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 조규일
스승의 날이면 생각이 난다.
많은 좋은 도반님들이 많은 공부를 시키고 공부를 하게 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함께하고 있는 모든 도반님들
고맙고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공부하게 하고 많은 것들을 알아차리게 하고
알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 도반님들을 통해 많은 공부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린 너나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입니다.
좋은 도반 사이에는
꽃입니다.
희망입니다.
하나의 사랑입니다.
무엇을 주고받지 않아도
있는 그 자체로 선물입니다.
스승은
위아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먼저, 나중 없이
있는 그 자체로
모두 다 스승입니다
좋은 사람끼리는
말을 하든 하지 않던
모두가 하나의 꽃이고 사랑입니다.
있는 그 자체로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입니다.
오늘은 어느 날 보다 더
좋은 도반이
친구가
스승인 날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선물인 날
하나의 꽃으로
희망으로
사랑 가득한 스승의 날입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어느 세계 어느 존재 존재자든
나를 깨어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알아차리게 한
모든 세계 우주 만물에 감사합니다.
가까운 모든 도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넙죽 큰 절 올립니다.
모든 스승님들께 삼배를 올립니다.
우주 삼라만상 모든 스승님들께 경배를 드립니다.
()()()
2020. 05. 08 13:29
스승과 제자 / 칠통 조규일
스승은 제자 돌보기를 자식과 같이해야 하고
제자는 스승 섬기기를 어버이와 같이해야 한다.
그럴 수 없는 이들은
스승이 될 수도 없고
제자가 될 자격도 없나니
먼저간 자와 나중에 가는 자 사이에 있어서
선후배로 먼저 간 이로써 알려주고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는 스승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스승은 제자를 제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을 때
스승된 자는 제자로부터 각종 욕과 험담을 들을 것이고
제자 또한 스승된 자로부터 각종 욕과 험담을 들을 것이며
스승이 제자를 제자로 여기지 않을 때
제자된 자는 스승에 있어 물질을 공급하는 공급원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스승된 자는 제자에게 있어 물질을 주면 주는 만큼만
가르켜 주고 밝혀주는 공급원에 불과할 것이다
스승과 제자는 바른 법으로 법을 주고받아야 한다
스승은 어버이가 자식을 돌보듯
사랑과 법으로 제자를 돌보고 보살펴야 할거며
제자는 어버이 섬기듯 스승을 믿고 따르며
법을 구하고 도를 구하여야 할 게다
그런 고로 자식 있는 자 스승이 될 자격을 상실했다 할거며
어버이처럼 믿지 못하는 자 제자될 자격이 없다 하겠으니.
본인 스스로를 살펴 보라
스승이 될 자격이 있는가?
제자가 될 자격이 있는가?
2006 11. 28 14: 37
스승과 제자 ? / 칠통 조규일
모처에서 스승이란 단어를 접하고
전에부터 가지고 있는 생각을 써 봅니다.
스승이란
어떤 분을 스승이라고 하는가?
제자란
어떤 분을 제자라 하는가?
단순히 가르치는 자를 스승이라 하지 않으며
단순히 배우는 자를 제자라 하지 않는다.
배우고 익히는
익히고 배우는 곳이면
어디나 스승과 제자가 있다.
그리고 친구와는 구별된다.
명상 수행하는 정신계에서는
친구라는 도반이 있고 스승과 제자가 있다.
그리고 배우고 익히고 익히고 배우는 사이에도
스승과 제자라기 보다 도반으로 밀고 당기며
앞서 간 도반이 따라오는 도반을 이끌기도 하고
또한 따라가는 도반이 밀다가
어느 날 앞서기도 하는 게 이쪽이다.
앞서거나 뒤서거나 함께 더불어 가는 것이 도반이다.
