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가는 길

여래(如來) 8. 9. / 칠통 조규일

칠통漆桶 조규일 2025. 6. 5. 07:28
2007. 11. 01 07:39 칠통 조규일.

목수가 집을 지을 때에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꼭 필요한 것이라면 놓치지 않고
못질을 하기도 하고
쐐기를 박기도 하며 집을 짓는다.

자등명의 집은 업
업의 집은 마음
마음의 집은 경계
경계의 집은 상(相)
상의 집은 분별
분별의 집은 나이로다.





2007.11. 10 07:33 칠통 조규일.

살다보면 늘 양지일 때가 없다.
양지가 음지가 되기도 하고 음지가 양지가 되기도 한다.
그럼으로 양지라고 너무 좋아할 것도 없고 음지라고 너무 슬퍼할 것도 없다.
양지에 있다고 음지를 업신여길 일도 없고 음지에 있다고 좌절할 일도 아니다.

살다보면 언젠가는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되나니.



묵묵히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라. 그것이 최상의 길이려니.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날이 되소서...()







'여여(如如)'란 무엇입니까? / 칠통 조규일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제가 무교이기 때문에 법당이나 절에 가서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로 깨달았다(得道)고 하시는 분들의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읽으면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어 좋습니다. 그러면서도 매번 반복되는 말 여여하다 여여하게...여여(如如)라는 말을 많이 보았음에도 이 '여여(如如)'란 말에 대한 뜻을 한번도 그 어디서도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옥편에서 '如'자를 찾아보니, '~같은'이라고 나옵니다. 매번 반복되는 말인 이 '여여(如如)'란 말이 늘 궁금했었습니다. 여여(如如)란 무엇을 말하는지 뜻하는지. 칠통님께서 확연히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여(如如)란 무엇입니까?


 여여(如如)란 여(如)하고 여(如)하다는 뜻으로 "있는 그대로 (대)자유롭(게)다."란 의미로 "있는 그대로 같고 같다." "있는 그대로 항상 그렇고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그럼 무엇이 있는 그대로 같고 같으며 그렇고 그러하다는 것인가? 그것은 여(如)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이) 여(如)라 하는 것인가? (오래 전 "나와 내 안의 사람들과 깨달음에 대한 질의 응답"란 글에서 여래(如來)를 설명하면서 설명한 여(如)와 같습니다.) 그것은 일체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 불이(不二)로 동일 평등함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불이(不二)로 동일 평등함으로 같다는 것인가? 그것은 본성 진여...로 같다는 여(如)입니다.
 

저마다의 세계 속 각기 서로 다른 이름으로 다르지만 그 어느 것이든 있는 그대로 여(如)함으로 같다는 여(如)의 뜻이 하나만이 아니함으로 여(如)하고 여(如)하다 하는 뜻으로 여여(如如)라고 합니다. 즉 여여(如如)라는 말은 우주 삼라만상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대로 변함 없이 같다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란 글에서 밝힌 것과 같이 모든 사물의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즉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보고 듣고, 보면 보는 성품 자체가 되고 들으면 듣는 성품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여(如)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여(如)는 법(法)이 다하여 없어진 것이고 법이 생기지 않는 것이며 법으로부터의 원리고 법의 열반입니다. 범부 중생 성문 독각 부처의 경지 모두가 여(如)에서 비롯된 경지입니다.


여(如)는 오는 것도 아니요.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요. 어떤 상태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如)를 방해하는 아무 것도 없고, 어디나 존재하고 부서지는 일도 없고, 나뉘어지지 않는 불이(不二)이고, 어떤 때라도 여(如)가 아닌 일이 없고 항상 여(如)입니다.
 

여(如)에 들어감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든 법과 상(相)에 들어가고, 여(如)라는 존재 양상에 들어감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든 법(法)의 상(相)에 들어가고, 여(如)를 초월하여 다른 법을 설하는 것을 들어도 의심하지 않고 미혹되지 않고 시비(是非)를 말하지 않으며, 여(如)는 여(如)에 의하여 작용하되 그러면서도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습니다.


즉 모든 법에 저절로 있는 여(如)에 모든 법은 모두 여(如)에 들어갑니다. 그럼으로 이를 일러 여(如)하고 여(如)하다 하여 여여(如如)라 하는 것입니다.  2005. 03. 05 08:21 칠통 조규일
 



보라! 그대 앞에 여래가 있고 부처가 있다. 

여래(如來)란 여여(如如)한 가운데 오는 것을 여래(如來)라 한다.



우주 삼라만상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여여(如如)한 가운데 오지 않는 것이 없다. 우주 삼라만상은 여여(如如)하게 오고 간다. 우주 삼라만상이 저마다 제각각 생멸(生滅)을 하며 변하고 변하되 변하고 변하는 생멸 속 변하지 않고 여여(如如)하게 있는 것이 있고 여여하게 흘러가고 흘러오는 가운데 생멸이 있고 생멸을 따라 여여하게 오고가는 것이 있으니.


이렇듯 여여한 가운데 오는 것은 무엇인가? 보라! 무엇이 여래(如來)고 무엇이 부처(佛)인가?

 부처를 여래라 하고 여래를 부처라 한다. 여래를 보는 이 부처를 볼 것이며 부처를 보는 이 여래를 볼 것이다. 여래는 어디에 있고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여래(如來)라 하는가? 깨달은 이 부처라 하고 부처를 여래라 한다 왜! 부처를 여래라 하고 여래를 부처라 하는가?
 

자! 살펴 보라 무엇이 깨달음인가?  깨달음은 보여줄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
 

부처 역시 보여줄 수가 없고 보여줄 수가 없으니 가르쳐 줄 것이 없고 가르쳐 줄 것이 없으니 전할 것이 없고 전해 줄 것이 없으니 보여줄 수도 없다.


여래 역시도 마찬가지다. 보여줄 필요 없이 가르쳐줄 필요 없이 전해줄 필요 없이 이미 다 드러나 있다.
이미 다 드러나 있는 부처인 여래를 어찌 보는 것을 떠나 별도로 보여줄 수 있고 가르쳐 줄 수 있으며 전할 수가 있겠는가?
보기만 하면 된다. 부처를 여래를...


보라! 그대 앞에 여래가 있고 부처가 있다.  2005. 11. 26 18:21 칠통 조규일.






불(佛), 부처님 / 칠통 조규일



 가늠할 수 없고 함이 없는 우주의 텅 빈 허공의 빈 몸이 부처님의 법신(法身)이고 법신(法身)의 빈 몸 텅 빈 허공의 의식이 부처님 의식으로 그 어느 것에도 걸림 없고 장애가 없는 해탈(解脫) 열반(涅槃)의 우주적 의식이고 일체의 이름과 말과 상과 자취와 냄새가 다 끊어진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백지 같은 우주의 하늘의 허공의 본래 깨끗한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법신 부처님의 의식 부처님의 마음이 한 덩어리로 우주 전체가 한 덩어리로 성주괴공하는 가운데 여여(如如)하게 움직이는 성질(性質:성품의 근본 바탕)이 법(法)이고 진리며 우주란 하늘에서 하늘이란 허공에서 법(法)과 진리가 이루어지게 되는 법이 있게 하는 성질이 법성(法性)이고 법과 법성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허공의 하늘의 우주의 빈 허공으로 법신(法身)을 한 이가 불(佛,부처님)이고 부처님(佛)을 이루고 있는 불이 되게 하는 근본 바탕의 성품이 불성(佛性)이다.
 

