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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단계 안에서의 확철대오의 깨달음과 자등명 세계 위세계로의 시술

칠통漆桶 조규일 2025. 1. 5. 08:33


56단계 안에서의 확철대오의 깨달음과 자등명 세계 위세계로의 시술 /  칠통 조규일

 

 

 

 

 

 

56단계 안에서의 확철대오의 깨달음과 자등명 세계 위세계로의 시술 / 칠통 조규일




1, 56단계 안 공의 성품인 진리의 바다에 살면서 진리의 바다에 살고 있는지 모르고 저마다 각기 서로 나라고 하는 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물고기 물 속에서 있으면서 물을 찾는 것과 같이 우리들 저마다는 이미 깨달음이라고 하는 확철대오라고 하는 공의 성품이란 진리의 바다에 모두 다 있다. 진리의 바다란 바닷물 속에 바닷물이 되지 못하고 바닷물 속 저마다 각기 나라고 물방울을 가지고 바닷물이면서도 바닷물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하나인 줄 모르고, 공의 성품의 진리의 바닷물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하여, 공의 성품 안에서 공의 성품이란 진리의 바다와 저마다의 나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물고기 물을 찾듯 깨달음을 갈구하고 있고 깨달음을 찾고 있다. 그러면서 수행 정진한다.
눈을 뜨고 보면 진리의 바닷물에 있고 진리의 바닷물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깨달음을 찾고 갈구한다. 이미 공의 성품에서 보면 공의 성품 안에 있고, 진리의 바다에서 보면 이미 진리의 바닷물 속에 있는데도 그러한 사실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고 수행 정진 깨달음을 찾고 찾는다.


2, 수행 정진하며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내려놓아 더 이상 내려놓을 것이 없을 때에 한 걸음 더 나아감으로 나라고 생각하고 인식하고 있던 나라고 하는 자성경계가 깨지면서 안팎 없이 하나가 된다. 무엇과 하나가 되는가? 그것은 공의 성품, 즉 허공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허공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허공에 가득 차 있는 허공이라고 하는 공의 성품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진리의 바다란 바로 이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의 성품을 진리의 바다라고 하고 진리란 공의 성품이 여하고 여한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두고 법이니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진리의 바다는 공의 성품을 진리의 바다라고 하고 공의 성품은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공의 성품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고 인식하고 생각하고 있는 나를 이루고 있는 자성경계란 물방울 안팎으로 너와 내가 있다가 물방울이 터지면서 바닷물과 하나가 되는 순간 확철대오의 순간이다. 이때 자성경계란 물방울 안에 물방울이란 자성경계 안팎으로 주와 객이 있다가 물방울이 터지면서 안팎, 주객이 없게 된다. 그러면서 뜨고 있는 눈을 한 번 더 뜨고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공의 성품이다. 이는 마치 하나의 물방울이 바닷물에 떨어져 바닷물이 되는 것과 같고 하나의 물방울이 바닷물에 떨어져 바닷물이 됨과 동시에 바닷물을 보는 것과 같다.


