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가는 길

5공(空) 4해탈(解脫), 선(禪), 4선정(禪定) 또는 8등지(等持)와 9차제정 / 칠통 조규일

칠통漆桶 조규일 2025. 8. 24. 07:23

 


5공(空) 4해탈(解脫), 선(禪), 4선정(禪定) 또는 8등지(等持)와 9차제정 / 칠통 조규일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해서 절망이나 슬픔은 있을 수 없다. 꿈과 희망을 위하여 한 걸음 다가가는 날이 되소서..()
2006. 08. 31 07:42 칠통 조규일 





Re:기본적 마음열기 질문과 답변 / 칠통 조규일


마음열기에 대하여 마음의 벽이 입체적으로 3겹으로 되어 있다고 해주셨습니다.

첫째 성장과정에서 만들어진 보호막이라 할 수 있고,

둘째 마음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업식의 테두리로 마음의 문 또는 마음의 벽( 스스로 만든 벽),
세째 밖으로부터 피해나 상처를 입은 사람 즉, 밖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문의 벽,
이렇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때그때 만들어진 보호막이라고 간단히 정리 해봤습니다.

일단 수행의 기본은 마음이 열린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깨달음이란 마음이 다 열린 5공의 상태를 말한다면

기본적으로 마음이 열렸다 하고 열고 가야되는 마음이란
그 첫 번째 업(식)덩어리에 붙어있는 제6식은 털어 내진 1공 의식은 되어 있다고 봐집니다.
수행의 성향에 있어서 수행을 하여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함은

이생에서의 의식과 생각이 쉬어지는, 업을 떨어낸 경지까지를 얻었으므로 그도 쉽지 않은 큰 수행의 결과라고 봅니다.

그 수행력으로 공의 단계 단계를 얻어 5공 해탈의 수행을 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열고 가야할 마음이란 5공의 단계에서 1공을 얻은 마음 아닐런지요?



이생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1식 2식 3식 4식 5식 6식으로, 제6식이 깨졌다 함은
이생에서의 업은 더 이상 쌓이지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문의 드립니다..
........2009년1월1일 moonwu 님의 칠통사랑방의 질문을 보고 일어난 생각입니다.......


칠통 조규일 선사님 말씀 :
기본적으로 우리가 열고 수행해 가야할 마음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말하는 사람의 말을 거짓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 이외의 사람들이 말을 하면 말하는 대로 믿지를 않고

자기 자신의 잣대를 갖다놓고는 자기식 대로 자기 알음알이에 맞게 생각 받아들이고는 자기식대로 판단 인식 의식하는데
이런 것부터 버리고 말하면 말하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5공에서 1공을 얻은 것과 다르다 하겠습니다.

1공을 얻어도 2공을 얻어도...마음이 열려 있지 않고 겸손 하심(下心)하지 않은 사람은 아만과 교만 자만에 다른 사람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성향이 있고 또 자기 자신의 권속에 받아드리는 만큼 이 경우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비록 1공을 얻지 못했더라도 마음이 열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욕되게 말하지 않으며 또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지 않고 지기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할 때 잘 받아들이고 잘 알아듣는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을 기본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1공을 얻고도 2공을 얻고도 3공을 얻고도 마음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의 경우 수행이 어느 정도까지는 그 경지가 올라설 수 있지만 더 높은 경지를 올라서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수행하여 어느 정도 올라서 공을 체득하였다 하여도 마음이나 의식 안에서는 자기 자신이 많이 수행되었다는 생각에 아만과 자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것을 말하여 주어도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이 최고 최상인 줄만 알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는 만큼 이런 경우 이 수행자에 있어서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닫혀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에게 있어서 우선 먼저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마음이 열려 있어야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나 더 앞선 방법 및 길을 알 수 있음에도 마음이 닫혀 있다면 자기 자신이 행하여 간 만큼은 올라설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올라설 수 없고 자칫 공에 떨어져 공놀이하기가 쉽다고 하겠습니다.

1식 2식 3식 4식 5식이란 것은 없고요

안 이 비 설 신이 각각 하나 하나 1식을 가지며
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각각의 식이 1식이고 이 1식들을 합하여 5식이라 하고
이 5식이 굳어져 의식이 됨에 의식을 제 6식이라고 하는 것이고 제6식이 굳어진 것을 7식이라고 하고
7식이 굳어진 것을 8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겠습니다.

제6식이라고 하는 의식은 머리부분에 있고 그것이 좀더 굳어진 6식은 마음이라고 하는 업(식)덩어리 표면에서 업(식)이 되어 업(식)덩어리에 붙으려고 하고 있다고 하겠지요.


이때 공(空)을 체득하여 머리부분에 의식과 업(식)덩어리에서 작용하는 제6식의 마음이란 부분을 놓음으로 이생에서 업은 짓지 않을 것이로되 본래 있는 업(식)덩어리는 그냥 그렇게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머리부분의 의식이나 가슴부분 즉 업(식)덩어리에 있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제6의식을 놓았을 때 생각과 의식 마음은 걸림 없이 편안하되 무의식 잠재의식 속에는 업이 있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서도 걸림과 장애가 온다고 하겠습니다.

2009. 01. 02 18:49 칠통 조규일





공(空)과 해탈(解脫) / 칠통 조규일


본인이 보건데 님의 경우 1공 1해탈을 했다 하겠지요. 4공 3해탈이란 말을 듣기는 했는데 누가 했는지 지금 생각이 나지 않네요.

본인은 5공 4해탈을 이야기했습니다. 작년에 나온 책 ["영(靈)적 구조와 선(禪) 수행의 원리"]에 있을 겁니다.

수행하다 보면 공을 체험하며 해탈을 하게 되는데...이때 공(空)을 체험하면서 님과 같이 공의 성품에 대한 공상(空相)을 알게 되지요.

그런 만큼 3해탈 4해탈을 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4공 내지 5공 그 어느 공(空)에서든 공(空)을 체험했다면 공의 성품을 말하고 공상(空相)을 말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관계로 깨달음이 공(空)에 있는 만큼 깨달은 척 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요.
공(空)을 체험하고 공의 성품을 알고 공상(空相)을 알아서는 1해탈을 하고서 그러기도 하고 또는 2해탈을 하고서 그러기도 하지요. 3해탈을 했을 경우 깨달음을 증득했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본인은 4해탈을 말하는 것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공의 성품까지도 해탈하고서 스스로 시방을 비추는 빛(자등명)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뜻으로 4해탈을 말했답니다.