이렇듯 우주의 빈 몸 자체가 있는 그대로 불(佛)이고 법신(法身)이며 법성(法性)이고 불성(佛性)이다. 불성이고 법성이고 법신인 빈 몸이 부처이니. 상(相)이 부처고 상(相)이 우주인 우주 안에 형태의 형상의 모양이나 모습으로 드러난 있는 삼라만상이 모두 다 부처님의 화신이다. 부처님의 화신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부처님의 화신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우주에 형태의 형상의 모양이나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우주 삼라만상은 저마다는 부처님 법신 안에 있지 않은 것이 없이 있는 그대로 부처님의 큰 법신 안에 있으며 부처님의 큰 법신의 몸이다
 

이러한 텅 빈 허공의 빈 몸(空身)에서 부처님의 화신으로 드러나 있는 우주에 형태의 형상의 모양이나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상(相)이 있는 바 모두 허망한 것인지 알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알고 바로 보면 곧 여래 부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러하니. 어찌 부처님을 형상으로 볼 수 있으며 음성으로 구할 수 있겠는가? 마당이 부처님은 형상으로 볼 수 없고 음성으로 구할 수 없다 하겠다. 이러함에도 만약에 형상으로 부처님을 보려하거나 찾거나 또는 음성으로 부처를 만나려 하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삿된 길을 걷고 있다 할 것이며 삿된 길을 걸어서는 수억 수 천년을 찾고 구(求)하고 구하고 찾아도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다 하겠다.


 이러한 부처님을 보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응당 일체 현상계에 있는 우주 삼라만상이 우주의 하늘의 허공의 빈 몸(空身)의 큰 법신(法身)안에 있는 삼라만상의 모든 상(相)이 있는 바 모두 허망한 것인지 알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알고 빈 몸(空身)의 큰 법신(法身)안에서 생멸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은지를 알고 우주의 하늘의 허공의 빈 몸(空身)의 큰 법신(法身)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아야 부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006. 04. 18 17:25 칠통 조규일.







여래(如來),  진여(眞如), 여래장(如來藏), 일심(一心) / 칠통 조규일




 여래(如來)라는 말을 불교사전에서 찾아보니.
 여래(如來)라는 것은 부처님네와 같은 길을 걸어서 이 세상에 내현(來現)한 사람, 또는 여실한 진리에 수순하여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이란 뜻, 한역(漢譯)에서는 이 뜻에 의하여 여래를 해석하되 여(如)로서 내생(來生)한 사람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如)로서 내생(來生)한 사람은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에서 온 사람이란 말 아닌가?
 어찌 그렇게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여(如)는 여여부동(如如不動)에서 생멸(生滅)하니
 여(如)로 내생(來生)하려면 여여부동 외에 그 어느 곳에서도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여실(如實)한 진리에 수순하여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했을 때를 살펴보면 이렇다. 법과 진리는 어디에서 생멸하는가? 여(如)에서 생멸한다. 그런데 여실한 진리에 수순하여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은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여실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여여부동에서 와야한다. 여(如)에서 여실(如實)할 수 있는가? 여(如)에서는 여실할 수가 없고 여하거나 여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디에 있는가? 불(佛)은 불성은? 여여부동(如如不動)을 불(佛)이라고 하고 불성(佛性)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여여부동에서 드러나지 않은 안의 성품을 불성이라 하고 여여부동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불(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래(如來)란 여여부동(如如不動)이란 불성(佛性), 불성을 이루고 있는 불(佛), 불(佛)이라고 하는 부처가 여실한 진리에 수순하여 여여부동에서 여(如)로 이 세상에 오신 사람이란 뜻으로, 여(如)로서 이 세상에 와서 법과 진리를 보여주기 위하여 또는 법과 진리를 펴기 위하여 내현(來現)한 사람이란 뜻이다.


자! 이제 이 말을 역으로 들어가 보자. 사람이 법과 진리를 펴는데 어디를 통하여 법과 진리를 펴는가? 여(如)를 통하여 펴는 것이다. 어떻게? 여실(如實)하게...



어디서? 여여부동에서... 어떤 이가? 부처님이... 그럼 부처님은 여여부동이다. 부처님은 어디에 있는가? 여여부동에 있는 것이다. 여여부동을 바로 부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 여여부동을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성(佛性)은 여여부동(如如不動)에 있고 부처님은 여여부동을 통하여 여실하게 여를 통하여 법과 진리를 설하는 사람이다.



법과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허공의 여(如)를 통하여 드러나고 여(如)는 여여부동을 통하여 드러난다, 바로 허공에 여(如)가 있고 여여부동(如如不動)이 있다.


부처님은 어디에 있다, 허공에 있다. 허공은 어디에 있다. 바로 그대의 눈앞에 있다.


허공을 그대는 벗어날 수도 없고 또한 허공 안에 있으며 허공과 더불어 있다. 허공을 떠나 있은 적도 없고 허공을 떠나서는 살수도 없다.


허공은 그대가 행한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허공은 우주의 다른 이름이다. 함이 없고 가늠할 수 없는 허공을 우리는 우주(宇宙)라 이름하고 있다.

 불성 불 부처님은 어디에 있다. 허공에 있고 우주에 있다. 어떻게 있다. 여여부동으로 있다, 여여부동으로 있으면서 여래장(如來藏)에서 우리들이 저마다 행하는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다. 그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알고 있다. 





여래장[如來藏]

여래장(如來藏)을 불교사전에 찾아보니.
"미계(迷界)에 있는 진여(眞如). 미계의 사물은 모두 진여에 섭수(攝受)되었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하며, 진여가 바뀌어 미계의 사물이 된 때에는 그 본성인 여래의 덕이 번뇌 망상에 덮이지 않게 되었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한다. 또한 미계의 진여는 그 덕이 숨겨져 있을지언정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고 중생이 여래의 본성과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한다."라고 나와 있다.


 미계(迷界)란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 즉 중생계를 미계(迷界)라고, 섭수(攝受)란 자비의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두둔하고 보호하는 것을 섭수라 한다. 미계(迷界)는 법과 진리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고 법과 진리는 여(如)에서 생겨난 것이며 여(如)는 여여부동(如如不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평등 보편하여 상주 불변(常住不變)한 만유일체(萬有一切)의 진성(眞性)이라 할 수 있고, 평등 보편 절대의 진리이고 진실 여상(眞實如常)이라고 할 수 있는 진여(眞如)는 무엇을 진여(眞如)라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을 다른 말로 진여(眞如)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여(眞如) 즉 참된 여(如)는 여(如)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如)가 생멸하는 여여부동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여(眞如)라고 할 때 진여(眞如)는 여여부동(如如不動)을 진여(眞如)라고 하는 것이다. 

 
 살펴보면 이렇다. 중생계에 있는, 즉 중생계라고 하는 허공, 그 허공에 있는 여여부동은 미계(迷界:중생계)의 모든 사물을 모두 진여(眞如)라고 이름하는 다른 이름의 여여부동 그 자비의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두둔하고 보호하며 섭수(攝受)됨으로 여래장이라 하고, 다시 진여라고 하는 여여부동이 바뀌어 즉 여여부동이 여가 되고 여가 법과 진리가 되고 법과 진리에 의하여 미계의 사물이 된 때에도 그 본성인 여래의 덕이 번뇌망상에 덮이지 않게 되었으므로 여래장이라 하며, 또한 중생계에 있는 진여라고 하는 여여부동은 그 덕이 숨겨져 있을지언정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고 중생이 여래의 본성과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한다고 하겠으니. 살펴 보라. 여래장(如來藏)은 무엇을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어디를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는가?


