닫는 것이니. 깨달은 각자들은 하나 같이 말을 한다. 있는 그대로 보라고 그곳에 깨달음이 있다고... 그냥 보기만 하면 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보라 그리고 인식하고 의식하라 깨달음은 보는 순간에 있지 분별하여 생각하는데 있지 않다 보는 순간에 보는 것을 통하여 경험하고 체험하라. 바라보는 한 순간에 깨달음은 있고 한 생각 돌이켜 바라보는 그곳에 깨달음은 있나니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보는 순간에 깨달음이 있으며 깨달음은 보는데 있다. 보는 것 보다 더 쉬운 것이 있을까? 이처럼 쉬운 것이 깨달음이다 없는 곳 없이 두루해 있는 본성을 보고 확연히 알면 된다. 본성을 늘 보고도 본 지를 모르고 본성을 확연히 알지 못하고 것은 네가 보는 장애(경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는 장애란 네가 가지고 있는 업이고 식이며 아는 것이며 알고 있는 것으로 경계를 가지고 장애 속에서 본성을 보기 때문에 경계 속 장애로 본성을 보기 어려운 것이다. 본성을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꾸만 본성을 보려고 하다보니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헤맨다 헤매는 것은 경계(장애)가 있기에 경계(식 아는 것 알고 있는 것) 안에서 헤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경계를 가짐으로 안의 대상으로 밖의 대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그냥 보는데 있음에도 보지 못하는 것은 네 밖의 대상 때문이 아니라 네 안의 대상 때문이다. 즉 자기 자신이 일원상의 자성경계를 가지고 자성경계 안에 업(業: 아는 것 알고 있는 것 식)을 가지고 업으로 경계를 삼아 밖을 보기 때문에 밖의 대상들이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미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고 깨달음의 우주는 깨달음의 의식 우주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깨달음의 본성은 우주에 두루해 있다 다만 자기 자신이 경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주에 두루 소롯히 있는 본성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 그것은 밖의 경계를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밖은 본성 그대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보지 못하는 것은 안의 경계로 인하여 보지 못하는 것이니 밖의 일이 아니고 안의 일이니 밖에 경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내 안의 문제다. 내가 경계를 가지고 분별 망상을 일으키니 경계 없는 밖이 나의 분별로 분별을 일으키고 경계를 갖고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은 밖의 일이 아니라 안의 일이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원상 자성경계의 테두리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경계로 인한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다.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장애가 되고 경계가 되는 것은 업(業)이라 하나 업(業)은 식(識)이고 식(識)이라 하나 식(識)은 아는 것 알고 있는 것이고 아는 것 알고 있는 것은 너라고 하는 너를 이루고 있는 너의 무의식 잠재의식 의식이며 생각들이다. 이것들이 분별을 일으키고 망상을 일으키며 경계와 장애를 가지고 눈을 뜨고 이것들로 인하여 보게됨으로 본성을 보지 못하지만 이것들이 사라지면 이것들로 인한 경계 없고 장애 없으니 이것들로 인하여 분별 없으니 눈을 뜨고도 이것들로 가려서 보지 못했던 본성을 눈을 뜨고 있음에 이것들로부터 뜨고 있는 눈을 한번 더 눈을 뜨고 보기만 하면 보는 그곳에 본성이 있어서 본성을 보게 되고 본성을 보았으니 본성을 확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깨달음을 얻은 각자는 자꾸만 깨달음과 본성을 말하는 것이고 말함으로 보는 것에 대한 걸림 없는 것에 걸림을 주어서 장애를 갖게 하고 장애를 가짐으로 간절함이 커져서 커진 간절함으로 보는 걸림의 장애를 제거하고 본성을 보도록 하고자 함이니. 의심에 의심을 일으켜서 대분심 속 장애의 걸림을 제거하고 눈을 뜨고 있음에도 뜬눈을 한번 더 뜨고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깨달음은 보고 아는데 있으며 본성은 그냥 보기만 하면 보는 곳에 있다. 깨달음의 과정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데 있으며 이는 자기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경계에 있고 경계는 자성경계의 일원상에 있으며 자성경계의 일원상은 업에 있고 업은 식 아는 것 알고 있는 것에 있으며 아는 것 알고 있는 것은 오온에 있고 오온은 6근 6경에 있으며 6근 6경은 4대의 육신에 있으며 4대의 육신은 오롯히 있는 본성의 성품에 있다 하겠다. 2005. 5.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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