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통漆桶 조규일
2006. 9. 22. 16:05
제목 |
[40회] ^수행자의 음식물 |
등록일 |
2002-01-01 |
조회수 |
36회 |
No: 821 글쓴이: 칠통 시간:
2001-07-04(수) 01:09:05 조회: 53
수행자의 음식물 / 칠통 조규일
음식물은
수행자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수행하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음식물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수행자라면 몸이 건강해야 몸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장애가 없고 올바른 생활을 해야 생활로부터 오는 마음의 장애가 없고 주변 사람들과
조화가 잘되어야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는 마음의 장애가 없고 수행자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야 마음의 장애가 없고 그러므로 해서 수행할
때 수행이 일취월장한다. 그러니. 수행자에게 있어 음식물을 논하기에 앞서 현재 자기 자신을 되돌아 봐서 이러한 것들로부터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고 장애가 있으면 장애를 제거해야 할 것이며 장애가 없다면 수행에 좀 더 빠른 결실을 보기 위해
음식물을 생각할 일이다. 물론 몸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몸의 건강 회복을 위하여... 체질 변화를 위해 체질에 맞게 생식이나
채식을 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몸의 건강을 위한 것이고 체질 변화의 필요성 없이 몸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무엇이든
몸에 좋은 몸에서 당기는 것을,.. 몸에서 필요로 하는 음식물을 섭취하며 건강 회복과 수행이 병용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 몸을 지탱시켜주는 것은 천기(天氣)의 공기와 지기(地氣)로 인한 곡(穀)기다. 천기는 호흡으로 몸에
유입되고 곡기는 음식물로 몸에 유입된다. 음식물에는 지기로 인한 곡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나는 미생물이 있고 바다에서
미생물을 먹고 나는 생선이 있는가 하면 작은 고기를 먹고 자라는 큰 고기가 있고 육지에서 나는 풀이 있고 육지에서 나무로
나는 열매가 있고 육지에서 풀만 먹고 나는 초식동물이 있는가 하면 작은 동물을 잡아먹고 나는 육식동물이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 인간에게는 음식물이 된다. 또한 이것들은 먹이 사슬에 의하여 먹고 먹히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먹고 먹히는 관계는
원인이 있어 결과를 낳는 서로의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 수행자는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고 음식물을 섭취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인연에 의한 것처럼 음식물에 있어서의 인연 역시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한 마음
자세란 맺혀진 인연은 만나 풀되 다시 인연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맺혀진 인연은 만나 풀되 다시 인연을 만들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물만 먹는다고 하더라도 물 속에 있는 수많은 미생물을 먹는
결과이니. 미생물과의 인연을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면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몸이 있어야 수행을 할 수 있으니. 죽을 수는 없고 음식물을 먹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느 것을 먹어도 인연은 맺어지고 이어진다. 이왕 맺어지는 인연이고 업이라면 악업을 짓기보다는 선업을
지을 것이며, 업도 가벼운 쪽을 선택하여 짓는 업이 그 대가를 지불하는데 있어 가벼울 것이다.
그럼 음식물을 대할 때나
먹을 때 어떤 마음 자세로 어떤 것들을 먹을 것인가? 우선 음식물을 대할 때 그 음식물이 자기에게 오기까지의 모든 인연에
감사하는 자세로 대하고 먹을 때는 이 음식물을 먹고 육체를 유지하여 일심 수행하여 삼천 대천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바다에서 나는 것은 미생물 미생물을 먹고 나는 생선 고기가 고기를 먹고 나는 것의 순서로 그 업이
무겁고 육지에서 나는 것은 풀, 나무로 나는 열매, 풀을 먹고 나는 초식동물 작은 동물을 먹고 나는 육식동물 순서로 그 업이
무거우니. 가벼운 쪽으로 먹는 것이 업의 대가를 지불하는데 있어 가벼운 만큼 먹이 사슬에 아래 것들을 먹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음식물을 먹음으로 짓는 단순한 인연법에 의한 업 악업에 관한 것이고 여기에 작용하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먹는 사람의 마음 자세이고 먹으면서 보내는 염원(念願)의 기운(氣運)으로 업을 짓되 악업이 아닌 선업을
짓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음식물을 먹어 몸의 건강을 유지하여 수행을 하면서 업을 짓되 악업이 아닌 선업을 지을
것인가? 그것은 음식물을 대하며 먹으며 또는 먹은 음식물에게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식의 기운의 염력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아주 낮은 의식 아니 자기 보다 낮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높은 의식으로 끌어올리는가 하면 천도시키는 것이다.