여래장(如來藏)은 불(佛) 부처 불성(佛性)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여여부동(如如不動)을 시작으로 해서 생(生)하여 있는 여(如)와 여여(如如), 여(如)에서 생(生)하여 있는 법과 진리. 법과 진리에 의하여 생(生)하여 있는 연기와 인연법 및 이치와 도리가 난무하는 중생계 전체를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래장(如來藏)은 여래(如來)가 가지고 있는 일체 중생을 두둔하고 보호하는 자비의 마음을 여래장이라 하는 것이며 여래장을 일심(一心)이라 할 것이다. 여여부동으로부터 생멸하는 모든 작용을 일컬어 일심(一心)의 작용이라 할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말했듯이 본생기(本生氣) 기생심(氣生心)이라 할 때의 심(心)을 일심(一心)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일심(一心)은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일체의 마음으로 일체가 하나로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으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우리들 저마다 마음의 본체를 일심(一心)이라 할 것이다. 일심은 우리들 저마다의 마음이 아닌 우주의 마음이 일심이고 허공의 마음을 일심이라 할 것이며 일심(一心)이 곧 여래장(如來藏)이라 할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은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청정한 일심(一心)에 의하여 생겨났으되 물들지 않은 청정한 일심(一心)을 여의지 않고 있어서 기약할 수 없는 아주 오랜 동안 휘둘리고 휘둘리더라도 일심(一心)으로 돌아간다 하겠으니. 일심(一心) 곧 마음의 의지처며 마음의 고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심은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있되 법이나 법과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여(如)나 여여(如如)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여부동(如如不動)에 있다고 하겠다. 일심의 원천은 허공에 있다. 허공에서 홀로 청정하게 있다.
 보라. 허공을 보라. 허공에 일심이 있다. 허공에 무엇이 일심(一心)인가?


대승(大乘)은 일심(一心)의 마음이고 소승(小乘)은 일심(一心)을 벗어난 마음이다.
일심(一心)에 대승(大乘)있고 소승(小乘)있다.


여래(如來)도 여의고 진여(眞如)도 여의고 여래장(如來藏)도 여의고 일심(一心)도 여의고 들어가야 자등명에 이를 수 있다. 자등명(自燈明)은 여여부동(如如不動)에서 불(佛)로 여래(如來)로 드러나고 있다.



2008. 07. 28  18:56 






허공(空)을 통하여 자각(自覺)하라. 모두 다 공(空)과 공의 성품에서의 일이다. / 칠통 조규일



나를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은 나라고 할 대상(對象)이 없는 것을 말하며, 나라고 할 대상이 없는 것을 두고 무아(無我)라 한다. 그럼으로 무아(無我)란 나라고 할 대상이 전혀 없는 허공, 즉 텅 빈 허공(空)이 된 것을 무아(無我)라 한다. 텅 빈 허공(空)에 나라고 할 대상이 있겠는가?


텅 빈 허공에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형태의 형상, 즉 모습에 따라 이름이 붙여져서는 불리어지는 이름으로 당사자는 그것이 무엇이든 나라고 할 것이다.


텅 빈 허공(空)에 상(相)이 있다면 그 상(相)이 어떤 상(相)을 하고 있든 하나의 상(相)은 하나의 모습으로 하나의 이름을 갖고, 갖은 이름은 하나의 상(相)으로 텅 빈 허공에 있되 텅 빈 허공(空)에 그 어떠한 상(相)도 없는 것을 무상(無相)이라고 한다. 상(相)이 있는 것은 상(相)으로 하나의 이름을 갖되 상(相)이 전혀 없는 무상(無相)은 텅 빈 허공(空)이다. 즉 공(空)이다.    


텅 빈 허공(空)에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 무아(無我)라 하고, 상(相)이라고 할 것이 없으니 무상(無相)이라 한다. 무아(無我)에 상(相)이 있으랴. 상(相)이 없는데(無相) 어디에 머무르랴.  머무를 곳 없으니 무주(無住)라 한다.


내가 없어 상(相)이 없고, 상이 없으니 머무르고 머무르지 않은 것(곳)이 없는 곳(것) 어디인가? 텅 빈 허공(空)에 공(空)이란 상(相) 이외의 상이 있더냐? 상(相)을 여인 것이 공(空)이고 공(空)은 허공이 공(空)이되 그 실체가 없어 텅 빈 허공이라 한다.


텅 빈 허공은 비어 있는 듯하되 비어 있지 않고 꽉 들어 차 있다. 허공(空)은 이름이 허공으로 비어 있되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꽉 들어차 있는 것이 허공의 진실된 모습이고, 이 진실된 모습을 진실허공이라고 이름한다. 허공(空)이 비어 있는 듯하지만 진실허공은 꽉 들어차 있어서 움직일 틈이 전혀 없다. 움직일 틈이 전혀 없는데 어디를 오갈 수 있으랴. 오갈 곳이 없는데 여기를 떠나 따로 있을 곳(것)이 있겠는가?


이렇듯 꽉 들어차 있어서 움직일 틈이 없는 진실허공이 움직인다. 전혀 움직일 수 없는 듯 꽉 들어찬 진실허공이 움직이니 그 움직임의 원인을 알지 못하되 움직임이 있으니. 그 움직임으로 묘유(妙有)라 이름하니. 진실허공에 묘유(妙有)가 있다는 말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이름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로 인하여 꽉 들어차 있어서 드러나 한 치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여여부동(如如不動)의 텅 빈 허공이 여여(如如)하게 성주괴공하고 성주괴공으로 흐르고 변하고 변하며 흐른다 한다. 이것이 부처님 제자나 조사 선지식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잘못 알고 있는가?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되면 누구든 말해 주기 바란다.


여기서 불(佛:부처님)은 어떤 자를 불(佛)이라 하는가?
부처(佛)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텅 빈 허공이 여여부동(如如不動) 꽉 들어차 있고 움직일 틈이 없으니 윤회(輪廻)할 것이 없다. 주체가 없되 윤회(輪廻)한다면 아마도 색(色)에서 텅 빈 허공에 꽉 들어차 있어서 움직일 틈이 없는 꽉 들어차 있는 것까지일 것이다.



그리고 법은 여여부동 속 진공묘유에 의하여 성주괴공하는 가운데 여여한데서 여를 통하여 나오는 것이고 법이 나옴으로 인하여 인연법과 연기법이 있는 것이니 이 역시도  텅 빈 허공의 공의 성품이 꽉 들어차 있는 여여부동에서 물질(色)로 드러나 있는 현상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행하여 무아(無我)가 되고 무상(無相)이 되고 머무를 것(곳) 없는지 알면 즉 텅 빈 허공이 되면 말로 텅 빈 허공이 아니라 철저하게 공(空)이 되면 더 이상의 윤회(輪廻)는 없게 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증득하여 텅 빈 허공이 되면 허공에 흩어질 뿐 아무 것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반문해 봐야 한다. 깨달음을 증득한 분들에게 있어서 깨달음을 증득하고 텅 빈 허공이 되었는데 육체와의 이별하는 순간 육체란 옷을 벗는 순간 착(着)하면 착(着)하는 업(業)에 떨어져 또 윤회하게 되는가? 착(着)하는 순간 놓았던 업(業)이 어떻게 공(空)에 달라붙는가? 이것도 진공묘유에 넣을 것인가? 이러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누차 말했듯이 자등명에 있고 자등명이 가지고 있는 본성의 속성 끌어당기는 힘에 의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착(着)하면 자석에 달라붙듯 달라붙는 것이다.


이런 앞뒤가 모순된 것에 빠져 옳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윤회를 말하고 업을 말하고 업에 의하여 윤회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업이 자기 자신 안에 어떻게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업이 그러하다하고 본성의 성품이 그러하다 할 뿐 업이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서 업이 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밝혀서 말하고 있는 것이 정(精)과 신(神)이고 영(靈)과 혼(魂)이며 업(식)덩어리이고 자등명에 관한 말들이다.