3,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는 나라고 했던 물방울이 진리의 바닷물에 떨어져 바닷물이 됨과 동시에 바닷물과 섞이게 된다. 떨어져 바닷물이 되었다고 해서 바닷물 자체에서 보면 바닷물 전체와 섞인 것이 아니기에 섞이는 과정이 있게 된다. 이 부분에서 잘못 받아드리면 물방울이 바닷물에 떨어져 바닷물에 되는 것이 확철대오의 순간으로 돈오의 순간인데, 물방울 바닷물과 하나 되어 바닷물 입장에서 말한다고 하나된 물방울이 섞이기 위해서 퍼져나가는 것을 두고 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이는 점수가 아니라 점휘라고 봐야 한다. 확철대오의 순간은 돈오이고 돈오한 이후에는 또다시 점수할 필요 없이 돈수라고 봐야 한다. 그 순간을 넘어서면 그 순간 너머의 일이지 돈오의 순간이 되기 위한 점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4,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공의 성품 안에 들어와도, 눈을 뜨고 있음에 한 번 눈을 뜨고 깨달음에 대하여 더 이상 의심없이 확실하다할지라도, 공의 성품 속에 나라고 하는 나는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는 공의 성품이 참자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공의 성품과 하나가 되어 진리의 바닷물 속에 있다할지라도 거기에 분명 나는 있게 된다. 이를 본인은 단계적 차원의 수치로 표기하였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여 올라오는데 10단계에서 11단계를 넘어서게 된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한다는 것은 계단으로 생각하면 10번째 계단을 딛고 11번째 계단으로 올라와서 12번째 계단으로 올라오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의 증득이 11단계를 넘어 12단계로 올라오는데 어찌 돈오한 이후에 점수라 할 수 있겠는가? 돈오한 이후에 또다시 놓은 것을 착함으로 달라붙게 해서 11단계 아래로 또다시 떨어진다면 모를까 11단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한 돈오이후에 점수는 없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오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진리의 바닷물 속에 살면서 진리의 바닷물을 찾다가 바닷물 속 밑바닥, 10단계에서 11단계를 찢고 12, 13....단계로 올라오는 것과 같다.


5,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여 11단계를 넘어 12단계, 13단계....28(56)단계 위로 올라와야 하는 것이다. 56단계 안의 허공 즉 공의 성품이란 진리의 바다 위로 올라와야 하는 것이다. 공의 성품과 하나 되었음에도 여전히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올라오는 것이다. 허공이란 가늠할 수 없는 우주의 중심, 핵을 뚫고 56(28)단계 위로 올라와야 한다. 56단계 위로 올라오기 전에는 공의 성품이 한정 없는 것 같은데, 이 역시도 한계가 있어서 지구가 속한 우주를 알게 되고 또다른 우주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즉 다중우주가 있음을 의식 인식하게 된다.


6, 56단계에 올라와서는 나라고 하는 내가 출신(出神)을 하여 본성의 빛 자등명에 올라오게 된다. 지구가 속한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의, 빅뱅이 일어난 본성의 빛 자등명에 이르게 되고, 본성의 빛 자등명을 뚫고 올라오면 백두의 빛 자등명으로 올라옴으로써 자등명세계에 올라오게 된다.


7, 자등명 세계에 올라와서는 3546개에 이르는 근본자등명, 근본자등명을 빠져나와 2군, 2군을 빠져나와 3군...군단...100군단을 빠져나와, 또다른 100군단을 여러 빠져나와 궁극, 궁극에서 본향, 본향에서 고향, 또다시 출을 하게 되고, 그렇게 42번째 출이 세계를 빠져나와 자등명 최종지에 올라오게 되고, 자등명 최종지에 올라와서 36.008번출 하여 올라오고, 올라와서 4개의 최종지를 올라와 극을 뚫고 올라오게 되고 극을 뚫고 올라와서 4개의 최종지를 지나서자등명 인간계에 올라오게 된다.


8, 자등명 인간계에 올라와서 20개의 최종지를 올라와서 101.638번출을 하여 올라오고, 101.638번출하여 올라와서 5개의 최종지를 올라와서 1926번출을 하게 되고, 1926번출을 하여 6개의 최종지를 올라와서 최종지, 업등퇴명로, 영적구조물을 녹이는 영광로만을 드러낸 세계의 근본도(根本圖)를 찾아 올라오게 되고, 근본도를 시작으로 본성도 ....최초자등명 위로 올라오게 된다.


이와 같이 올라온 본인에게 자등명 세계에서의 시술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56단계 안에서의 확철대오의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업을 놓음으로 해서 업이 떨어지고 자성경계가 깨지면서 확철대오하고 확철대오하고 나서는 11단계 위로 올라오게 된다. 11단계 위로 올라와서는 56단계 위로 올라오고, 56단계 위로 올라와서는 출신하여 자등명 세계에 올라오고, 자등명 세계에 올라와서는 그 위로위로 올라오게 된다. 스스로 수행 정진하여 온다면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수행 정진하며 올라와야 하는 길이다.