본인이 님의 1공 1해탈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하게 공(空)에 대해서 성품과 공상(空相)을 말하고 있으나 아직 인(因)과 연(緣)을 말하되 법(法)까지 이르지 못한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이랍니다.

즉 님의 경우는 머리라고 하는 생각의 부분에서는 해탈을 하여 선(禪)에 들어 있으니 흔들림이 없지요, 그러나 "있음도 없음도 ..공연한 분별일 뿐이지요."라고 말씀하시면서 공의 성품으로의 공상(空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거울에 비친 그림처럼 ...인연에 따라 응하는 것 .." 그림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거울이 움직인바 없이 움직인 것 아닙니까?...움직임 없이 거울을 볼 수 있으리까?......그 움직임과 거울이 단 한치의 틈도 없어 ..다르나 다르지 않고..."라고 말하고 있고 또 .."식견이전의 볼래야 볼 수 없으나 분명하게 있는 이놈 ..이놈한번 바로 보면...삼천 대천세계가 ..내가 만들어 내가 쓰고있음입니다."이라고 말고 있습니다.


공상(空相)이란 공(空)의 성품이라 할 수 있는 물은 본래 맑고 깨끗하여 거울이랄 것도 그림자라고 할 것도 없고 또 이놈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만 님께서 거울과 그림자 이놈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비유하여 말씀드린다면 맑고 깨끗한 물에 막대기가 있으면 막대기로 하여금 마치 물이 거울처럼 보이고 또 막대기가 물로 인하여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과 같이 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놈이라고 하는 그것이 남아 있기에 그것으로 인하여 물에 막대기를 비유하여 말씀드린 것과 같이 거울과 그림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수행은 공(空)에 있되 자기 자신을 닦아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분명하게 선(禪)에 들고 공(空)을 체험함으로 말씀하셨으되 2번째 공(空)에 이르러야할 정(定)에 들지 못하여 인연을 말하되 법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본인은 정(定)에 들어야 마음이 흔들림이 없고 마음이 흔들림이 없어야 마음을 이루고 있는 업으로 인한 인연법과 연기법을 확연히 관하여 알 수 있다고 봅니다.


님의 경우 공의 성품과 공상을 말씀하시되 안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수행 즉 앞에서 본인 말씀드린 수직적 수행이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많은 착각도인들이 공에서 공의 성품을 체험하고 깨달았다고 하되 이는 앞에서 말했듯 4공 어디에서든 똑같이 공(空)의 체험으로 똑같이 말할 수 있되 그 안에 들어가서 해탈한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수행의 경지를 알 수 있다고 하겠지요. 이 경우 공의 성품과 공상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공을 체험한 모든 분들에게 있어서 누가 어느 공에서 말하는지 모른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성품과 공상을 떠나 더 깊이 들어가 해탈의 부분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되겠지요,


깨달은 척하면 마음씀에 있어서 또는 마음작용에 있어서 마음을 일으키고 일으키지 않는 데에 있어서 또는 반야지혜를 드러냄에 있어서 법륜을 굴림에 있어서 어떠하냐를 살펴보면 저 분이 1공에서 말하는지 2공에서 말하는지 알 수 있답니다...공에서 말하되 해탈의 부분에서 보면 자기 자신이 해탈하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 알 수 없는 만큼 공을 말하면서 해탈 부분에 있어서 해탈한 만큼만 알 뿐 더 이상은 모른다 하겠지요. 그리고 공을 말하되 해탈한 부분까지 분명하고 명확해서 장애와 걸림이 없을 뿐더러 흔들림 없겠으나 해탈하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하지 못하고 또 걸림과 장애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업으로 인하여 흔들린다 하겠지요.


수행은 공(空)에 있되 해탈해야 하는 만큼 진정한 수행은 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탈에 있다고 하겠지요. 그럼으로 님에게 본인이 말한 수직적 수행은 해탈해 가야 하는 계단적 수행을 말한 것이랍니다. 공을 체험함으로 공의 성품과 공상을 알았다 하여 깨달은 지 알고 수행 정진하지 않거나 안일하고 방일하게 되거나 게으르게 된다면 수행은 거기서 끝이 나고 더 이상 진척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인연법과 연기법도 모르고 또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을 내려놓거나 닦기도 전에 수행을 그만 두게 되어 이생에서는 편안할지 몰라도 전생에서부터 가져온 업은 어찌하지 못한다 할 것입니다.


5공 4해탈 어느 공 어느 해탈에서든 일단 체험하고 나면 수행에 한 단계 올라섬으로 확연하고 편안합니다. 확연하고 편안하다고 그만 두면 수행은 거기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처음은 확연하고 편안했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편안했던 마음이나 확연한 것에 걸림과 장애가 생긴답니다. 이는 마치 한 계단 올라서면 평지가 나오는 것과 같이 한 단계 올라서 보니 올라선 만큼 확연하고 편안하다 하겠지만 그 평지를 다 지나고 나면 또 올라서야 하는 걸림과 장애를 만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수직적 수행보다는 수평적 수행을 더 많이 하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수직적 수행을 하고 있는지 알고들 있지요..수행은 수평적 수행을 해서는 아니 되고 수직적 수행을 해야 할 것이며 공(空)을 몰라도 해탈해야 합니다. 해탈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인 만큼... 해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거울 그림자 이놈이랄 것이 없으니. 있다고 생각되는 그것으로부터 해탈해야 합니다. 일심 일념 수행 정진하여 가시다 보면 아마도 본인이 말한 것들에 대하여 확연할 때가 올 것이라 생각됩니다...본인이 수행은 수직적 수행을 해야 한다며 인연법 연기법 그러면서 말했던 법 그 법이 생멸하는 여(如) ...자꾸만 그 경지가 수직적으로 올라서야 한다고 하겠습니다...이 부분들을 설명하자면 너무 많은 말들이 필요해서 이쯤에서 그만 멈추겠습니다.