무아(無我)와 무상(無相)을 생각하며
눈앞에 있는 텅 빈 허공을 보고 생각해 보라.
공(空)을 보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무주(無住)를 생각하며 공(空)의 성품을 보고 생각해 보라.
눈앞에 있는 텅 빈 허공 그 허공에 있는 공의 성품을 보고 생각해 보라
공의 성품은 어떠한가?
텅 빈 허공에 꽉 들어차 꼼짝달싹할 수 없는 공(空)의 성품을 생각 의식해 보라
텅 빈 허공(空)과 공의 성품에서 생각해 보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위아래 사방팔방 시방이 위아래 없이 평등한 것을 생각해 보라.
거기는 어디이고 무엇인가?


우주는 가늠할 수 없는 텅 빈 허공의 옷을 이고 있고, 텅 빈 허공이란 옷을 입고 있는 우주는 텅 빈 허공 가득 꽉 들어차 있어서 오고 갈 것도 없고 오감도 없이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하지 않는 것은 텅 빈 허공 가득한 공(空)의 성품이다. 공의 성품은 본성의 성품이며 본성의 속성이다.


텅 빈 허공 가득 꽉 들어차 꼼짝달싹하지 않는 공의 성품을 이루는 테두리(울타리)는 텅 빈 허공 자체다. 텅 빈 허공에 꼼짝달싹할 수 없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을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 한다. 여여부동을 불(佛)이라 한다. 불(佛)은 무엇이 불(佛)인가? 텅 빈 허공을 보라. 텅 빈 허공에 무엇이 불(佛)이냐? 그리고 텅 빈 허공(空)을 관(觀)하고 성찰하여 생각해 보라. 불(佛)을 이루는 불성(佛性)은 무엇인가? 


텅 빈 허공에 꽉 들어차 꼼짝달싹할 틈이 없이 여여부동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불(佛) 부처다. 무엇인가? 텅 빈 허공에 꽉 들어차 있되 여여부동하게 하고 있는 성품(性品)이 불성(佛性)이다 무엇인가?


텅 빈 허공 가득 꽉 들어차 꼼짝달싹하지 않는 여여부동인 공(空)의 성품이 여여하게 변하고 움직이고 움직이며 변하니 여(如)를 통하여 법이 나온다. 즉 여여부동에서 부처님이 여여하게 법으로 드러나니 이를 이름하여 여래라 한다.


가늠할 수 없는 텅 빈 허공의 옷을 입고 있는 우주의 성품이 공의 성품이니 우주에 있는 어느 것 하나 공의 성품이 아닌 것이 없고 공의 성품이 있지 아니한 곳이 없고 우주에 있는 그 무엇이든 어느 것이나 우주란 텅 빈 허공을 벗어나 있지 않으니 있는 그대로 우주로 텅 빈 허공이고 텅 빈 허공으로 공이며 공으로 성품이다.



무엇을 불(佛)이라 하고 무엇을 불성이라고 하느냐? 살펴 보라.

자각하여 깨어남으로 아는 앎은 한 생각 돌이킴에 있지 배우고 익히는데 있지 않으며
업의 내려놓음은 배우고 익히는데 있지 않고 한 생각 돌이켜 자각하는데 있고
기운을 키워 업이 달라붙어 있는 공간을 느슨하게 함에 있다.
업의 닦음은 배우고 익히거나 자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에 있다. 


육신이란 물질(色)이 공(空)함을 깨닫고 싶으냐?
그렇다면 물질(色)이 어떤 형태의 형상을 하고 있든
모든 형태의 형상의 물질은 4대(地 水 火 風)로 이루어진지를 자각(自覺)하라.
그러면 물질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괴로움으로 벗어나 자유롭고 싶으냐?
그렇다면 오온(五蘊: 色 受 想 行 識)이 모두 다 공(空)함을 자각(自覺)하라.
그러면 모든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 도(道)를 얻을 것이다.


업식(業識)이 공(空)함을 깨닫고 싶으냐?
그렇다면 식(識)이 공(空)함을 자각(自覺)하라.


마음을 내려놓고 싶으냐?
그렇다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自覺)하라.

무아(無我)를 깨닫고 싶으냐?
그렇다면 나라고 할 대상(對象:것)이 없는 것을 자각(自覺)하라.


무상(無相)을 깨닫고 싶으냐?
그렇다면 인연법과 연기법에 의하여 하나의 상(相)이 생겨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생겨나는 것이로되 하나의 상(相)은 일합상으로 형태의 형상이 그러하고 이름이 그러할 뿐 그 실체가 없음을 자각(自覺)하라.


무주(無住)를 깨닫고 싶으냐?
그렇다면 텅 빈 듯한 허공이 잠시도 멈춰있는 일 없이 변하고 흐르고 흐르며 변하는지를 자각(自覺)하라.


오고감 없이 언제나 그 자리인지를 깨닫고 싶으냐?
그렇다면 텅 빈 허공인 듯한 우주 전체가 빈틈없이 꽉 들어차 꼼짝달싹할 수 없음을 자각(自覺)하라. 


부처(佛)를 알고 싶으냐?
그렇다면 모든 상(相)을 여의고 우주 전체를 하나로 보고 자각(自覺)하라.
그러면 거기에 부처가 있을 것이다.


불성(佛性)을 알고 싶으냐?
그렇다면 우주 전체를 하나로 보되
우주 전체가 하나로 있도록 하는 성품을 자각(自覺)하라.
그러면 거기서 불성을 볼 것이다. 



2009. 01. 07 18:33






몸이 없는 몸을 만들어 중음이면서도 중음이 아닌 존재를 만든다는 뜻은 무엇인지요? / 칠통 조규일


 
 여기서 몸은 형태의 형상의 모습을 한 몸과 형태의 형상을 갖지 아니한 몸을 말하는 것으로



유상(有相)에서 무상(無相)으로 형태의 형상의 모습에서 형태의 형상의 모습을 벗고 일반적으로는 업으로 인한 업덩어리 영혼 즉 중음신이 되거나 업덩어리로 업에 따라 영혼의 세계에 가게 되는데


수행을 통하여 몸을 가지고 있되 몸에 걸림이나 장애를 갖지 않도록 해서 몸이 없는 몸을 만들고 중음이면서도 중음이 아닌 즉 업을 내려놓음으로 자등명만이 텅 빈 허공에 있게 됨으로 해서 몸을 가지고 중음이면서도 자등명으로만 존재해 있게되는 존재를 만든다.


즉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되 몸이 없는 몸을 만들고 몸이 없는 몸을 만들어서는 중음이면서도 중음이 아닌 존재 자등명만이 텅 빈 허공에 덩그러이 있게 하도록 하여 존재의 근원이고 본성인 존재 자등명만이 있게 한다는 뜻이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2008. 01. 02 14:13






불(佛)이 법과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자등명(自燈明)때문이다. / 칠통 조규일




스스로 밝은 빛을 드러내는 자등명(自燈明)은 어떤 존재인가? 그 어느 것에도 의지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자로 절대자(絶對者)라 이름할 것이다.


자등명이 없는 허공은 움직이지 않고 부동(不動)이다. 허공에 자등명이 있기 때문에 부동(不動)인 허공이 자등명으로 인하여 여여(如如)하게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것이다.

불성(佛性)이 불(佛)이 되어 여래(如來)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은 불성(佛性)에 자등명이 있기 때문이다. 불성(佛性)에 자등명(自燈明)이 없다면 불성(佛性)은 불(佛)이 될 수도 부처가 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불(佛)이라고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부동(不動)일 것이로되.