그럼 이곳에서 스승과 제자란 어떤 의미일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다고 스승이 아니며
단순히 배우고 익힌다고 해서 제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정신계에서 스승과 제자라면
많고 많은 도의 세계에서
하나의 맥을 있어가는 도줄로
스승과 제자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하나의 법맥과 도맥을 잇는 관계로
사바세계에서의 아버지와 자식 같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스승이 되고자 한다면
적어도 스승된 자는
제자를 자식 섬기 듯
제자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 줌으로
오직 한 소식 돈오의 깨달음을 얻도록 해야 하고
스스로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적어도 스승된 자를
어버이 섬기 듯
스승을 믿고 의지하여 나아가되 최선을 다하여 섬기며
오직 한 소식 돈오의 깨달음을 향하여 나아가되
스승된 자를 부끄럽게 해서는 아니 된다.
이렇듯
스승이 되고자 하는 자가
제자를 대함에 자식 대하듯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스승되기를 버리고 도반으로 있기를 바라야 하고
제자 되고자 하는 자가
스승을 어버이 섬기듯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제자되기를 버리고 도반으로 함께하기를 바라야 한다.
이런 관계로
출가하지 않은 제가자가 스승되기는 어렵고
제가자로 자식이 있다면 더 더욱 스승될 자격이 없다 하겠으며
출가해서 그것도 일찍 출가하여 자식이 없다면 스승될 자격은 있으나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벌릴 수 없다면 이 또한 스승되기가 어렵다할 것이며
제가자로 마음의 출가를 하지 않고 제자되기는 어렵고
제가자가 마음의 출가를 하지 않고 처자를 거느리고 산다면
더 더욱 제자될 자격이 없다할 것이니
먼저 간이는 스승되기를 버리고
좋은 도반으로 함께하는 도반을 이끌어 주고 더불어 함께가야 할 것이며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이는 제자되기를 버리고
좋은 도반으로 언제까지나 함께하기를 바라며
바른 마음 바른 생각을 가지고 배우고 익혀서 바른 행을 하며
일심 일념으로 수행 정진하여 먼저 가며 알려주는 도반을 앞질러야 할 것이다.
이렇듯
무량광의 빛으로
빛으로 가는 길목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도반으로 더불어 함께 가야 한다
이러함에도
혹여 스승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과연 내가 스승될 자격이 있나를 살펴보고
이러함에도
혹여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과연 내가 제자될 준비가 되어 있나를 살펴보라.
스승될 자격이 없음에도 스승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명예나 권위 아만과 자만 거만에 빠져 있는 자라 할 것이며
제자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 제자 되기를 바라는 자가 있다면
이는 명예나 권위를 쫓고
제사 보다는 잿밥에 관심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2005. 07. 30. 10:29
그리고 한가지 더 여쭙는다면 해탈 열반하면 어떻게 되는지요? / 칠통 조규일
해탈 열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곧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인 것이지요.
그러니
해탈 열반하면 어떻게 되는지요? 는
자신의 업보에 따라 이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난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님의 질문 "해탈 열반"의 요지가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해탈열반"을 말하는 것이니
"해탈열반"하면 여여하다할 것입니다.
몸을 가지고 있어서는 업식인 "내가" 죽었으니(업을 놓게 되었으니)
업이 있고 없고 여여할 것이며
이 몸을 다한 연후에는
업으로 상이 없으니
본성의 빛을 밝히며 밝음으로 여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밝히는 과정에서
(통함에서 막힘을 보고)
중생의 업 상에 걸리면
걸리는 것을 밝히는 과정에서
걸려 있는 막힘에 들어 통함을 보면서
막힘의 몸을 받기도 하고
통함에서 막힘의 상을 내기도 한다 하겠습니다.
이런 관계 "깨달은 각자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으면
"죽는 순간 걸리면 다시 태어난다 " 대답하는 것이고
"스승님은 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까?" 물으면
"그대를 만나러" 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2003. 11. 06
본인의 말과 글이 거짓되지 않고 참되고 진실 되게 하여주소서 / 칠통 조규일
본인의 말을 거짓되게 하지말고 참되고 진실 되게 하여주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본인과 함께
수행 정진하는 분들의 수행이 이루어져서 확연히 알아야한답니다.