2009. 02. 06 16:09



공(空)과 해탈(解脫) 2 / 칠통 조규일

본인이 보건데 님의 경우 1공 1해탈을 했다 하겠지요. 4공 3해탈이란 말을 듣기는 했는데 누가 했는지 지금 생각이 나지 않네요. 본인은 5공 4해탈을 이야기했습니다. 작년에 나온 책 ["영(靈)적 구조와 선(禪) 수행의 원리"]에 있을 겁니다.
수행하다 보면 공을 체험하며 해탈을 하게 되는데...이때 공(空)을 체험하면서 님과 같이 공의 성품에 대한 공상(空相)을 알게 되지요. 그런 만큼 3해탈 4해탈을 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4공 내지 5공 그 어느 공(空)에서든 공(空)을 체험했다면 공의 성품을 말하고 공상(空相)을 말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관계로 깨달음이 공(空)에 있는 만큼 깨달은 척 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요. 공(空)을 체험하고 공의 성품을 알고 공상(空相)을 알아서는 1해탈을 하고서 그러기도 하고 또는 2해탈을 하고서 그러기도 하지요. 3해탈을 했을 경우 깨달음을 증득했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본인은 4해탈을 말하는 것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공의 성품까지도 해탈하고서 스스로 시방을 비추는 빛(자등명)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뜻으로 4해탈을 말했답니다.

본인이 님의 1공 1해탈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하게 공(空)에 대해서 성품과 공상(空相)을 말하고 있으나 아직 인(因)과 연(緣)을 말하되 법(法)까지 이르지 못한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이랍니다.
즉 님의 경우는 머리라고 하는 생각의 부분에서는 해탈을 하여 선(禪)에 들어 있으니 흔들림이 없지요, 그러나 "있음도 없음도 ..공연한 분별일 뿐이지요."라고 말씀하시면서 공의 성품으로의 공상(空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거울에 비친 그림처럼 ...인연에 따라 응하는 것 .." 그림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거울이 움직인바 없이 움직인 것 아닙니까?...움직임 없이 거울을 볼 수 있으리까?......그 움직임과 거울이 단 한치의 틈도 없어 ..다르나 다르지 않고..."라고 말하고 있고 또 .."식견이전의 볼래야 볼 수 없으나 분명하게 있는 이놈 ..이놈한번 바로 보면...삼천 대천세계가 ..내가 만들어 내가 쓰고있음입니다."이라고 말고 있습니다.

공상(空相)이란 공(空)의 성품이라 할 수 있는 물은 본래 맑고 깨끗하여 거울이랄 것도 그림자라고 할 것도 없고 또 이놈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만 님께서 거울과 그림자 이놈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비유하여 말씀드린다면 맑고 깨끗한 물에 막대기가 있으면 막대기로 하여금 마치 물이 거울처럼 보이고 또 막대기가 물로 인하여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과 같이 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놈이라고 하는 그것이 남아 있기에 그것으로 인하여 물에 막대기를 비유하여 말씀드린 것과 같이 거울과 그림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수행은 공(空)에 있되 자기 자신을 닦아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분명하게 선(禪)에 들고 공(空)을 체험함으로 말씀하셨으되 2번째 공(空)에 이르러야할 정(定)에 들지 못하여 인연을 말하되 법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본인은 정(定)에 들어야 마음이 흔들림이 없고 마음이 흔들림이 없어야 마음을 이루고 있는 업으로 인한 인연법과 연기법을 확연히 관하여 알 수 있다고 봅니다.


님의 경우 공의 성품과 공상을 말씀하시되 안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수행 즉 앞에서 본인 말씀드린 수직적 수행이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많은 착각도인들이 공에서 공의 성품을 체험하고 깨달았다고 하되 이는 앞에서 말했듯 4공 어디에서든 똑같이 공(空)의 체험으로 똑같이 말할 수 있되 그 안에 들어가서 해탈한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수행의 경지를 알 수 있다고 하겠지요.
이 경우 공의 성품과 공상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공을 체험한 모든 분들에게 있어서 누가 어느 공에서 말하는지 모른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성품과 공상을 떠나 더 깊이 들어가 해탈의 부분을 살펴보면 근방 알 수 있는 것이 되겠지요,

깨달은 척하면 마음씀에 있어서 또는 마음작용에 있어서 마음을 일으키고 일으키지 않는 데에 있어서 또는 반야지혜를 드러냄에 있어서 법륜을 굴림에 있어서 어떠하냐를 살펴보면 저 분이 1공에서 말하는지 2공에서 말하는지 알 수 있답니다...

공에서 말하되 해탈의 부분에서 보면 자기 자신이 해탈하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 알 수 없는 만큼 공을 말하면서 해탈 부분에 있어서 해탈한 만큼만 알 뿐 더 이상은 모른다 하겠지요.
그리고 공을 말하되 해탈한 부분까지 분명하고 명확해서 장애와 걸림이 없을 뿐더러 흔들림 없겠으나 해탈하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하지 못하고 또 걸림과 장애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업으로 인하여 흔들린다 하겠지요.

수행은 공(空)에 있되 해탈해야 하는 만큼 진정한 수행은 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탈에 있다고 하겠지요. 그럼으로 님에게 본인이 말한 수직적 수행은 해탈해 가야 하는 계단적 수행을 말한 것이랍니다.



공을 체험함으로 공의 성품과 공상을 알았다 하여 깨달은 지 알고 수행 정진하지 않거나 안일하고 방일하게 되거나 게으르게 된다면 수행은 거기서 끝이 나고 더 이상 진척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인연법과 연기법도 모르고 또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을 내려놓거나 닦기도 전에 수행을 그만 두게 되어 이생에서는 편안할지 몰라도 전생에서부터 가져온 업은 어찌하지 못한다 할 것입니다.