인연이 되어 만나 먹힘을 당하여 당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의식 보다 높은 의식으로 승화되었다던가. 아니면
천도되어 영혼의 세계 천상계에 태어났다면 어찌 이들이 나중에 인연이 되어 만났을 때 그래 너 잘 만났다 하겠는가?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할 것 아닌가? 그러므로 악업이 아닌 선업을 짓게 되는 것 아닌가? 악업도 업이고 선업도 업이다. 생각이나
관념은 깨트리기가 쉽지 않다. 이거다. 저거다. 하는 것 또한 마음의 병이다. 각 종교들을 보면 계율이 있다. 종교라고
하지 않으면서도 수행을 가르친다는 명목 아래 종교의 성격을 내포한 계율이 있는 곳도 있다. 어느 종교든 가르치는 곳이든 계율이
있다하면 "살생을 하지 마라"라는 계율은 빠지지 않고 있다. 이를 어떤 이들은 아니 그곳에 몸담고 수행하는 이들 중에는 "살생하지
마라" 하니. 이 생각과 관념에 사로잡혀 이것으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음식물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미생물이나 살아 있는 벌레들의 살생 ?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고민 아닌 고민이 되어 마음의 장애를 갖고 수행에 장애를 받는다.
어떻게 하면 장애를 받지 않고 음식물을 먹고 장애를 제거하고 수행 정진해 나갈 것인가? 그것은 자기의 생각과 관념
믿고 있는 종교의 계율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인연은 받아 드리되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인연을
받아드리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음식물이 나에게 오기까지는 수많은 인연과 인연에 의하여 나에게 온
것이니. 자연스럽게 음식물을 대하고 먹으며, 앞에서 말한 것들을 실천하되 본인 스스로 음식물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업이
가벼운 쪽을 선택하고 본인 스스로 피 흘리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누가 질문할 지 모르겠다. 처음 음식이 되기 위해
죽음을 당할 때 피 흘리는 것을 지금 내가 먹을 때 피 흘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나와 무관한가? 그리고 그것을 먹음으로
해서 또 다른 피 흘리는 것을 살생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결국 내가 먹음으로 살생하는 것이 아닌가?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인연법은 무섭다. 내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살생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왜! 그들은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어났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태어난 것이고
태어나 누군가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고 그러므로 먹고 먹히는 인연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물론 처음 살생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인연이 주어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의 살을 먹은 사람들은 다 인연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을 당하여 살로 음식을 제공하는데
인연이 없다면 본인에게까지 올까? 그런 만큼 수없이 나누어지는 살붙이에서 가장 인연 있었던 인연에게 영(靈)은 가는 것 아닌가?
이렇게 오는 것이라면 구제해 주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그리고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육체의 인연이 다하면 죽는다.
그가 육체의 인연이 다하여 죽는다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해탈할까? 아니면 천상에 태어날까? 이런 질문을 하면 쉽게
그렇다고 대답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上求菩提 下化衆生"할 일 아닌가? 특히 수행자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고 마구 먹어 살생하게 하고 제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필요악에 의하여.... 인연이 있어 만난다면 인연은 만나 풀되
또다시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다. 금생에 인연 있던 것을 피한다고 해서 다음생 어느 땐가 다시 만나지 않는다면 아니 자신이
수행하여 인과에 떨어지지 않을 자신과 확신이 있다면 피하는 것도 방법 중에 하나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피하여 될 일이 아니라면
어느 생에 또다시 만나지 않겠는가? 이왕 만나 풀어야 인연이라면 피할 이유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수행자라면. . .
... 그리고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전생에 수행을 열심히 하고 이렇게 계속해 왔다면 그것들로 인한 인연은 적을 것이니. 누가
하지 마라고 해서 하지 않고 하라고 한다고 해서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들로 인하여 마음에 장애를 갖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에서 당기지 않을 것이며 이런 것들로 인한 습관이나 습벽은 적을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 자기 자신이 수행의 지침으로 삼는
곳의 계율에 의하여 마음의 장애를 가졌던 갖지 않았던 계율을 지키며 수행 정진하고 있다면 이 계율을 지키게 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삼천 대천 세계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더욱 더 수행 정진하는 가운데 "上求菩提 下化衆生"여야 할
것이다. 수행자가 이러한 계율을 가지고 있는 수행자 집단에 몸담고 수행하고 있다면 계율을 지키는데 별 어려움이 없이 수행 정진할
수 있는 반면 일반 사회 생활을 하며 생활 속에 수행하는 수행자에게는 식생활에서 계율을 지키며 수행 정진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면 한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아니 피해를 주는가 하면 자기를 위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구 또는
강요하는 것과 같다. 생활 속에 수행자가 "살생하지 마라"라는 계율을 지키며 나로 인해 또 다른 피 흘리는 것을 살생하게 하지
않겠다고 채식만 한다면 일반인들과 똑같이 결혼하여 산다면 아니 결혼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혼자가 아닌 여럿이 어울려 산다면
음식을 준비하는 여자인 경우라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가족 모두가 이해하고 도와주면 모를까? 그리고 남자인
경우 역시 집안에서 가족이 이해하고 도와주면 그나마 좋은 환경이 되겠지만 직장 생활을 하고 사회 생활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 될까? 어찌해서 하게 되었던 생활 속의 수행자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된 것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니 만큼 자신이 하고 있는
식생활에 대하여... 그렇게 하니 이러이러한 점이 좋더라고 권하는 것은 좋으나 좋으니. 해라. 아니 해야한다. 라는 식의 강요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식생활을 한다면 자연은 어찌되겠는가?