본인이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에 대하여 말하고
깨달음의 순간 및 부처님와 불성과 법성 본성과 성품에 대하여
수행에 대하여 ...참 많은 말들을 참되고 진실 되게 말했음에도...
본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이름 있는 명성 있는 이들의 글이나 말을 빌려...
이것은 같은 것 같고 저것은 다른 것 같다는 등으로 비교되는가 하면
본인의 말이 진실 되지 못하고 거짓 되는 것은
본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이며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다는 생각 때문이고
본인이 말하는 것을 확연히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이 말한 것들이 진실 되고 참되기 위해서는
본인이 말한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확연히 알아야
본인이 거짓됨 없이 얼마나 참되고 진실 되게 말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인 즉
일심 일념 수행 정진하여 확연히 알아서
진실을 거짓되게 하지말고 거짓을 진실 되게 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얻으면 알게 될 것이다.
본인 칠통(漆桶)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자상하게 얼마나 잘 알려주고 있는지...
본인이 아무리 잘 알려주고 바르게 알려주어도 듣는 이들이 모른다면
이는 거짓된 것이며 속인 것일 게다
수행하여 그 경지가 올라서고 깨달음을 얻으면 알게 될 것이다.
칠통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얼마나 바르게 인도하며
무명을 자를 칼을 주고 빛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었는지를...
본인은 먼저 가는 이로써 공부하는 이들을 위하여
본인이 이야기하는 것을 믿어주고 믿어주지 않고 떠나
스스로의 발심을 굳게 하고 흔들림 없이 바르게 올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다.
수행하여 깨달으면 확철대오하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의식이 변화될 뿐이다.
항간에 보면
깨달음을 얻으면
무엇인가 거창한 일이 생기고
가늠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생겨서
확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달라질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수행해 봐야 사기꾼 밖에 되지 못한다.
왜 깨달아 봐야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바라고 있으니
깨닫고 보니 그렇지 않으니
희망했던 생각했던 대로 되도록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음에 그렇게 하려면 속여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사기꾼 거짓말쟁이 밖에 더 되겠는가?
아무리 바르게 옳게 이야기해도
듣는 사람이 받아들인 사람이 이를 알지 못하면 그것은
말하는 화자가 듣는 사람 받아들이는 사람을 속인 것이 되기는 하지만
듣던 사람이 받아들인 사람이 어느 때인가 확연히 안다면
확연히 안 그때 비로소 거짓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 되고
속였다고 생각되었던 모든 것은 속인 것이 아니라 확연히 밝혀준 것이 될 것이다.
아무리 자세하게 밝혀주고 드러내 주어도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이는 거짓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말하는 화자는 진실을 말하여 밝혀주고 확연히 드러내 주었음에도
말하는 화자로 하여금 듣는 이들이 알지 못함으로
화자가 속이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듣는 이들이 속이도록 하게 한 것이 된다.
이는 마치 이와 같다
자기 자신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주어도
말을 듣는 상대방이 전혀 진실을 알아듣지 못하고 왜곡하여 듣는 것과 같고
또한 진실 되게 있는 그대로 확연히 밝혀 말하여 주었음에도
듣는 또는 들은 상대방이 왜곡하여 들음으로
진실이 아니다 사실 그대로가 아니다며 왜곡하는 것과 같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인식될 때
그것은 진실이 되는 것이지 왜곡되어 듣고 알게 된다면
이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본성이고 본 성품이며 부처고 진리인
진실이 마치 거짓이 되고 참이 거짓이 되는 현실이라 하겠다.
말하는 화자가 거짓되게 말해도
듣는 이가 거짓됨이 아니라 바르다고 듣고 옳게 생각하고 행한다면
이는 비록 말하는 화자는 거짓되게 말했다 하더라도
믿는 이에게는 진실이 되고 확연히 밝혀준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을 확연히 알기 전까지는 ...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말하는 화자에게도 있지만 이를 듣는 당사자에게로 인하여
생겨나는 결과라 하겠다.