5공 4해탈 어느 공 어느 해탈에서든 일단 체험하고 나면 수행에 한 단계 올라섬으로 확연하고 편안합니다. 확연하고 편안하다고 그만 두면 수행은 거기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처음은 확연하고 편안했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편안했던 마음이나 확연한 것에 걸림과 장애가 생긴답니다. 이는 마치 한 계단 올라서면 평지가 나오는 것과 같이 한 단계 올라서 보니 올라선 만큼 확연하고 편안하다 하겠지만 그 평지를 다 지나고 나면 또 올라서야 하는 걸림과 장애를 만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수직적 수행보다는 수평적 수행을 더 많이 하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수직적 수행을 하고 있는지 알고들 있지요..수행은 수평적 수행을 해서는 아니 되고 수직적 수행을 해야 할 것이며 공(空)을 몰라도 해탈해야 합니다. 해탈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인 만큼... 해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거울 그림자 이놈이랄 것이 없으니. 있다고 생각되는 그것으로부터 해탈해야 합니다. 일심 일념 수행 정진하여 가시다 보면 아마도 본인이 말한 것들에 대하여 확연할 때가 올 것이라 생각됩니다...

본인이 수행은 수직적 수행을 해야 한다며 인연법 연기법 그러면서 말했던 법 그 법이 생멸하는 여(如) ...자꾸만 그 경지가 수직적으로 올라서야 한다고 하겠습니다...이 부분들을 설명하자면 너무 많은 말들이 필요해서 이쯤에서 그만 멈추겠습니다.


2009. 02. 06 16:09



Re:5공4해탈과 자성경계와의 관계에 대하여... / 칠통 조규일


오공과 사해탈의 법문이 계셨고 그로해서 공을 체험 즉 무아를 체험하게 되는 것도
어느 공의 상태를 체험했냐에 따라 확철대오 깨달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성경계 일원상을 깨고 깨닫기 위하여 수행들을 하고 있는데
업이 있고 없고 떠나서 수치로 봐서 자등명에 붙어있는 업의 수치를 전체를 10으로 봤을 때
7~8정도는 느낄 수 없어 자성경계가 생기지 않다가 9~10까지 찼을 때 경계가 생기고
그래서 9~10의 업은 관하고 떨구어 느슨하게 만들고 그로해서 나라는 실체가 없음을 인식하면서
자성경계일원상을 깨트리는 집중몰입삼매의 수행을 권해 주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공 사해탈이라 함은 7~8의 수치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 잠재의식일 것 같은데요, 이들을 다 넘어 오공 사해탈을 해야 확철대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9~10이란 수치는 겉의 의식 층일것 같은데 그 의식층만 인식하고 나서 자성경계를 알고, 보이고, 깨고 , 그래서 깨닫게 되고 한다는 원리의 관계에 대하여 어떤 상관 관계로 일치점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듭니다.
분명히 선생님의 법문 안에서 일치할 것입니다만
우선 제가 자성경계만을 깨면 되겠다는 확신 앞에서 잠깐 여쭙고 가겠습니다. ()^^





칠통 조규일 선사님 말씀 : 
여기서 7-8은 업이 있고 없고 상관없는 상태이고
9-10이 되었을 때
자등명과 자성불의 진아가 움직이지 못하고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이때 진아가 움직이기 위하여 업이란 가구를 움직여야 진아의 내가 움직일 수 있으니
업이란 가구를 움직이고



그러므로 업이란 가구를 움직여야 진아의 내가 움직이다보니
진아가 움직이되 업이란 가구라 움직임으로 진아가 움직이게 되니



이때 진아는 가만히 있는 듯하고 움직임이 없고 업이 움직이니 움직이는 것이 진아가 아닌 업이다 보니 움직임이 없는 듯 움직이는 진아를 잃고 움직이는 업을 나라고 착각을 일으키게 됨으로 해서 업을 나라고 하되 되니 이때 가아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가아가 생겨남으로 해서는 업의 움직임이 무한적이 아니라 한정적이다보니
한정적으로 느껴지는 경계의 테두리까지를 포함해서 나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 업을 나라고 하되 가아는 테두리의 경계까지를 나라고 할 것이지요.
이때 테두리의 경계를 자성경계의 일원상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그러니 질문하신 7-8의 업이 있고 상관없는 것을 지나 업이 상관 있는 9-10은 5공 4해탈에 있어서는
3공 2해탈까지 와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3공 2해탈까지 와서 4공 3해탈에서 깨달음을 증득하고
5공4해탈을 통하여 자등명에 이르게 된다 하겠습니다.

2010. 02. 10 10:22






5공 4해탈에 맞추어 살펴보는 무상 무아 대사일번 확철대오 / 칠통 조규일


선정삼매(업)-여(반야)-여여부동(혜인삼매, 무상 무아)-깨달음(대사일번)-자성경계타파 확철대오-자등명을 5공4해탈에 맞추어 법문하여 주십시요
5공 4해탈이란 글을 토대로 살펴보겠습니다. 5공4해탈이란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적 구조와 선 수행의 원리"란 책에 있지요.)




선정삼매(업)
선(禪)은 머리가 쉬면서 체험할 수 있고 1공(空)
정(定)은 고요한 마음에 들어가서 체험할 수 있는 2공
삼매(三昧)에 들어가면서 7식에서 3공
삼매에 깊게 들어가서 8식에서 4공
일상적 삼매에 들어감으로 9식에서 5공

여(如)는 자기 자신 밖에서의 공(空)을 통하여 공을 보고
공에서 여(如)를 체험 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 안에 들어와 자기 자신의 육체를 물질이 공(空)하다는 것을 체험함으로 해서
공의 체험에서 모두 다 같은 여(如) 알거나 체험할 수도 있고



이제부터 본인이 5공을 말한 각각의 공에서 공을 보고 공을 통하여
여를 알거나 여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를 알거나 체험함으로 여가 되는 것이 아닌 만큼
스스로 진정한 여가 되기 위해서는 5공에 이르러야
진정한 여에 이르렀다 하지 않을까 싶네요.