불성(佛性)에 절대자라고 할 수 있는 자등명(自燈明)이 있어서 불성(佛性)이 자등명이란 절대자의 움직임을 통하여 불(佛)이 드러나고 드러나는 불(佛)을 통하여 법과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불성이 있는 것만으로는 불이나 부처가 드러날 수 없으며 또한 여래(如來)라고 하는 이름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부동(不動)이 어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의 생명(生命)을 가지겠는가?



불성(佛性)이 생명을 가지는 것은 바로 자등명이 불성에 있기 때문이다,


불성(佛性)에 자등명이 있기 때문에 자등명(自燈明)으로 인하여 불성(佛性)이 생명을 갖고 불성이 생명을 갖음으로 불성(佛性)을 통하여 불(佛)이 있는 것이고 불(佛)이 있음으로 불(佛)을 통하여 법과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듯 법과 진리는 불성(佛性)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등명(自燈明)이 있음으로 자등명(自燈明)을 통하여 불성(佛性)이라고 할 수 있는 여여부동(如如不動)을 통하여 여(如)가 드러나고 여(如)가 드러남과 함께 불(佛)이 드러나고 여(如)가 드러남으로 해서 불(佛)을 통하여 법과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불(佛)의 근본 성품은 불성(佛性)에 있지만 법과 진리가 되는 근본 성품이라고 할 수 있는 법성(法性)은 불(佛)이나 불성(佛性)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등명(自燈明)에 있고 자등명으로 인하여 불성(佛性)이 불(佛)로서 법과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니.



법과 진리는 불(佛)과 불성(佛性)으로 드러나되 법성(法性)은 불성(佛性)이 아니라 자등명을 법성(法性)이라할 것이다.
  

불성(佛性)에 절대자(絶對者)라고 할 수 있는 자등명(自燈明)이 없다면 불성(佛性)은 여여부동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움직여 드러날 수 없으니.


여여부동(如如不動)으로 있을 뿐 여(如)를 통하여 법과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 법과 진리를 드러낼 수 없는 여여부동인 불성을 법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불성(佛性)과 법성(法性)은 다르다.

우리들 저마다 여래(如來)나 불(佛)이 될 수는 있어도 자등명(自燈明)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자등명 자체가 될 수 없으니 우리들은 즉 인간은 절대자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들 저마다 본 성품에는 자등명이 있으니. 우리들 저마다의 속에는 절대자라고 할 수 있는 본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어찌하여 본래 성불의 자리를 벗어나 본래 무명의 자리에 들어서 무명에 덮여 육도 윤회하는 것인가?



그것은 본성에 탁하고 검은 암흑물질이 있어서 그리되지 않았나 싶다. 그것은 최초 밝다 어둡다하는 한 생각 분별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럼으로 대 폭발의 빅뱅이 일어나 본래 성불에서 본래 무명의 자리에 있게 됨을 시발점으로 무명에 덮이고 덮여 육도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할 것이다.

밝디 밝은 최초의 빛 무량광 무량수에 밝지 아니한 탁하고 검은 암흑물질이 있어서 또는 본성의 속성이 스스로 주변의 것들을 끌어당기는 힘에 의하여 뭉쳐지고 뭉쳐져서는 더 이상 뭉쳐질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함으로 대 폭발의 빅뱅이 있음으로 만유본성(萬有本性)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빛 무량광 무량수인 본성에서 본성의 속성이 드러남으로 인하여 허공이 생겨났으니.



스스로 끌어당기는 힘으로 인한 폭발이 아닌 최초의 한 생각 밝다 어둡다 분별하도록 하는 밝지 아니한 탁하고 검은 암흑물질이 없었다면 폭발이 일어났을까?


밝디 밝은 가운데 밝지 아니한 탁하고 검은 암흑의 물질이 본성에 있었기에 그것으로 인하여 최초 한 생각 분별이 생겨 본성에서 본성의 속성이 드러나도록 한 대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탁하고 검은 암흑물질도 본성에서 보면 본성이지만 본성이 아닌 탁하고 검은 암흑물질에서 보면 탁하고 검은 암흑물질은 본성이 아니니.


본래 무명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하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본성의 속성인 허공이 드러나도록 한 것은 밝디 밝은 최초의 빛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밝디 밝은 최초의 빛에서 밝지 아니하게 보여지도록 한 것에 있다 하겠으니.


최초의 빛 밝디 밝은 밝음에서 밝지 아니한 탁하고 검은 암흑의 물질이 최초 허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08. 07. 30  18:57







불성광명[佛性光明] - 청화 스님 [無住淸華]의 법문을 읽고 일어난 생각 / 칠통 조규일




어떤 스님이 불성(佛性)을 광명(光明)이라고 하되 불성은 광명이고 할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 자신 안에서 볼 때 불성이 광명으로 보이고 그렇게 생각되겠지만, 이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등명이란 빛을 보지 못한데서 그 주변에 있는 불성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불성이란 것이 광명인 것처럼 보이고 생각되어질 뿐, 자기 자신 밖에서 불성을 보면 불성은 이름이 불성일 뿐 불성은 불성이 아니고 또한 광명(光明)도 아니다.

가늠할 수 없는 텅 빈 허공 우주에 있는 불성(佛性)은 있지 아니한 곳 없이 다 있고, 없는 곳 없이 다 있으며 우주에 있는 삼라만상 그 어느 것이든 스며있지 아니한 곳(것) 없이 스며 있다.

이렇듯 불성이 텅 빈 허공 가득 두루 해 꽉 차 있는데 이러한 불성이 광명이라면 우주는 있는 그대로 광명으로 빛이어야 하고 텅 빈 허공 역시도 광명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가? 우주가 광명인가? 텅 빈 허공이 광명인가? 빛인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 불성을 광명이라고 하는가? 이는 불성을 모르는 이들이나 찾는 이들에게 그렇게 말할 뿐이고 말이 그러할 뿐 불성은 불성이 아니라 이름이 불성이다.

불성(佛性)이란 이름은 하나의 상(相)을 갖고 하나 상(相)은 일합상(一合相)으로 이루어졌으되 상(相)은 상이 그러할 뿐이다.



불성이란 하나의 상(相)의 이름을 다른 쪽으로 보고 이름한 것을 찾아본다면 우주라고 하는 하나의 상(相) 그 우주란 상 안에 있는 성품의 속성으로 우주를 이룬 성품의 속성이라 할 것이며, 또는 우주란 상(相) 안에 있는 성품의 속성이니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을 이루고 있는 만큼 우주 만물의 본성이라 할 것이며, 우주란 가늠할 수 없는 텅 빈 허공을 우주라 하니 우주 안에 있는 성품의 속성은 공(空)을 이루는 성품의 속성이라 할 것이며, 텅 빈 허공은 텅 빈 것이 아니라 가득 차 있고 가득 차 있는 것을 기(氣)라 하니. 불성은 텅 빈 허공의 공의 성품을 불성이라 하고 공에 있는 성품의 속성을 불성이라 하며 허공 가득한 기(氣)를 불성이라고 이름하고 있는 것이다.

기(氣)가 광명이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텅 빈 허공에 성품의 속성이 광명이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주 만물의 본성이 광명이라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이제 다시 돌아와 말씀하신 대로 불성광명이라 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되는가?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여래(如來)자리, 또는 부처님자리, 이 자리는 하나의 빛입니다. 그 빛은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청정광명(淸淨光明)입니다

진여불성의 자리 즉 진여(眞如)는 진실허공이 진여(眞如)고 진실허공이 불성이다란 말로 불성은 진실허공 즉 공의 성품이 불성이란 말이다. 이 단어 자체로 보면.