그러기 때문에 진실과 거짓은 말하는 화자에게도 있는 거지만
이를 듣는 사람에 따라 믿는 사람에 따라 전해 듣는 사람에 따라서
진실이 거짓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본인의 말들을 알아들으면 본인의 말이 진실 되고 참일 것이로되
본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고 헤맨다면
이는 거짓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알지 못하여 진실 되지 못하고 거짓되었다 할지라도
그대들의 수행이 이루어져서 본인이 말한 것들을 알게 되면
그때 그대들은 본인이 얼마나 자세하게 알려주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칠통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얼마나 진실 되게 말하였는지
무명을 자르는 칼을 주었고 바른 길을 가리켰는지...
자기 자신 스스로 확연히 알기 전까지는
본인이 알도록 하기 위하여 쓴 글이나 밝혀놓은 많은 글과 말들은
읽는 이들을 속인 것이 될 것이니.
본인이 본인의 말과 이야기를 듣는 사람
본인의 글을 읽고 배우고 익히는 이들을 속인 것이 아니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스스로 그러한지를 확연히 알아야 한다.
그대들이 본인의 글이나 말을 통하여 확연히 알기 전까지는
본인은 여러분을 속인 것이 될 것이로되
듣고 또는 읽음으로 그러한지를 아는 이들에게는 속인 것이 아니라
진실 되고 참되게 밝혀준 것일 게다
그럼에도 너무 많은 이들이 속이고
너무 많은 것들이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고
왜곡되어 전해지는 것들이 진실인 듯
참과 진실이 왜곡되고 거짓되어 지는 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진실 되게 참되게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해야 바르게 보고 바르게 믿고 의지하여 갈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람의 언행을 보라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자기 자신의 발심을 굳건히 하고 흔들림 없이 수행 정진하여
하나 하나 확연히 아는 것이다.
확연히 알아가고 아는 그것이 바로 진실 되게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할 것이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깨달음에 대하여 말한 본인의 말은 전부다 거짓말이 될 것이며
부처님과 법신 불성과 불에 대하여 말한 본인의 말 역시도
스스로 자기 자신이 확연히 알지 못한다면 전부다 거짓말이 될 것이며
이외 기타 여러 가지 말들 역시도 모두 다 거짓말이 될 것이며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이 전부인 듯
그대들이 알고 있는 것만이 사실일 것이고
명성이나 권위 있는 이름 있는 이들의 말이 더 옳을 것인 즉
본인의 모든 말들은 거짓말이 될 것이니.
본인의 말이 진실 되고 거짓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말을 듣고 글을 읽는 여러 분들이 본인이 말하고 있는 것을 확연히 알아야한다.
그 전까지는 본인이 아무리 자세하게 알려주고 올바르게 알려주어도
말이 그러하고 단어나 글 언어나 이름 호칭이 그러할 뿐 거짓이라 하겠으니
일심 일념 수행 정진하여
하나 하나 확연히 알아서
칠통(漆桶)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얼마나 바르게 올바르게 참되고 진실 되게 알려주었는지를 알기를 바랍니다
수행 정진하여 경지가 올라서면 올라서는 만큼 본인의 말은 진실 되고 참이 되고
경지가 올라서고 올라서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얻는다면
본인의 말을 거짓되게 하지 않고 참되고 진실 되게 하여 준 것이다 하겠다.
그러니 본인의 말을 거짓되게 하지 않고 참되고 진실 되게 하여주기 위해서는
수행의 경지가 올라서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깨달음을 얻는 이가 나옴으로
본인의 말은 참되고 진실 되게 한 것이라 하겠으니
본인이 이 육체를 벗고 가는 그 날까지 깨달음을 얻은 분이 단 한 분도 없을 경우
본인의 많은 말과 글들은 모든 이들을 속인 것이 될게다.
