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가는 길

깨달음은...

칠통漆桶 조규일 2006. 2. 3. 12:51

깨달음은    /   칠통 조규일


"나"라고 하는 내가 없고
"나"란 경계가 없어
"나"라고 하는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
"나"로 하여금 있는 땅과 하늘이 무너져야한다.


깨달음의 순간은
내가 눈을 뜨고 있음에도 한 번 더 눈을 번뜻 뜨고
("나"라고 하는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깨짐과 함께
"나"라는 경계가 사라져서 보게 되는
늘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는데)
보는 순간 눈앞에 보여지는 모든 것 모든 곳에...
어! 저기에 내가 있네
이상한 생각에
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자기 자신을 향하여 바라보았을 때
어! 내 안에 밖의 모든 것들이 있네.

밖에 모든 것이 내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밖에 있네
안팎 없이 일체가 하나구나.
내가 그렇게도 찾고 찾았던 깨달음이 내 주변에 있고
나를 떠나 있지 않았으며 나와 함께 있었구나
나는 단 한 번도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이제껏 그것을 찾아 다녔다니...
(하는 생각과 함께 너무나 어히 없다는 생각이 스침과 함께)
아~~하하하~~~
(주변을 의식할 필요도 없이 주변이 떨어갈 듯 웃음이 나온다.)


"나"라고 하는 자성경계의 일원상인 한 방울의 물이
진리의 바다 바닷물에 떨어져
물과 진리의 바닷물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이는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물에 떨어져 물과 하나가 된 것과 같다.


간혹 질문하는 분들이 있는데...
견성이나 깨달음의 순간에 보는 자가 따로 있습니까?
견성 성불 돈오는 주객이 없는 상태라고 하는데...
주객이 없으면 보는 자도 없지 않습니까?
보는 자도 없는데 누가 봅니까? 라고 묻는 이들이 있는데...

지금 그대가 보는 것과 같이 보는 자는 분명히 있다.
지금 그대가 눈앞에서 무엇인가를 볼 때에 그대가 보는 것과 같이
그 누가 따로 있어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보는 것이다.
그대가 지금 눈앞의 사물을 보듯
견성할 때는 본성의 성품을 내가 보는 것이고
돈오 확철대오할 때는 내가 안팎이 없는지를 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직접 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스스로 자기를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는다면
해오(解悟)와 혜오(慧悟)는 보아도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아 불분명할지라도
견성(見性) 돈오(頓悟)는 보는 것이 확연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의심할 여지없이 본 것이 견성인지 돈오인지 확연히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스스로 본 사람은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은
해오는 깨달음이 아닌지를 알고 또한 해오는 혜오가 아닌지를 알고
혜오 역시 돈오의 깨달음이 아니고 견성이 아닌지를 알며
견성 역시 성불이 아니고 돈오가 아닌지를 안다.
확철대오한 사람이야말로 스스로 안팎이 없고 주객이 없는지를 보았기에
누가 인정해 주고 해 주지 않고 상관없이 스스로 분명하고 명확하다 하겠다.


그 위치에 도달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혜오 견성 성불 돈오가 같다고 말하는 것이고
안팎이 없고 주객이 따로 없어 보는 자가 없다고 말하지만
지금 그대가 눈앞에 있는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이 직접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보게 된다.

지금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경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혜오하면 혜오의 경계에서 내가 보는 것이고
견성하면 본 성품으로의 내가 본 성품을 보는 것이고
주객이 없고 안팎이 없는 내가 주객이 없고 안팎이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다.
혜오할 때는 혜오의 경계를 가지고 일체를 보는 것이고
견성을 하면 본 성품으로의 내가 본 성품을 보는 것이고
돈오를 하면 안팎이 없고 주객이 없는
오직 "나"만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 천지에....
나 홀로 있음으로 보는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어...

이렇듯 깨달음의 길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보고 내가 인식하고 경험하고 체험하며
진정한 나의 실체를 찾아가는 것이며
진정한 나의 실체를 찾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임을 확인 인식하는 것이다.


2006. 01. 15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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