그리고 여래(如來)자리 여래의 설명에 있어서는 좀 다르지만 여래의 자리란 여여하게 법으로 오는 자가 있는 자리 어떤 자리이겠는가?



법이 생멸하는 것은 여(如)이다. 그렇다면 법으로 오는 자는 또는 여여하게 오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 자리는 여의 자리이고 여여의 자리이다.


그렇다면 여하고 여여한 자리는 어디인가? 바로 공의 자리이고 진실허공의 자리이며 공의 성품의 자리이다.


텅 빈 허공의 자리, 공의 성품의 자리, 진실허공, 공에 성품의 속성을 의인화해서 이를 자(者)라 하는 것이고 의인화된 자는 전체를 하나의 몸으로 하고 있는 자(者)를 이름하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부처라고 하고 앞에서 말한 것을 의인화해서 부처라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부처님의 자리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본인이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자리는 하나의 빛이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빛인가? 빛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빛이라 하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 체험하지 못한 들은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의 빛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 하나의 빛이라고 할 때 빛은 자등명이란 빛이어야 한다. 자등명이란 빛을 두고 말했다면 위와 같이 말한다면 맞는 말이라 할 수 있을까?


부처님 자리를 하나의 빛이라 말하고 있다. 부처님 자리는 빛이 아니다. 부처님 자리는 청정하게 광명이 아니다.
자등명이란 빛은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청정광명(淸淨光明)이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등명이란 빛에 대하여 모르면서도 마치 자등명이란 빛에 대하여 아는 것처럼 그런데 그것이 어긋났다.
이는 자등명이란 빛을 강조해야 하면서 부처님을 말하고 또 부처님을 말하며 불성을 말해야 함에 스스로의 확연함이 아니라 맞춘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이것을 듣고 또 알음알이로 가는 것이다.


하나의 빛 부처님 자리 진여불성의 자리를 향하여...눈앞에 두고 시방에 두고 매일 눈만 뜨고 보고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모른 채 찾아가는 것이다.


위와 같이 어렵게 말하니 더 어렵게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기야 텅 빈 허공이 그러하고 텅 빈 허공에 불성이 있고 부처님이 있다고 해도 모르니 이래 모르나 저래 모르나 같은 것인가? 그래도 신비한 것을 텅 빈 허공에 공의 성품을 두고 말하는 것이고 모두 다 공에서의 일이다 보다는 훨씬 신비롭다.


* 향기함에 올라온 ...불성광명[佛性光明] - 청화 스님 [無住淸華]...의 법문을 대충 읽고 일어난 생각을 적어봅니다...어제 얼핏 읽고 글을 쓸까하다가....읽는 분들을 생각해서 ..오늘 아침에 글을 써 올립니다...한 번 생각해 보시며 진여불성 불성 부처님의 자리를 알기를 바랍니다...청화스님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얼핏 읽고 일어난 생각을 적어볼 뿐입니다.


2009. 01. 22  08 :56
오래 전 여느 선원장님의 글을 올려 서로 다른 생각되는 부분을 올렸더니. 그때부터 그 분은 글을 올리지 않던데...글을 올리지 마라는 것인지 그냥 글을 올려도 되는 것인지 고민된다며 물으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글을 올리지 않아서 ...향기함에 올라온 다른 스님들의 글에 대하여 말을 삼가해 왔는데....왜 그런지 어제는 읽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나서 쓸 뿐이니...읽는 분들은 읽는 분들 대로 유익하다고 할 것이니. 이 점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텅 빈 허공의 부동(不動)함이란 상(相)의 이름이 부처佛)다.  / 칠통 조규일
 


텅 빈 허공의 부동(不動)함이란 상(相)의 이름이 부처佛)다.


그러므로 벌거숭이 부처의 몸은 텅 빈 허공의 부동함이 부처의 몸이고
텅 빈 허공의 부동함이란 상(相)을 하고 있는 부처가 입은 옷을 보니
여여부동(如如不動)함이란 상(相)이 여여(如如)로 덮혀 있고
여여로 덮혀 있는 것(곳)에 여(如)로 생멸하는 법(法)이 여여(如如)에 있으니
여여부동함은 여여한 법의 옷을 입었더라.



텅 빈 허공의 부동함이 입은 옷을 보고 법(法)의 옷을 입었음으로
부처의 몸은 법의 옷을 입은 몸이 부처니
법신(法身)이 부처의 몸이로다.



법신의 몸을 하고 있는 부처의 몸은 텅 빈 허공의 부동(不動)함이니
그 부동함은 삼처 대천 세계 그 어느 것으로도 파괴할 수 없이 견고하여
수 억겁에도 파괴되지 않고 견고한 두려움 없는 몸이고
그 어느 것도 혼합되어 섞이지 않은 맑고 깨끗한 순수한 몸으로
범부 중생의 몸과 같은 것이 아니다.



부처의 몸은 맑고 깨끗한 순금(純金)과도 같고
그 부동의 견고함은 금강석과도 같다



그러므로 그대는 마땅히 알라
부처의 몸을 범부 중생의 몸과 같은 육신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부처의 몸은 수억겁이 지나도 그 어느 것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견고함이고
그 어느 것에도 섞이지 않는 순수한 금강의 몸으로
텅 빈 허공의 부동함이 부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텅 빈 허공의 부동한 부처의 몸은 법신(法身)이 부처의 몸이고
텅 빈 허공에 부동한 부처가 법신의 몸으로 나툰 자(者) 부처이니
부처를  여여부동(如如不動)에서 여(如)를 통(統)하여 법(法)으로 오신 자(者)라는 뜻으로

여래(如來)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텅 빈 허공에서 법(法)을 보는 자 여래를 보고
법상(法相)을 보는 자 법신(法身)을 보고
부동함을 보는 자 부처(佛)를 보리라.


2009. 03. 01.  08:31






현상계에서 자등명으로 들어가고 자등명에서 현상계로 드러나는 길의 순서  / 칠통 조규일




현상계에서 자등명으로 들어가고 자등명에서 현상계로 드러나는 길의 순서를 보면 현상계(現象界) - 법(法) -공(空)- 공의 성품에서 여여(如如) - 여(如) - 여여부동(如如不動) - 자등명(自燈明) - 여여부동- 여 - 여여(如如)로 드러나 법으로 드러내고 법을 행한다.

현상계는 인연에 의하여 생(生)한 법에 의하여 나타난 현상이고 법에 의한 인(因)과 연(緣)에 의하여 생멸(生滅)하는 세계다.


법(法)은 공(空)의 여여(如如)한 여(如)를 통하여 법이 생멸을 한다. 물에 비유하여 말한 것과 같이 물의 표면 즉 물결이 여(如)이고 이 여(如)가 출렁이는 물결이나 파도를 일으키되 일어나는 물결이나 파도에 흔들림 없이 여(如)에 있는 상태로 움직이는 것을 여여(如如)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여(如如)는 여(如)에서 움직임으로 드러남이 여여(如如)로 여(如)하고 여(如)한 가운데 여(如)를 통하여 법(法)이 생멸하며 구름과 같이 몰려 있는 법운지(法雲地)라 할 것이다.

현상계에서 법(法)을 보고 법을 통하여 공(空)에 들어가고 공(空)에 들어가서 공(空)의 성품에서 여여(如如)를 보고 여여(如如)를 통하여 여(如)에 들어가고 여(如)에 들어가서는 여(如)를 통하여 여여(如如)로 드러나 여여(如如)하게 움직인다.


여여(如如)에서 여(如)를 보고 여(如)를 보고서는 여여(如如)하게 행하는 가운데 여여(如如)에서 여(如)보다 더 깊은 곳에서 부동(不動)함의 여여부동(如如不動)을 보고 여여부동(如如不動)으로 들어가고 여여부동에 들어가서는 여(如)를 통하여 여여(如如)로 드러나 여여(如如)하게 움직인다.