그리고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의식이 다르고 전생에 업이 다른데 ... 어찌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점에 있어서 서술하려면 많은 시간을 필요 하는 만큼 다음 기회가 있으면 하기로 한다. 이 글을 읽는
누가 질문할 지 모르겠다. 그런 당신은 결혼은 했소? 채식을 해 봤소? 선식을 해 봤소? 그것이 수행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본인은 결혼한 사람으로 채식도 해 보았고 생식도 해 보았고 요즘 유행하는 선식도 해 보았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몸에서 당기는 대로 먹어 보기도 했고 음식은 가리지 않되 소식도 해 보았고 지금은 일정량의 두끼만을 먹는다.
그러니. 이러한 질문은 본인에게 있어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본인의 체험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으며
육식을 하며 수행할 때 수행이 어떠했고 채식을 하며 수행할 때 수행이 어떠했고 생식을 하며 수행할 때 수행이 어떠했고
선식을 하며 수행할 때 수행이 어떠했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몸에서 당기는 대로 먹으며 수행할 때 수행이 어떠했고 음식을
가리지 않되 소식하며 수행할 때 수행이 어떠했는지.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밝혀보고자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이렇다. 결혼 생활 십 수년 넘도록 본인은 내자와 다툰 적이 없다. 그리고 내자가 뭘 바라기 전에 해 주는
편이고 내자가 본인에게 또는 여러 가지 일들로 신경 쓰게 하지를 않는다. 물론 내자가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열려 있는 마음이 있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런 점에 있어서 늘 내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내자가 중요시하는 것은
본인 또한 중요시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자 역시도 본인이 중요시하는 것들에 대하여 중요시 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본인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은데 자기 자신이 본인에게 해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늘 마음 한편으로 불편해 하며 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았고 또 물어왔기에 본인은 채식과 생식, 선식을 두루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것을 하는 동안 내자는 본인에게 말로 표현은 안
했지만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은 스님하고 산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으니. 마음 고생이 없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런 면에 있어서 본인은 복 받았다고 생각하며 내자에게 늘 감사한다.
육식을 좋아하는 하는 사람은 근본 성격이 온순하다
할지라도 한 번 화가 나면 사악하고 포악해 지는가 하면 몸에 흐르는 피가 탁하고 몸에 흐르는 기운 역시도 탁하다. 그래서
수행하는 입장에서 보면 피가 탁하니 피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고 기운이 탁하니 이 또한 기(氣)의 흐름이 원활치 않아 좌선
시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견디기가 더 어렵고 몸으로 오는 고통 또한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심하고 좌선하고 일어날 때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다리 저림이 더 심하고 머리는 맑지 않아 집중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이러한 장애로부터 이기며 극복하며 더 수행
정진한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수행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채식하는 사람은 근본 성격이 온순하지 않다 하더라도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며 점차적으로 온순해져 간다. 그 마음 역시 순수해지고 순진해져 가는가 하면 몸에 흐르는 피가 맑아지고 몸에
흐르는 기운 역시도 맑아진다. 그래서 수행하는 입장에서 보면 피가 맑으니 맑은 만큼 피 순환이 잘되고 기운이 맑으니 기
흐름 역시 원활하여 좌선 시 육식하는 사람보다 견디기가 쉽고 몸으로 오는 고통 또한 덜하고 좌선하고 일어날 때 육식하는
사람 보다 더 다리 저림이 덜하고 머리는 맑고 상쾌하여 집중이 잘된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만큼 장애가 적어 이완되기가 쉽고
장애가 적은 만큼 수행이 잘되는 줄 수행이 된 듯 생각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 수행이 더 더딜 수도 있다.