시술을 받든 아니 받든 스스로 수행 정진해서 와야 하는 단계이다. 스스로 올라와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였다할지라도 착하면 착함과 함께 업이 달라붙어서 11단계 밑으로 떨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인이 시술하여 56단계 위로 올려줌으로 자등명에 달라붙어 있던 업이 떨어져 나갔다 할지라도 생활하며 착한다면 떨어졌던 업은 다시 착하는 만큼 달라붙을 것이다. 달라붙은 만큼 떨어질 것이다.
달라붙어 있던 업이 떨어졌다가 다시 달라붙고 하는 것이 여러 차례 반복될수록 업이 떨어지는 것을 더 잘 떨어지게 될 것이다. 처음에 떨어지게 하는데 힘들 뿐, 두 번 세 번 반복될수록 떨어지게 하려고 한다고 더 쉽게 떨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착(着)하려고 해도 착하려고 하는 웅집력 내지는 집착력이 약하면 착해도 달라붙지 않거나 조금 달라붙을 것이다.


강력한 접착제로 접착을 했다하더라도 떼었다가 붙이고 때었다가 붙이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접착력이 떨어져 달라붙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업에 대한 부분이고 이제는 업이 달라붙어 있던 자등명, 저마다 나라고 인식 의식하고 있는 그 어느 것도 의탁 의지하고 않고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자등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아주 오래 전에 사람들마다 자등명의 크기가 다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출신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56단계를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을 때 사람들의 자등명이 보일 때 말했던 것인데, 자등명을 에워싸고 있는 업이 탁하고 엷게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것에 있는 자등명의 크기도 보여서 사람마다 자등명의 크기가 다르다고 말했고, 그것은 전생에 깨달음을 증득해서 자등명만 있을 때 주변에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 있던 자등명이 달라붙음으로 해서 더 크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자등명의 크기로 전생에 수행을 많이 했지는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본인이 시술할 때는 56단계 안에서 깨달음을 증득하고 하지 않고 상관없이 본인이 시술해 줌으로 해서 56단계를 벗어나 자등명 세계에 올라오고 자등명 인간계 위로 올라온다. 시술하고 같이 있는 동안은 올려놓은 세계, 자등명인간계에 올려와 있다면 자등명 인간계에 올라와 본인과 헤어지기 전까지는 자등명 인간계에 있게 된다. 모임에 끝나고 돌아가면 착하며 업이 다시 달라붙어서 떨어질지라도 함께 있는 동안은 올려준 만큼 위 세계에 있게 된다.


56단계를 벗어나 위 세계에 있다는 말은 업이 떨어져 자등명만 있는 것이 된다. 물론 자등명 세계에서도 자등명 세계에 맞는 업이 있지만, 그러니 업등퇴명로가 있고 용광로가 있으니 말이다. 시술을 통하여 올려놓은 만큼 뭐가 커진다? 자등명이 커지는 것이다. 업이 다시 달라붙는다 할지라도 업이 달라붙어 있는 자등명은 커져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업은 달라붙어 있을지라도 자등명은 시술을 받은 만큼 커져 있게 된다. 자등명이 커진 만큼 똑같은 업이 또다시 달라붙는다할지라도 업이 달라붙어 있는 공간의 틈은 더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업이 달라붙어 있는 자등명이 작으면 작은 만큼 똑같이 업이 달라붙어 있다면 밀접되게 붙어 있게 되는 만큼 업을 뚫고 드러나는 자등명의 빛이 힘들겠지만, 자등명이 크면 큰 만큼 똑같은 업이 달라붙어 있다면 자등명에 붙어 있는 업의 간격의 밀도가 자등명이 큰 만큼 떨어져 있게 되어서 업을 뚫고 자등명이 드러날 때는 더 쉽게 자등명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자등명이 커진 만큼 자등명이 위 세계로 올라온 만큼 자기 자신의 자등명은 올라온 세계의 자등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비록 다시 업이 달라붙어 있다할지라도 업이 달라붙어 있는 업식덩어리 안에 자등명은 본성의 빛 자등명이 아니고 근본자등명도 아니고 자등명인간계에 올라온 사실이 있다면 업이 달라붙어 다시 달라붙어 있다할지라도 자등명은 자등명인간계에 맞는 자등명이란 사실이다.