반야 역시도 만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반야 역시도 공(空)에서 공을 보고 공을 통하여 반야를 알게 되는 만큼
공을 보고 공에서 여(如)를 알거나 체험한다면
여를 알거나 체험한 여를 통하여 반야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공(空)에서 여를 알고 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이
반야 역시도 그럴 수 있되 진정한 반야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5공에 이르러서 공에서 공을 통하여 여를 알고 여를 통하여 반야를 알거나
반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5공에서 공을 통하여 여를 알기보다는 먼저 반야를 알거나
반야가 되어서 여를 알거나 여가 될 수도 있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으되
여를 아는 자 반야를 알고, 반야를 아는 자 여를 알 것이로되
여를 알고 반야를 모른다면 5공에 이르지 못한 것일 것이며

반대로 반야를 알고 여를 모른다면 이 또한 5공에 이르지 못한 것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와 반야는 한 몸이되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리 보게 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여는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로 통하는 것이라면
반야는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로 통하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하겠으니



여는 전체가 하나로 통하여 있도록 하는 것이고
반야는 그리하도록 하도록 하는 것(여)의 드러남이니



여를 행이란 반야는 밝혀봄의 앎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와 반야를 아는 것으로 해오할 수 있고
여와 반야가 됨으로 혜오(慧悟)할 수 있다고 하겠지요.


질문하고 있는 해인삼매와 무상과 무아는 여여부동 이전의 일로
여와 반야에서의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해인삼매(海印三昧)란 바다라고 할 수 있는 반야, 반야라고 할 수 있는 여,
여한 바다에서 삼매에 들어서 바다라고 하는 반야라고 하는 여에 들어서
도장을 찍고 오는 즉 반야와 여를 증득하는 것을 해인삼매라 해야 옳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는 출렁이는 바다의 바닷물 속에서 여여부동한 바닷물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해인삼매를 이룸으로 여여부동을 보게 되고 보아서는 가게 되고
그러므로 여여부동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여여부동을 부처님이라 할 것이며
여여부동을 보는 것을 두고 꽉 들어차 있어서 더 이상 옴짝달싹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되
이도 자기 자신 밖에서 공에서 공을 통하여 알 수도 있되
진정한 여여부동은 5공에서 혜오를 하고 견성을 하면서 체험하는 것이
진정한 여여부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듯 해인삼매는 여여부동 이전의 일이고
무아나 무상은 여(如)나 반야 이전의 일이라 하겠습니다.
어찌 그러하고 하니
모두 다 같다는 진정한 여나 진정한 반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즉 혜오(慧悟)가 되기 위해서는 무아가 되지 않고서는 여가 될 수 없고
반야가 될 수 없으며 또한 무아가 되지 않고서는 무상하게 되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무아인지 알아야 자기 자신의 물질도 무상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냥 단순히 말로 무아고 무상을 말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자신 밖에서의 공이든 자기 자신 안의 공이든
공 어디에서든 무아를 말할 수 있고 또 무상을 말할 수 있지만



스스로 진정한 무아가 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무상을 알 수 없으며
진정한 무아가 되어야 진정한 무상을 알아서 열반정적에 들어갈 수 있다 하겠습니다.

무아가 자기 자신 밖의 공이든 자기 자신 안의 어느 공에서든 말하고 있되
스스로 무아가 되기 위해서는 5공에 들어서야 무아가 되지 않나 싶고



무상 역시도 공을 통하여 밖의 공이든 안의 공이든 어디서든지
무상을 말할 수 있고 또 알 수 있겠지만
스스로 무아가 되고 무상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안에서
5공에 이르러 혜오하고 혜오해야 견성을 하고
견성을 해야 안팎이 같음에도 같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 있는지를 알고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있는지를 알고 깨려고 할 것이며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깨야 깨달음을 증득했다 하리요,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깨지 않고서 깨달았다고 한다면
이는 모두 다 착각 도인이거나 아니면 의식전환으로 말하는 깨달음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


대사일번이란 나라고 하는 무아에서도 서로 다르지 않고 같음에도 다른 것이 있는지를 알고
백척간두 진일보하고 정말로 스스로 한 번 죽어야 크게 죽음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하겠습니다.



마치 자성경계란 알속에서 죽고 자성경계란 알의 껍질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즉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깨고
안팎 없이 공의 성품으로 하나가 되었으되

그럼에도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대체 이것의 근원은 무엇인가 공의 성품이 된 자기 자신을 찾아 들어가고 들어가 보면
거기에 찬란한 빛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겠습니다.

해탈로 말한다면

선정삼매까지는 3번째 해탈이고
기타 여 반야 무아 무상 해인삼매 자성경계타파 깨달음(대사일번) 확철대오는
4번째 해탈에서의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까지 해탈하고 나아갔을 때 자등명을 만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며 해탈을 말한다면
하나하나 벗어날 때마다 하나의 해탈을 이루었다고 하겠으니
수많은 해탈이 있겠으나 크게 구분하여 말한 것이니
본인이 말한 것 정도에서 이해하면 되지 않을 싶습니다. 설명을 한다고 했는데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2010. 07. 17 12:50





Re:Re:5공 4해탈에 맞추어 살펴보는 무상 무아 대사일번 확철대오 / 칠통 조규일


선정삼매(업)-무아,무상, 해인삼매, 여(반야), 여여부동,- 자성경계타파(대사알번) 확철대오-자등명
선정삼매는 업식덩어리의 제6 7 8식을 뚫으며 파헤치는 것이라는 것을 다 알 것인데
문제는 그 다음 해인삼매와 무아, 무상, 여, 반야, 여여부동의 순서라고 하겠지요.

이것들을 순서를 세밀하게 말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와 같이 이루어진다고
뭉퉁거려 놓으니 헷갈려서 그러지요.

무아, 무상, 해인삼매, 여(반야)-여여부동,

이것들이 행하여짐이 뒤섞여 작용하다니 보니 자연스럽게 뒤섞여 말하게 되는 것이지요.
순서를 바르게 알려고 한다면 이것을 좀더 세분화해야 세분화한 만큼 바르게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삼매로 보면 선정삼매에서 해인삼매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삼매가 있을 수 있으나 삼매를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는 해인삼매가 마지막이 아닌가 싶고, 해인삼매를 이루게 되면 그때부터는 일행(일상)삼매가 되어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꼭 삼매에 들려고 하지 않아도 삼매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삼매가 해인삼매가 아닌가 합니다.
어느 한 단계에 올라서면 그 단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해인삼매를 하고 나면 일상(일행)삼매가 이루어져 있게 되는 것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해인삼매를 이룸으로 해서 일행(일상)삼매 속 무아가 되고 무상이 되고 반야가 되고 여가 되어 가는 것이다 하겠습니다.