단순히
육식과 채식을 하는 사람의 수행을 보면 이렇고 본인이 육식을 더불어 할 때는 어디를 가나, 오나, 식사를 해결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채식만 할 때는 어디를 가나, 오나, 식사를 해결하는데 문제가 조금씩 동반되었다. 그리고 수행할 때, 육식과
더불어 식사를 할 때는 일종의 포만감에 배가 든든하여 배에 힘이 있었고 단전에 힘도 있어. 허리를 꼿꼿이 하기가 좋은 반면
좌선에 들어갈 때는 맨 처음 앉기가 불편하여 처음부터 육체로 인한 고통은 따랐지만 고통을 이기며 고통으로 인한 장애를 극복하며
고통을 뛰어넘는 수행을 할 수 있었고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으로 식사를 할 때는 일종의 허기를 느꼈고 배에 힘이 없는 반면
단전호흡을 하는데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기가 쉬웠고 육식을 할 때 보다 더 단전에 축기하기가 좋았다. 맨 처음 좌선에 들어갈
때는 앉기가 편안한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보다는 배에 힘이 없어 허리가 굽어지는지 허리가 많이 아파 자세를 바로 하려고
하다보니 깊게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해서 더욱 의식을 집중하는데 의식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수행을 할 수 있었다.
채식을 하되 생식하는 경우 어디를 가나, 오나 식사 해결을 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채식할 때 보다 더
소식을 할 수 있었고 단전에 축기하는데도 더욱 잘되었다. 육식할 때 보다 포만감은 없었지만 배에서 생기가 감돌아 온 몸에 퍼졌다.
그래서 그랬는지. 채식할 때 보다 허기를 덜 느꼈고 다리 아픔, 다리 저림, 허리 아픔은 덜했고 좌선의 자세가 역시
흐트러지지 않아 전 보다 오랜 시간 좌선에 들 수 있었고 삼매에 들기도 좋았다.
선식을 할 때 식사 해결이 어디를
가나, 오나 너무나 간편했다. 사실 선식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종에 미숫가루다. 이것을 한끼에 2-3스푼이면 식사 끝이다.
이것과 물만 있으면 식사가 해결된다. 맨 처음 선식을 하면 허기에 배고픔에 견디기가 어렵다. 몇 개월이 지나야 그때 비로소
허기와 배고픔이 사라진다. 허기와 배고픔을 견디는 동안 식탐이 없어진다. 그리고 위가 적어지는 반면 기운이 전에 없이 온 몸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비워진 만큼 채워지는데 그것이 천지의 신령스런 기운이다. 이때 탐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비우면
비운만큼 채워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때 좌선을 하면 오랜 동안 좌선을 할 수 있어 삼매에 들기도 좋았고 머리도
맑고 상쾌했고 집중이 잘되었고 온 몸에 기운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사람 있는데서 식사하는데 이상한 눈으로 보는
시선이 있어 맨 처음은 사람을 피하여 선식의 식사를 했고 그러는 동안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선식의 식사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몸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선식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너무 소량의 식사로 몸에 충분한 것을 보충해
주어야하는 만큼 자기 체질과 체형에 맞게 선식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몸에서 당기는 대로 먹으며 수행할
때 전처럼 수행에 빠른 진척은 없었으나 늘 마음은 편안했고 타인들에게 너그러울 수 있었다. 일종에 마음에 여유가 본인도
모르게 생겼다. 그러나 피는 탁했고 기운은 선식할 때 보다 맑지 않았으나 기운은 온 몸에 넘쳐흘렀고 성격은 과격하지도 온순하지도
않았다.
음식을 가리지 않되 소식하며 수행할 때 전처럼 수행도 잘되었고 천지의 신령스런 기운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좌선 시 모든 면에 있어서도 좋았다. 수행자는 음식을 대함에 있어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 음식으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를 보존하고 수행 정진하여 만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할 때 음식이 수행에 영향을
미치지만 음식이 수행에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수행자가 수행에 임할 때나 수행할 때 어떤 마음 자세로
어떻게 수행하느냐가 문제다. 그러니. 수행자는 수행에 임할 때 마음의 장애가 없어야하고 수행할 때 일념 수행 정진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죽어서 인과에 떨어질 것을 생각해 음식을 선별하지만 그 인연법의 인과에 떨어진다는 생각보다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더욱 더 수행 정진해야할 것이며 설혹 수행 정진하였어도 인과에 떨어져 인연법에 얽매일 것이라면 인연은 만나
풀되 인연을 맺지 말고 인연을 피하여 다음 인연에 맺을 것이 아니라 수행하고 있는 금생에 인연을 만나, 악업을 선업으로 선업은
선업으로 지을 것이다.
깨달음을 향하여 가는 수행자에게 죽어서의 과보를 말하며, 인연을 피해 가게하고 주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가르침을 내리는 살아 있는 스승은 누구인가? 그 스승은 자신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제자들이 해탈 성불하거나
성도하여 그리스도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가르침으로는 해탈 성불하거나 성도하여
그리스도가 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 가르침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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