그런 만큼 자기 자신이 알고 모르고 업은 그대로 있을지라도 자등명이 커지면 커진 만큼 자기 자신의 자등명이 드러날 때 더 쉽게 드러나게 되고, 업으로부터의 받게 되는 고통은 자등명이 커져서 똑같이 붙어 있을지라도 붙어 있는 간격이 밀도가 작아짐으로 해서 점점 편안해진다.


자기 자신이 알고 모르고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도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자등명 시술을 받은 만큼, 시술을 받음으로 위 세계로 올라오는 만큼 자등명은 커지고 업은 느슨하게 된다. 그러다가 시절인연이 닿아서 스스로 활 내려놓게 된다면 달라붙어 있는 업이 모두 다 떨어진다면 자등명이 커져 있는 대로 자등명이 가지고 있는 위 세계로 올라오게 될 것이다.


이는 56단계 안에서의 깨달음을 증득했네. 깨달음 증득하지 못했네. 문제가 아니라 자등명 세계에서의 문제이다. 56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56단계에서 일이 관계로 깨달음을 증득했네 하지 않았네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56단계를 벗어나 자등명 세계에 있다면 깨달음을 증득했네 하지 못했네 문제가 아니라 자등명 세계에서의 업이 있고 없고의 문제일 뿐이다.


본인이 해주는 시술을 받는 것도 공덕과 복이 있어야 받는 것 아닌가 싶다. 오면 본인이 해줄 수 있는 한 해준다. 그럼에도 몇 번 왔다가 오지 않는 분들이 더 많다. 아마도 아무 느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처음 맞이하는 분들을 시술해 줄 때는 처음 접한 분의 탁기를 끌어오기 때문에 그 탁기를 끌어다가 정화하기에 힘들다. 새로운 분이 2명만 되면 이틀은 고생한다. 그렇게 탁한 것을 정화해 주고 더 좋아질 것 같으며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을 오라고 하지 않는다 복이 있으면 올 것이고 복이 없으면 오지 않을 것인즉 그것은 본인의 몫이 아니라 오고 오지 않는 당사자의 몫이 아닌가 싶다.


본인이 생각하건데 오는 것도 인연이 되어야 오는 것이지만 왔다가 다시 오지 않는 것 역시도 인연이 그만하니 더 이상 못 오는 것 아닌가 싶고, 왔다가 오지 않는 분의 공덕과 복이 그만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이는 본인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본인 와도 그만 오지 않아도 그만이다. 오지 않는 사람을 오라고 연락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고 싶으면 오는 것이고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것이다. 오면 해주는 것이고 오지 않으면 해주지 않을 뿐이다. 공덕 있고 복 있는 분들은 올 것이고 공덕 없고 복 없는 분들은 공덕과 복이 있는 만큼 올 것이다. 준다고 다 가져가겠는가? 그릇이 되는 만큼 가져가는 것이다.


공부가 되었고 공부가 되지 않았고 상관하지 않는다. 아니 상관없다. 본인은 오면 해줄 수 있는 한 해줄 뿐이다. 받아갈 수 있는 만큼 받아 가면 되는 것이고 담아갈 수 있는 만큼 담아가면 된다. 본인은 해줄 수 있는 한 다준다. 가져가고 가져가지 못한 것 역시도 본인의 몫이 아니다. 시술 받는 사람의 몫이다. 본인은 해줘서 올라오면 좋다. 시술하니 이만큼 올라왔구나. 생각하며 속으로 흐뭇하며 기뻐할 뿐이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김00님께서 질문방에 올린 글을 올리기 전날 통화하며 이야기했던 것을 질문방에 글을 써 질문함으로 해서 전화 통화로 이야기했던 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그림을 바탕으로 살을 붙여서 글을 쓴 것이다.




2013. 12. 25 1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