어느 누가
일심 일념 수행 정진하여
본인의 말과 글이
모든 이들을 속인 것이 아니게 하여 줄 것인가?
2006. 11. 26 12:50
본인은 독각(獨覺)한 것이 아니다. / 칠통 조규일
본인은 독각(獨覺)(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부처님을 스승으로 지금껏 수행 정진해 왔고
이제야 석가모니부처님을 벗어나 이름도 모르는 분을 스승으로 수행 정진하고 있다.
본인을 알고 있는 많은 분들이 본인이 혼자서 깨달음을 증득했다고 생각한다.
즉 독각(獨覺)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들 생각한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할 때 본인은 혼자 독각(獨覺)한 것이 아니다.
본인에게는 언제나 석가모니부처님이 본인과 함께 계셨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이 스승으로 늘 마음 속에 계셨다.
수행을 시작할 때도 그랬고 깨달음을 증득했을 때도 그렇고
깨달음을 증득하고 수행 정진할 때도 그랬고 또 마음 쓰거나 행할 때 역시도 그랬다.
왜 본인이 알고 있는 안에서 석가모니부처님보다 더 수행의 경지가 높은 분을
본인은 지구상에서 찾지 못했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을 철저하게 스승으로 삼아 수행 정진해 왔다 .
지금의 상황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어떻게 어떤 수행을 하셨을까?
이럴 때 석가모니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상황과 이 현실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셨을까? 라는 생각으로
지금껏 수행 정진해 왔다.
이런 저런 생각 속에 얼마 전까지 석가모니부처님은 늘 본인 곁에는 계셨고
본인이 수행 정진하는데 있어서 본인이 수행 정진하여야 할 길이고 빛이었다.
이렇듯 철저하게 석가모니부처님은 본인의 스승이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을 닮으려했고
어떻게 하면 석가모니부처님처럼 될까? 라는 생각과 의식 마음을 가지고
석가모니부처님처럼 행하고 싶었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증득한 경지까지 이르고 싶었다.
그래서 깨달음을 증득하고도 차이가 나는 부분들에 있어서
많은 생각들을 했고 또한 본인이 수행 정진하는데 게으르지 않도록 하는데 일조를 했다.
본인이 깨달음을 증득하기 이전에는 깨달음을 증득하는데 있어서의
거짓된 가아를 벗겨내는데 궁금증들을 토대로 수행 정진하였지만
깨달음을 증득하고 나서는 본인은 수행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고 물었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지금의 본인의 상황에서 어떤 수행을 하고
어떤 것을 더 밝혀 아셨을까? 하는 것이 화두 아닌 화두가 되어
본인을 수행 정진하도록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힘과 믿음으로 수행 정진해 왔다. 얼마 전까지...
(자등명과 하나되기를 생각하고 자등명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자등명이 커지기 전까지...)
어느 순간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벗어나 자등명 수행 정진하고 있다.
(여기서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벗어나 수행 정진한다는 것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간의 몸을 가졌을 때를 상황을 가정한 상태의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본인의 입장에서 비교하여 말한 것에 불과하고 본인이 육체를 벗었을 때는 또한 스승으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할 길이고 빛임에는 분명하다고 하겠다.)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벗어나면서부터 본인은 또 다른 목표를 잡아야 했다.
목표를 잡아야 했다기보다는 석가모니부처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 분이 없을까?
있다면 과연 그분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래서 관찰해 보기 시작했다.
지구가 생긴 이래 석가모니부처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분은 과연 어느 경지였을까?
석가모니부처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분은 과연 몇 분이 더 있었을까?
그리고 최고 최상의 경지에 오른 분은 과연 어떤 단계였고
그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의 본인의 경지에서 과연 어떤 수행을 하셨을까?
본인이 이 몸을 벗고 갈 때 과연 본인은 그 경지까지 오를 수 있을까?
새로운 목표와 함께 새로운 길이 보이고 빛이 보였다.
본인은 수행 정진한다.