무아, 무상, 해인삼매, 여(반야)-여여부동이 뭉퉁거려지는 것은 무아를 아는 것 무아가 되는 것이 다르고 또 무상을 아는 것과 무상이 되는 것이 다르고 반야를 보는 것과 반야가 되는 것 여를 아는 것과 여가 되는 것 여여부동을 아는 것과 여여부동이 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보고 알고 되는 것 사이사이에서 서로 엇갈려 이루어지듯 이루어지기 때문에 뭉퉁거려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선정삼매를 이루고 나서 무아인지를 알거나 무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해인삼매를 이루고 나서 여(如)를 알거나 반야를 짐작하는 것,
그리고 무아를 되거나 무상이 되어서 반야를 알거나 반야를 보는 것을 통하여 여를 알거나 여가 되는 것을 통하여 여가 되어서 여여부동을 아는 것과 여여부동이 되는 것에서의 의식의 깨달음과 인식의 깨달음에서의 자성경계가 있음의 인식과 자성경계의 인식으로 인한 깨달음,


그리고 자성경계를 깨려고 하는 일체가 하나라고 하는 깨달음의 의식에서 자성경계를 깨게 되는 확철대오 깨달음이 이루어지기까지 알고 보고 되는 과정에서 뒤섞여 알고 보고 되다보니 그 과정들이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같게 된다.

이것을 두고 알고 보고 되고의 과정으로 보면 좀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전에 설명은 그냥 순서적으로 그렇게 보면 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었는데...알고 보고 되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지 않음으로 두 분이서 여러 이야기를 하게 했네요.

이제는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알고 보고 되고의 과정에서 서로 맞물려 이루어지다보 니 아는 것에서는 다르고 보고는 것에서 다르고 되는 것에서 서로 다르다 보니 그런 것인지를 아시고 어느 쪽에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뒤섞여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 만큼 선정삼매가 완연히 이루어지고 나면 그만큼 중요하다고 하겠지요. 선정 삼매 후에 알고 보고 되는 것에 있어서 여러 변화들이 무쌍하다 하겠지요. 해인삼매를 포함해서...그런 만큼 선정삼매와 해인삼매는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2010. 07. 23 11:26




본인이 생각하는 4선(禪), 4선정(禪定) 또는 8등지(等持)와 9차제정 / 칠통 조규일


4선(禪)은 초선 2선 3선 4선을 말하고 이 4선을 4선정(禪定: 초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이라고도 한다.

4선 또는 4선정에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추가해서 8등지(等持)라고 하고 8등지에 상수멸(想受滅: 멸진정(滅盡定)을 추가해서 9차제정이라고 한다고 한다.


4선(禪)과 4선정(禪定)은 다르고 뒤에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선(禪)이라고 하는 쪽에서는 4선(禪)을 이어 5. 6. 7. 8선(禪)이라고 하고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쪽에서는 4선정(禪定)을 이어 5. 6 7. 8선정(禪定)이라고 말한다.


9차제정을 보면 8등지에 상수멸(想受滅: 멸진정(滅盡定)을 추가한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하나를 말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같은 뜻과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본인은 두 가지가 같은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수멸(想受滅: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과 느낌이 다하였다)을 보면 오온(五蘊: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에서 상(想)과 수(受)가 멸(滅: 다했다)했다는 말 아닌가 싶고,
멸진정(滅盡定)은 정(定)에서 멸(滅)할 것을 다(盡)했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정(定)이 무엇인가? 정(定)은 삼매(三昧)에 들기 위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으로 삼매에 들기 위한 초입이 아닌가? 그런데 삼매에 들기 위한 초입의 정(定)에서 멸진정(滅盡定)했다고 한다. 멸진정(滅盡定)에 든 것을 최상의 열반 무주무처(無住無處)에 들었다 한다.

그리고 이것을 욕계(欲界), 색계(色界: 1-4선 또는 1-4선정), 무색계(無色界: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로 나누고 있다.



4선 또는 4선정을 지나면 심해탈(心解脫)했다고 하고 무색계(無色界)라고 하는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을 지나서 멸진정(滅盡定, 혹은 想受滅)에 이르면 무주무처(無住無處)에 있게 됨으로 해서 열반했다고 한다.


선(禪)은 머리를 쉬는 게 선(禪)이고 정(定)은 마음이 쉬는 게 정(定)이다. 삼매(三昧)는 업이 되려고 업(식)덩어리에 붙어 있는 제6의식과 제7식 제8식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삼매다.



명상(冥想)과 참선(參禪)은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르다.
명상은 생각을 모아 한 생각을 쫓아가며 생각을 밝혀 가는 것이라면 참선은 화두를 참구(參究)해 가는 것이다. 선(禪)은 머리를 쉬기 위한 명상이라면 선정(禪定)은 마음을 쉬기 위한 참선이다. 삼매(三昧)는 업(식)을 내려놓기 위한 수행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지금 여기서 어느 정도 4선과 4선정에 대하여 그리고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와 상수멸(想受滅)과 멸진정(滅盡定)에 대하여 알아차렸는지 모르겠다.


4선(禪)을 말하는 곳에서는 4선(禪)에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상수멸(想受滅)을 말하고, 4선정(禪定)을 말하는 곳에서는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멸진정(滅盡定)을 말한다.


