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에서부터~~그 이후로
깨달음의 순간의 상태...???...주객일체...
칠통漆桶 조규일
2006. 5. 1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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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01월 18일 |
강의내용 |
깨달음의 순간의 상태..???...주객일체.../ 칠통
조규일
사실은 지금 단계에서는 우주의 행성과 지구의 생성으로 인한 습기와 화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물이 생기고 물이 생기므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식물이 생기고.. 식물이 생기므로 미생물이 생기게 된 것을 밝혀야 하고 사대(四大)가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온전하게 생하고 암수의 형태의 형상을 닮고 태어나는 것을 밝혀야 함에도 이미 이것을 다른 글들 속에서 밝힌 관계로 여기는 밝히지 않고 옮겨 놓지도 않고....다음 단계로 넘어가니. 명상 수행 담론이란 글들 속에서 위의 내용의 글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보이는 자(主)와 보는 자(客) 한 생각으로부터 ...이분법으로부터의 주객(主客)이 서로 다르게 분리되어 보이다가 깨달음의 순간 하나로 보인다. 하나로 보이는 순간이 어떠한가하면 처음 보는 내가 있다. 즉 님이 지금 이 글을 읽고 보는 것처럼 님이 있고 컴퓨터를 통하여 보이는 보여지는 것이 있다 이 둘 사이 주(主)는 컴퓨터이고 객(客)은 님이다. 일반적 우주의 실상에서 보면 만유 본성이 주(主)이고 형태의 형상, 님이 객(客)이다. 이 주객(主客) 사이가 어느 순간 주객일체(主客一體)가 되는... 객(客)이 사라지고 객(客)도 주(主)가 되는 순간을.. 주객(主客)이 없는 주(主)만 있는(存在하는)... 주(主)라 이름할 수 없는 그냥 있는 그대로 하나가 되는 상태가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다.
본성과 "나" 사이, 자기 자신과 여타 다른 형태의 형상들이 제 각각 따로따로 따로이 존재하여 있다가..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내가" 객(客)임에도 "내가" 주(主, 主體)되고 원래의 본성이 주(主)임에도 "나"의 객(客)이 되어... 이렇게 인식하여 "내가" 본성을 바라보니. 보는 자 "나는" 객(客)임에도 주(主)라하고 보이는 자 "본성"이 주(主)임에도 객(客)으로 인식하는 님에게 이렇듯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어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가 아님을 알고...." "본성이 나의 주(主, 주인)이고 내가 본성에서의 객(客)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본성에 이르고자 ...명상 수행하고 ...명상수행을 통하여...수행이 깊어질수록 본성의 주(主)에 객(客)으로 살다가 수행이 깊어져 어느 순간 번뜻 한다. 여기서 번뜻 한다는 것은 본성의 주(主), 보이는 자에서 보는 자 "나"라고 하는 객(客) 주객의 경계 테두리가 사라지는 현상을... 주객의 경계 내지는 테두리가 사라지는 순간을 언어를 빌려 말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이 순간에... 보는 자(客, 나는)는 보이는 자(主, 본성) 속에 있고 보이는 자(本姓, 주) 속에서 보는 자(客, 나는)는 보는 자(객, 나를)를 바라본다. 즉 내가 보는 바라보는 보이는 모든 것들 속에 내가 있고 보고 있는 바라보이는 보여지는 모든 것들 속의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게 된다. 온 천지 안팎 없이 내가 나를 보게된다. 나밖에 없게 된 상태에서 안팎 없는 본성의 나로부터...즉 주(主)로부터 이 몸의 나(主)로 돌아온다. 본성의 주(主)와 이 몸의 객(客)에서 주객일체(主客一體)가 되었다가 이제는 전에 본성의 객(客)이었던 의식이 이 몸(肉體)으로 되돌아오면서 이 몸을 이루었던 객(客)의 의식은 사라지고 본성의 주(主)의 의식이 이 몸에 자리하게 된다. 그럼으로 이제는 이 몸이 있는 그대로 본성의 주(主)가 된다. 주(主)가 되어 주(主) 밖을 형태의 형상들을 살피니. 내가 보는 바라보는 있는 바라보이는 보여지는 모든 것들과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본성이더라. 이러한 본성을 찾고 찾았으니. 찾고 보니. 본성 아닌 것이 없고 늘 본성에 있었으면서도 본성을 찾고 찾아 헤맸으니 얼마나 어이없는가? 그것도...수십...수백 ..수천 ...년을 찾아 헤매었으니 얼마나 어이없는가? 어리석음으로 본성을 보지 못한 스스로의 어이없음에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다. 그 어이없음이 너무도 어이없음으로 크고 광대하여 박장대소하며 웃는다. 어처구니없음이 큰 만큼 그 크기에 비래해서 웃음도 크게 웃게된다.
이 깨달음의 웃음을 어떤 이들은 웃음으로 인한 깨달음을 오인 오해하여 깨달음을 인가 내지는 자처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들의 웃음을 보면 수행 중 웃음을 웃는다. 수행 중 웃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깨달음의 웃음, 너무나도 어이없고 어처구니없어 저절로 웃은 웃게되는 어이없는 웃음, 깨달음의 웃음과는 사뭇 다르다. 깨달음의 웃음의 오인 오해의 웃음들을 살펴보면 충만함으로 가득함에 넘치는 환희와 희열로의 웃음이 있고 태양혈이 열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꽃이 피며 웃는 경우가 있고 수행 중 수행의 경지가 상승되면서 또는 어느 하나를 새롭게 인식 의식함으로의 감회에, 또는 허탈에 웃는 경우가 있고 수행 중 어느 경지에서의 인식의 의식으로 어이없어 웃는 경우가 있다. 이외 수행 중 여러 웃음이 있을 수 있지만 앞에서 깨달음의 순간의 웃음과는 차이가 있다 하겠다. 이 점 유념하여 깨달음의 순간의 상태와 웃음을 인식하여 두었다가 깨달음의 순간 스스로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때 본인은 주객일체(主客一體)를 이루고 안팎 없는 주(主)가 이 몸 안으로 주(主)하면서 안에 주(主)함으로 밖의 형태의 형상, 객들과 하나되지 못함에 형태의 형상까지 하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말했고 ...스스로 점검하는 과정에서.... (약 2년이 걸린 것으로 기억됨) 형태의 형상으로의 하나가 아니라 인식으로의 의식으로의 ..본성의 맛, 즉 본성의 물맛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를 알고 난 후부터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말하고 있다.
수행 중에 있는 ..수행 깊은 분들 중에도... 형태의 형상까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체가 하나됨으로의 깨달음이란?" 글에서 밝힌 것과 같다하겠다.
다음 장부터는 주객일체의 본성의 참견과 정견 견을 밝혀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글로는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안다. 그렇구나. 또는 그런가보다 ...하고 이해만 하고 넘어가고 앞으로 쓰여질 참견, 정견, 견으로 통하여 조금씩 알아가고 또는 스스로도 무엇인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순서적으로 보면 지금들의 글이 나중에 이루어져야 함에도 먼저 이루어지다 보니. 더 그럴 것이다. 차후에 ...좀더 밝아졌을 때 ...다시 살펴보기를 바란다.
2003.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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