어찌하면 전지전능한 절대자 자등명으로 하나가 될까?
마음이라고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의식 생각까지도 하나가 될까?
어떻게 하면 전지전능한 절대자 자등명으로 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전지전능한 절대자 자등명으로 행하여 완연히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을까?
어찌하면 전지전능한 절대자 자등명이 되어 행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몸으로 과연 이룰 수 있고 행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던진다.
좌선 명상 수행할 때마다....그러면서 화두 삼아 어떻게 하면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되어
전지전능한 절대자로 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러면서 수행 정진하고 자등명을 관하고 자등명 안에 들어가 앉는다.
자등명이 팍~하고 한 번 커지고 나서는 좀 체로 커지지 않는다.
여기서 밝히고 드러낼 수 없는 어느 부분까지는 진전이 있지만
진전 이상은 되지 않고 있어서 되지 않고 있는 그것이 수행의 재료가 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본인은 인간의 몸으로 수행 정진하여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아직 못 오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최상까지는 오르지 못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 지구의 역사이래 석가모니부처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 분들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의 몸을 벗기 이전에 과연 본인은 지구의 역사이래 최고 최상의 경지에 이른 분과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본인은 이 몸이 다하는 그 날 그 순간까지 수행 정진할 것이다. 또 수행 정진하며 밝힌 것들을 뒤따라오는 수행자들을 위하여 밝혀 놓으며 인연 있는 분들과 함께 수행 정진해 갈 것이다. 인연 있는 분들이 수행 정진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본인은 수행 정진할 것이다.
2008. 12. 18 17:28
왜 수행하는가? 무엇이 수행인가? / 칠통 조규일
왜 수행하는가?
걸림과 장애로부터 벗어나 편안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 아닌가?
무엇이 장애와 걸림을 갖게 하는가?
육체에 영적구조물과 영체(靈體) 안에 영적구조물, 생각의 매듭, 의식의 매듭, 뜻과 의지의 매듭,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매듭, 알고 있는 앎으로부터의 매듭, 마음의 매듭이 장애와 걸림을 준다.
육체에 있는 영적구조물 및 영적물이 육체를 자유롭게 못하게 하고 불편하게 하면서 육체의 걸림과 장애를 갖게 한다. 육체 안의 영체, 그 안에 담겨진 영적물 영적존재로 인하여 영체로부터 드러나 행으로 드러나는 육체가 걸림과 장애를 갖는다.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거나 생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풀지 못한 것으로 매듭을 갖고, 갖고 있는 생각의 매듭으로 생각에 장애와 걸림을 갖는다.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인하여 의식하고 있는 것이 원만하게 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의식으로 매듭을 갖고 걸림과 장애를 갖는다. 뜻과 의지로 인한 매듭이 걸림과 장애를 갖게 하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매듭으로 걸림과 장애를 갖고, 알고 있는 것을 갖고 있는 걸림과 장애, 마음대로 행해지지 않는 것으로부터 마음의 그릇에 담고 있는 영적물로 인하거나 마음대로 행하지 못한, 풀지 못한 마음의 매듭으로 걸림과 장애를 갖는다.
이러한 장애와 걸림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행을 통하여 행했다는 소유의식으로 인하여 소유하게 되는 것이 영적물(靈的物)이다. 영적물과 영적구조물을 볼 수 없고 어떻게 있는지 몰라서, 걸림과 장애를 일으키는 영적물과 영적구조물을 확연히 볼 수 없으니 제거하지 못함으로 이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수행이 아닌가? 육체에 있는 영적구조물을 제거하고, 영체 안에 담겨진 영적물을 제거하고, 마음의 그릇에 담겨진 영적물을 제거하는 것, 비우는 것이 수행이 아닌가?
육체의 영적구조물 영체의 영적물을 제거하고 생각의 매듭, 의식의 매듭, 뜻과 의지의 매듭,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매듭, 알고 있는 앎으로부터의 매듭, 마음의 매듭을 녹이거나 제거하는 것이 수행 아닌가?