잘 살펴 보라. 4선을 말하며 상수멸을 말하는 곳에서는 머리부분을 말하니 명상계 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고, 4선정을 말하며 멸진정을 말하는 곳에서는 마음부분을 말하니 참선하는 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글을 읽는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러다 보니 명상계 쪽에서는 4선(禪)을 말하며 명상해 들어가는 머리부분에 집중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고, 4선정을 말하며 참선해 들어가는 마음부분에 집중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명상 참선 수행하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4선과 4선정은 이와 같이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않을까 싶다. 이러한 중에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같은 용어로 말을 하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명상 수행하는 쪽에서는 머리부분을 말하면서 설명을 하며 마지막 열반을 상수멸(想受滅)에 두고 있는 반면에 참선 수행 쪽에서는 마음부분을 말하면서 마음을 설명을 하며 마지막 열반을 멸진정(滅盡定)에 두고 말하는 것 아닌가 싶다.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수행하는 쪽에 따라서 4선 4선정을 말하고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하고 상수멸(想受滅)과 멸진정(滅盡定)을 말하되



이 모든 것을 수행해 가는 과정 선상에서의 자기 자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기 밖의 세계(欲界)와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접하게 되는 육체적인 부분의 세계(色界)와 육체적인 부분을 뚫고 들어서게 되는 물질의 육체가 아닌 비물질의 세계(無色界)로 나누어 말을 하며 열반으로 상수멸(想受滅)과 멸진정(滅盡定)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욕계(欲界)는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이고, 수행이라는 것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들어가면 물질이란 육체를 접하게 되는 이때부터 접하며 육체를 뚫고 들어가는 과정의 단계를 색계(色界)라 했고, 무색계(無色界)는 물질의 육체를 뚫고 들어가서 밝혀 들어가게 되는 곳의 비물질의 세계를 말했고, 수행의 계통에 따라 모든 세계를 여읜 것을 상수멸(想受滅) 또는 멸진정(滅盡定)이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주의해서 알아야 할 것은 세계(世界)라는 단어다.
일반적으로 세계(세계)라 하면 동물의 세계 또는 인간 세계, 영혼의 세계...등등의 거대하고도 큰 하나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인식들을 하는데... 여기서 수행하여 들어가는 세계는 자신이 수행하며 들어가게 되는 단계의 경지 내지 경계를 세계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경계(境界)이고, 하나의 경계는 하나의 상(相)이고, 하나의 상(相)은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저마다 하나의 이름은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수행자가 자기 자신 밖이라고 하는 욕계(欲界)와 육체란 물질의 색계(色界) 육체란 물질의 색계를 뚫고 들어간 물질이 아닌 비물질의 무색계로 나누어 설명을 하면서 무색계까지 벗어난 것을 상수멸 또는 멸진정이라는고 말하고 있다.


수행해서 도달한 수행의 경지나 수행하여 갖게 되는 경계가 어느 위치냐에 따라서 육체를 버리고 가게 되는 세계 역시도 육계, 색계, 무색계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글을 쓰면서도 조심스럽다. 욕계는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이고, 색계는 수행하되 육체란 물질적 부분에 수행 정진해 가되 수행이 육체란 물질에 머물러 있는 단계의 경지이고, 무색계는 물질을 여의고 정신적 영혼적 부분의 비물질로 들어간 단계의 경지를 말하고 있고 상수멸 또는 멸진정은 열반이라며 무주무처(無住無處)를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선(禪)은 머리를 쉬게 하는 것이 선(禪)이라고 했다. 명상계 쪽에서 말하는 4선을 관찰해 보면 이렇다. 명상을 하기 위하여 좌선을 하면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게 되니 자기 자신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단속을 하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는 지속적으로 들린다.

바깥에서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라고 하는 바깥 경계를 욕계라 할 것이며 이 욕계를 끊음으로 즉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끄달리지 않고 좌선을 하며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욕계를 해탈했다 하리다.


지속적으로 좌선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밖의 욕계를 차단하고 해탈해 좌선에 들어감으로 해서 욕계를 벗어나 바깥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육체라고 하는 입을 닫게 되고 입을 닫음으로 해서 밖으로 향하는 말이 그치게 된다. 밖의 경계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안의 경계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 좌선 상태를 초선(禪)이라 하고 있다.


좌선하면 일단 입을 닫게 되니 밖으로 나가는 말이 없게 되고 즉 안의 경계가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 즉 바깥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니 밖의 소리가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니 들어오는 소리에 작용하여 밖으로 나갈 말이 없어진다. 바깥으로부터 들어오지 않고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와 부딪치며 일어났던 안에서의 생각이나 추론적 사유 또는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면서 일어났던 생각이나 추론적 사유가 그치게 된다. 이것을 2선(禪)이라 하고 있다.


좌선하면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경계)가 그치고 자기 자신 안(육체라고 하는 입을 통하여 말하는 것)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안팎이 그침으로 부딪침이 없고 부딪침이 없으니 부딪침으로 인한 생각이나 추론적 사유가 그치니 생각과 추론적 사유로 인한 육체적 환희와 희열이 그친다. 이것을 제 3선(禪)이라 하고 있다.


좌선하면서 육체적 환희와 희열이 그치니 육체라고 하는 물질로 인한 것은 모두 다 그쳤으되 육체란 물질 안팎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호흡만이 있게 되고, 어느 순간 육체란 물질이 느꼈던 호흡마저 잊고 명상을 깊이 있게 한 생각을 쫓아 들어간 것을 4선(禪)이라고 하고 있다. 초선에서 4선까지 이것이 색계(色界)다. 즉 육체란 물질, 물질이란 색(色)의 세계에서의 수행이 4선을 벗어남으로 육체란 물질의 색계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좌선 수행하면서 이렇게 해서 육체란 물질의 색계(色界)를 벗어남으로 해서 육체란 물질 안에 있는 공(空)을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을 공무변처(空無邊處)라 하고 있고,


좌선 수행하면서 색계라고 하는 육체의 물질이 나라고 알고 있다고 육체란 물질이 내가 아니라 공(空無邊處)이 나인지 알다가 공(空)이 내가 아니라 공(空)한 가운데 식(識:여기서의 식은 현재의식을 말한다)이 있는 것을 알고 식(識)이 나인가 하다가 식(識)도 내가 아니구나하는 곳에 이르렀을 때 이곳을 식무변처(識無邊處)라 하고 있으며,


좌선 수행하면서 색계라고 하는 육체의 물질이 나라고 알고 있다고 육체란 물질이 내가 아니라 공(空無邊處)이 나인지 알다가 공(空)이 내가 아니라 공(空)한 가운데 식(識)이 있는 것을 알고 식(識)이 나인가 하다가 식(識)도 내가 아니니 나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고 내 것이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는지를 알았을 때 소유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또 소유한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라고 무소유(無所有)임을 앎으로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이곳을 무소유처(無所有處)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각하되 생각도 생각 아닌 것도 아닌 생각을 일으키고 일으킨 생각에 집착하지 않거나 끄달리지 않으며 생각할 때 이곳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 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과 느낌이 다하였다면서 열반했다고 한다. 즉 열반으로 상수멸(想受滅)을 말했다.