여여부동(如如不動)에 들어가서는 자등명(自燈明)에 들어가고 자등명에 들어가서는 여여부동에서 여(如)를 통하여 여여(如如)로 드러나 여여(如如)하게 움직인다.


이와 같이 현상계에서 자등명으로 들어가고 자등명에서 현상계로 드러나는 길의 순서를 보면 현상계(現象界) - 법(法) -공(空)- 공의 성품에서 여여(如如) - 여(如) - 여여부동(如如不動) - 자등명(自燈明) - 여여부동- 여 - 여여(如如)로 드러나 법으로 드러내고 법을 행한다.


여여(如如)에서 여(如)에서 여여부동(如如不動)에서 자등명에서 여여(如如)하게 행한 자에 있어서는 여여(如如)하게 행하되 현상계에서 보면 법운지에서 여여(如如)하게 행하는 행을 통하여 법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여법(如法)하게 라는 말이 있고 여여부동(如如不動)의 부처를 여래(如來)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밖의 현상은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그냥 보여질 뿐이로되 자기 자신 안에서 요동을 치면서 요동치는 밖을 봄으로 해서 마치 유리창이 더러우면 유리창 밖이 더럽게 보이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의 요동으로 밖의 현상들이 흔들리다가 자기 자신이 여여(如如)해지고 여(如)해짐으로 해서 밖의 현상들이 여여(如如)하게 보이고


또 자기 자신이 여(如)에 들어 여(如)에 있게 되고 여(如)에서 여여(如如)하게 행하는 가운데 여여부동(如如不動)에 들었을 때 밖에 현상들 역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됨으로 해서 안에서 밖으로 경계가 깨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며 경계 역시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경계가 바로 밖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밖에서 공(空)과 여여(如如) 여(如) 여여부동(如如不動)을 찾아서는 아니 되고,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이 공(空)이 되고 여(如)가 되고 여여부동(如如不動)에 들어감으로 해서 밖의 현상들이 공(空)할 때는 공이 되고, 여(如)할 때는 여(如)하게 보여서는 여(如)하게 되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할 때는 여여부동하게 보여서 여여부동하게 됨에 안팎이 같아짐으로 해서 깨달음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 변화되며 깨짐으로 해서 밖에 있는 것들이 변화되어 보여지고 또 변화되어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 안의 변화가 곧 밖의 변화가 되어서는 자기 자신 안에서의 작은 앎으로의 깨어남이 작게는 자각(自覺)에서 크게는 깨달음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깨어남은 밖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깨달음은 자기 자신 안에서 여여부동이 됨과 함께 익어져서 여여부동함을 깨고 밖으로 드러나 안팎 없이 여여부동이 될 때 깨달음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2009. 05. 16  13:29

* 이 글은 김삼주 선생님으로 하여금 쓰게된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김삼주 선생님께서 수행 정진해 가는 길에 있어서 순서에 입각해 보통 여 여여 여여부동을 말씀하시니. 여 여여 여여부동의 순서에 의하여 수행 정진해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으셨답니다. 그래서 여와 여여를 일반적으로 제목에서 말하면서도 글에서는 여여 여 여여부동을 순서적으로 말함에도 여 여여 여여부동의 순서적으로 받아드리게 되어 여와 여여에서 앞뒤가 서로 맞지 않아서 그것을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유되었답니다. 일찍이 순서를 여여 여 여여부동으로 알았다면 더 쉽게 갈 수 있었을텐데 왜 여 여여 여여부동이라고 말하면서 또 설명에서는 여여 여 여여부동의 순서로 말하여 혼란을 주어 더 어렵게 했느냐며 순서를 알면 바르게 이해하고 갈 수 있으니. 순서를 바르게 잡아달라고 해서 현상계에서 자등명으로 들어가고 자등명에서 현상계로 드러나는 길을 밝혀 보았습니다.







공의 성품을 알고자 한다면 허공에서 물과 같은 것을 관하라. / 칠통 조규일



여(如)는 물과 같이 우주 만물에 깃들어 있으며 바람과 같이 움직이고 구름과 같이 모였다 흩어질 뿐이다. 



여(如)는 공의 성품으로 드러나고 공의 성품은 텅 빈 허공을 만들었다. 텅 빈 허공을 만든 공의 성품은 본성으로부터 드러났다. 그러므로 공의 성품은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속성이 공의 성품이다.


현상계에서 현상계에 나타난 모든 형상들에 있어서는 본성으로 하여금 본성의 속성인 공의 성품에서 생멸하기에 공의 성품이 만유본성이라고 하되. 생사가 둘이 아닌 하나에서 보면 공의 성품은 이곳과 저곳을 넘나드는 하나의 문과 같을 뿐 본성이 아니다.


생사가 둘이 아닌 하나에서의 본성은 자등명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이 허공 가득하고 허공 가득한 불성이 물과 같은 것으로 있다.


허공(空)을 바다라고 이름할 때 공(空)의 성품은 바닷물과 같다. 그러므로 허공(空)에서 공의 성품을 보고자 한다면 바다라고 할 수 있는 텅 빈 허공에서 바닷물과 같은 물을 찾아라.
텅 빈 허공에 물과 같은 것이 공(空)의 성품이다. 바닷물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이 물과 같은 공(空)의 성품이 허공(空)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바닷물이 가득한 곳을 바다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이 공의 성품이 가득한 곳이 텅 빈 허공이다. 텅 빈 허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의 성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공의 성품이 비어 있는 듯 허공으로 보여질 뿐, 허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공의 성품으로 ........공의 성품이라고 하되 물과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 허공에서 공의 성품을 보고자 한다면 텅 빈 허공에서 물과 같은 것을 찾아라. 그리고 보라. 그러면 공의 성품을 보게 되는 것이다.

공의 성품이 물과 같이 삼라만상에 모두 다 똑같이 깃들어 있다. 물과 같이 공의 성품이 삼라만상에 모두 다 똑같이 깃들어 있는 것이 여(如)다.

여(如)에서 삼라만상이 생겨났으며 흩어져 없어지되 여(如)로 사라지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여(如)에서 생겨나도록 하고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 법이다. 이러한 법은 여(如)를 통하여 생겨났다가 여(如)를 통하여 사라진다. 이렇듯 우주 만물은 여(如)에서 생겨났다가 여(如)에서 소멸한다.

삼라만상 모두 다 똑같이 깃들어 있는 여(如)는 바닷물과 같으며 바닷물과도 같은 여(如)는 공(空)의 성품이다. 공의 성품은 텅 빈 허공에 여(如)하게 있되 있지 아니한 곳 없이 사방 팔방 시방이 꽉 들어 차 있다. 꽉 들어차 있음으로 오고감이 없다. 오고감이 없이 흐르고 흐르되 그 흐름이 여(如)하고 여(如)하니 여여(如如)하다. 공의 성품이 여(如)하고 여(如)하니 여여(如如)한 가운데 여를 통하여 법이 나오는 것이다. 


부처는 텅 빈 허공이라는 바다와 같은 일체의 우주 자체가 부처이고, 부처를 이루는 불성은 바다를 이루는 바닷물과 같이 텅 빈 허공을 이루고 있는 공의 성품이 불성이고, 법의 몸을 이루고 있는 법신(法身)은 여(如)에서 법이 생멸하고 여(如)가 공의 성품에서 생멸하니 공의 성품이 법신이며, 법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법계(法界)는 법이 있는 세계이니 법이 생멸하는 여가 있고 여가 생멸하고 있는 공의 성품이 있는 텅 빈 허공이 법계이니 법계는 우주 일체가 법계이다.