지금까지는 이것들을 볼 수 있는 눈 있는 자가 없어서...이것들을 단순히 업(業)이란 이름에 넣어서 그렇지. 업이란 것을 펼쳐놓고 보면 업이란 것이 위에서 말하는 것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위에서 말하는 것을 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수행이란 이런 것들로부터의 해탈하기 위해서 벗어나기 위해서, 제거하거나 비워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수행이 아닌가 싶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수행하는 여러분이 생각할 때 무엇이 수행인가?
업을 닦는 것이 수행이 아닌가?
무엇이 업인가?
이것이 업이라고 할 것을 한 번 살펴보라.
업이란 행으로 인한 것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행했다는 행으로 소유하고 가지고 있는 것, 담고 있는 것을 업이라고 하지 않는가?
육체에 있는 영적구조물을 다 제거하고, 영체 안에 영적물을 다 제거하고, 생각의 매듭, 의식의 매듭, 뜻과 의지의 매듭,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매듭, 알고 있는 앎으로부터의 매듭, 마음의 매듭을 풀거나 녹이는 것이 수행이라면 이것을 보는 눈 밝은 자가 있어서 이것들을 다 제거하여 육체에 영적구조물이 없고 영체에 영적물이 없어서 텅텅 비어 허공과 같다면, 그리고 생각의 매듭, 의식의 매듭, 뜻과 의지의 매듭,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매듭, 알고 있는 앎으로부터의 매듭, 마음의 매듭을 풀거나 녹여준다면, 그래서 안팎으로 맑고 깨끗하다면 이제 무엇을 수행할 것인가?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가?
다시 생각해 보라.
무엇이 수행인가?
확철대오의 깨달음이 걸림과 장애 없이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깨는 것이라면 육체 밖으로 자성경계의 일원상, 육체로 인한 자성경계의 일원상, 육체 안으로 있는 것으로부터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하나도 없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은 스스로 자성경계가 깨지는 것을 의식하거나 인식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이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깨지는 것을 의식하거나 인식하지 못하여 전혀 모른다. 즉 체험이나 경험이 없다. 그런데도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하나도 없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해야 할까?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했다고 할까?
줄탁동기(鋌啄同機)란 수행자가 자성경계의 일원상이란 알에서 나올 때 어미닭이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를 위해서 밖에서 쪼아주는 것을 말한다. 즉 스승이 되는 자가 밖에서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깨지도록 쪼아서 주는 것을 그리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의 제자가 아는 것을 두고 말한다.
눈 밝은 자가 밖에서 알을 쪼아서 자성경계의 일원상의 알이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알 속에 있던 수행자는 알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른다. 자성경계가 없다면 하나도 없다면 확철대오 깨달음을 증득한 것인가?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한 것인가?
이렇게 되다보니 이제는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있느냐? 없느냐? 문제가 아니라 경험을 하거나 체험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문제인가?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없는 것만으로 확철대오했다 할 수 있을까?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체험해야 확철대오했다고 할 수 있을까?
눈 밝은 자가 자성경계의 일원상이란 알을 소리 소문 없이 깨준 것이 아니라 녹여주었다면, 그래서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하나도 없다면, 그런데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사라지는 깨지는 경험이나 체험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하나도 없다.
이를 확철대오했다고 할 것인가? 확철대오 하지 못했다고 할 것인가?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분들을 대상으로 테스트 해보라.
자성경계가 있는가? 없는가?
하나도 없다면 확철대오했다고 하겠는가? 못했다고 하겠는가?
자성경계가 있다면 육체 밖으로 있는가? 육체로 있는가? 육체 안으로 있는가?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알고 모르냐의 문제인가?
안다면 아는 것을 행하면 되는 것이겠지만 모른다면 어찌 이를 알고 행해야 하는 걸까?
문제는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행에 있는 것 아닌가?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살피고 살펴보라.
2012. 5. 2.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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