부처(佛)는 우주 일체라고 할 수 있는 가늠할 수 없는 허공이 부처고, 불성은 가늠할 수 없는 텅 빈 허공이란 우주 일체를 이루고 있는 공의 성품이 불성이고, 법신(法身)은 우주 일체를 이루고 있는 공(空)의 성품의 여(如)에서 법(法)이 생멸하니 공의 성품이 법의 몸이니 공의 성품이 법신(法身)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불성이란 공의 성품을 가지고 있고, 가지고 있는 공의 성품으로 여(如)하며 여(如)한 가운데 드러나는 자(者:대상)로 여(如)로 인하여 생멸하는 법의 옷을 입고 있는 자이다.


부처는 우주 일체가 있는 그대로 부처이고 불성은 우주 일체가 있는 그대로 있도록 하고 있는 성품이 불성이며 여래는 여에서 드러나니 즉 여에서 오는 자 여래이고 여에서 드러나는 것이 법의 몸을 하고 있으니 법신이 우주 일체가 부처님 법신이고 법계라 하되 법이 생멸하는 곳이 우주 일체이니 우주 일체가 있는 그대로 법계다.
 

우주 일체라고 하는 텅 빈 허공에서 공의 성품에 의하여 법이 드러나고 법이 드러남으로 우주 삼라만상이 드러났으니 드러난 삼라만상이 법에 의하여 드러난 만큼 법의 화신이고 부처님의 화신이 삼라만상이다.
 

2009. 10. 31  17:15






빛 덩어리의 호흡(呼吸: 안나반나) / 칠통 조규일


  
 


빛 덩어리의 호흡(呼吸: 안나반나) / 칠통 조규일




월, 화요일 몸이 바쁜 관계로 좌선을 못했다. 좌선을 못해서 그런가? 몸이 바빠서 그런가? 몸이 무겁고 원활하지 않은 느낌이어서 퇴근 무렵 잠시 좌선을 했다. 좌선을 했으나 부족하게 좌선을 했다. 부족하게 할 이유도 없었지만 딸아이가 아빠 같이 들어가요. 문자가 와서 그래 같이 들어가자 대답을 해 놓아서 오랫동안 좌선할 수가 없었다. 불편한 몸을 조금 추수린 정도 좌선을 했다. 딸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서 딸을 태우고 퇴근하는 길 딸아이가 하는 말...전에는 엄마가 부러웠는데...이젠 부럽지 않단다. 엄마는 아빠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나는 아빠의 피가 섞여서 더 좋다고 생각을 바꿨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 다시 태어나도 아빠의 부인 고모 ... 그 외의 아빠 옆에 누군가 되는 거 싫고, 오직 아빠의 딸로 태어나고 싶단다. 그러면서 다음에도 아빠의 딸로 태어나야지 우주 끝까지 쫓아가서도...이것에 관련하여 집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를 했다...오래 전에 내자로부터 딸이 우리 아빠가 다른 아이의 아빠였으면 질투를 많이 했을거야 우리 아빠라는 사실이 너무 좋다는 말을 했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어제는 딸아이의 입을 통하여 직접 들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한가로웠다. 그래 좌선을 하고 앉았다. 좌선하고 앉으니 아침에 사경한 안나반나(安那般那 : 呼吸) 호흡이 성인의 머묾이란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좌선하고 앉아 호흡을 관하며 들숨과 날숨에 집중했다. 들숨을 바라보고 날숨을 바라보며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코를 통하여 관(觀)하다가 백회로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관(觀)하였다.


백회로 들어오는 들숨과 백회로 나가는 날숨을 관하다가 빛 덩어리의 세계를 의식하고 의념했다. 그리고 들숨 때 빛 덩어리의 세계의 빛 덩어리를 백회로 들숨해서 단전까지 끌고 내려가 단전에서 지(止)를 하고 날숨을 하면서는 허공이 나오는 것을 관하였다.


몸통 안이 들숨을 통하여 빛 덩어리가 들어오고 날숨을 통하여 몸통 안의 허공이 나온다.  그래 몸통을 채우고 보이지 않는 호흡문 밖으로까지 몸통 안에 가득 넣은 빛 덩어리를 빼내어서 밖으로까지 나오게 했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는 호흡으로 나온 빛 덩어리의 빛으로 인체의 기회로도를 그리며 서로 연결하여 놓았다.


백회로 빛 덩어리가 들숨을 통하여 들어오고 몸통의 허공이 날숨을 통하여 나가는데, 처음은 백회로 나가다가 어느 정도 몸통에 빛 덩어리가 채워지면서부터는 들숨을 통하여 빛 덩어리는 백회로 들어오는데 날숨은 코를 통하여 날숨이 되면서 코로 허공이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좌선을 통한 들숨과 날숨의 호흡을 통하여 일단은 몸통 안에 빛 덩어리를 몸통 가득 넣어 인체 기회로도를 빛 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지켜볼 일이지만 좌선을 통한 호흡을 하며 빛 덩어리 세계의 빛 덩어리로 들숨하고 몸통의 공의 성품으로 날숨을 하며 호흡(呼吸) 관법(觀法) 수행을 해 보았다.

몸통과 빛 덩어리의 세계를 동시에 관하여 본다고 보면 빛 덩어리가 몸통에서 보이는 것 같고 몸통에서 빛 덩어리의 세계가 보이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느껴질 뿐 아직은 잘 모르겠다.


2010. 01. 20 13:46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바르게 말하면 안나반나(安那般那 : 呼吸)은 성인의 머묾이요,
하늘의 머묾이며, 범(梵)의 머묾이요, 배우는 이의 머묾이며,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머묾이요, 여래의 머묾이다.
 그것은 배울 것이 있는 이가 얻지 못한 것을 얻음이요,
이르지 못한 것에 이름이며,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함이다.
그리고 배울 것이 없는 이의 현재 세상에 즐겁게 머묾을 곧 안나반나념이라 하나니,
이것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說]이다.
왜냐 하면 안나반나념은 곧 성인의 머묾이요,
하늘의 머묾이며, 범의 머묾이고,……(내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현재 세상에 즐겁게 머묾이기 때문이니라.

.........<<잡아함경 제29권 807. 일사능가라경(一奢能伽羅經)에서...>>...... 






2007. 11. 03 07:55 칠통 조규일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어딜 가나 가는 그곳에,
스스로 속해 있는 구성원 속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법칙과 도리가 있다.

그 법칙과 도리는
구성원들의 의식이 되고 혼이 되고 얼이 되고 마음이 된다.





2007. 11. 02 08:21 칠통 조규일

자등명은 자성불의 행위로 인한 결과물을 소유함으로
그 소유한 결과물이 자등명 주변을 둘러싸여 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 행위는 자등명이나 자성불이 아니다.



자등명이나 자성불의 모든 행위는 소유하고 있는 행위로 인한 결과물 업에 우선한다.


마음은 항상 행위의 결과로 인한 소유물에만 휘말려 들고 있다.
소유물에 휘말려 들고 있는 마음 속 깊은 곳, 마음의 뿌리,
그 아래에는 그대의 자등명이란 자성불, 진아란 존재가 있다.



이 진아의 존재, 자등명이란 자성불 중심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에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결코 진아의 존재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자등명이란 자성불을 알 수가 없다.

진아의 존재, 자성불과 자등명을 알기 위해서는
중심과 주변에 존재해 있는 업의 행위를 확연히 알고
중심에 존재해 있는 존재의 행위를 확연히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업의 행위와 업의 중심에 존재해 있는 자등명이란 자성불을 관찰 성찰하고
확연히 아는데 충분한 날이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