다시 말하면서 말은 복잡하고 번거롭되 육체란 물질의 색(色)을 여의고 식(識)을 여의므로 머리부분의 생각과(想), 식(識)을 받아들이는 느낌(受)를 여의므로 열반에 들었다 한 것이다.


여기서 보면 명상 수행함으로 해서 오온(五蘊)에서 육체란 물질의 색(色) 수(受) 상(想) 식(識)을 여읜 것을 두고 열반에 들었다하는 것 아닌가 싶다. 육체란 물질의 색으로 인하여 안팎으로의 작용으로 인한 수(受) 상(想)과 무색계(無色界)라고 하는 식(識)의 작용으로 인한 상(想) 수(受)가 없어졌다고 하면서 열반에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색(色) 수(受) 상(想) 식(識)을 여읜 것을 두고, 그것도 정(定)이라고 하는 마음부분까지 내려오지도 못하고 선(禪)이라고 하는 머리부분에서의 수(受) 상(想) 식(識)을 여의고 열반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색계 무색계 상수멸을 말한 것 아닌가 싶다. 선(禪)으로 말하는 것을 살펴보았을 때 이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


지금 4선은 명상하는 계통에서 이렇게 보거나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살펴본 것이고, 이제 마음법을 말하고 마음을 관하여 들어가는 참선 계통에서 살펴본다. 마음부분이니 당연히 선(禪)이 아니고 선정(禪定)이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니겠는가? 선정(禪定)이라고 말하는 쪽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정(定)이란 머리 부분이 쉬어서 선(禪)이 이루어졌을 때 마음이라고 하는 부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을 정(定)이라 했다. 그러니 마음을 말하는 계통에서는 4선이 아닌 4선정을 말하며 마음이란 부분에서 설명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음을 말하는 계통에서 본다면 선정(禪定)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선(禪)은 이루었거나 선정(禪定)을 닦으면 선(禪)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 아닌가 싶다.


좌선하고 참선에 들어가 욕계란 밖의 세계에 끄달리지 않고 마음을 관하며 선정(禪定)에 들어갔으나 마음에 잡념이 끊이지 않고 잡념이 일어나되 일어나는 잡념 속에서도 육체로 인한 욕망이나 악,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이나 악을 떠나게 된 것을 마음으로 기뻐하거나 기쁨을 느꼈을 때 이를 초선정(禪定)이라 한다.

이 말인즉 이렇다 참선을 하면서 마음을 관하게 됨으로 해서 밖에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들어와 있는 것에 대한 즉 참선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 들 때를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좌선하고 마음을 관하는 자체가 제1선정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욕계란 밖의 세계에 끄달리지 않고 좌선하고 참선에 들어가 마음을 관하니 마음에서 일어났던 잡념들이 가라앉으면서 마음이 고요해지니 고요한 마음에 기쁨이 일어나 환희에 젖어 있는 상태를 제 2선정(禪定)이라고 하고 있고


2선정에서 체험하고 있는 고요한 마음에 기쁨이나 환희를 초월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알고 있는 것을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알며 바르게 관할 때 이를 제 3선정(禪定)이라 하고 있으며


3선정에서 마음을 바르게 관(觀)하므로 마음에는 즐거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으며 근심도 기쁨도 없는지를 알고 마음이 평안하고도 청정한 상태를 이른 것을 제 4선정이라 하고 있다.


수행하며 자기 자신 안팎으로 드나들고 인식할 때 머리부분에서 인식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음이란 부분에서 인식하고 머리로 올라오며 생각을 일어난다고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 머리부분으로 들어와 생각을 일으킬 때도 있고 또 마음부분으로 들어와 머리부분으로 올라가 생각을 일으킬 때도 있으며, 밖에서 들어오지 않아도 안에서 머리 부분에서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또 마음부분에서 마음이 작용하면 머리부분으로 올라가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말이 밖으로 나옴에 있어서도 머리부분에서만 생각해서 나오기도 하고 또 마음부분에서 작용하여 머리부분으로 올라가 생각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알면 머리 부분에서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와 마음 부분에서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똑같이 말하는 것에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해야 4선과 4선정으로 말하는 서로 다른 계통에서 하나같이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다. 본인이 여기서 말했으니 한 번도 관하여 보지 않은 사람들은 관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4선정에서 마음에 대한 인식이 그치고 마음을 여의고 공(空)에 들어간 곳을 공무변처(空無邊處)라 하고 있다.


공무변처(空無邊處)에서 공(空)이 나인지 알다가 공(空)이 내가 아니라 업이 되려고 하는 식(識)이 나인 듯 식(業識)에 부딪쳐 마음으로 인한 공(空)에 대한 인식이 그치고 식(業識)을 살피고 관하고 있는 것을 식무변처(識無邊處)에 이르렀다 하고 있다.

여기서 식(識)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잘 살펴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의 제7식 제8식이 아니라 제 6의식으로 업이 되려고 하는 식(識)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단계에서 살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관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에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말하고 이어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말한다는 것은 마음을 관하며 삼매를 통하여 들어가야 할 업(식)덩어리에 붙어 있는 제7식과 제8식을 삼매를 통하여 들어가서 만나고 만나서 이르고 이르러서 공(空)에 이르게 되는 것에 대한 말이 없이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바로 무소유처(無所有處)로 들어가는 만큼 마음에서의 식(識)을 관한다는 것은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이 아닌 마음 부분에 달라붙어 업이 되려고 하는 식(識)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전생으로부터 가지고 온 업에 대한 말이나 수행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단순히 이생에서 살고 있고 살아가는 이생에서의 형성된 마음부분만을 설명하고 있고 또 이생에서 현재의 마음만을 수행하면 된다고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싶다.

현재 마음이라고 하는 업(식)덩어리 앞에서 작용하며 업이 되려고 하는 깊은 의식에 대한 인식이 그치고 그러므로 나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고 내 것이랄 것이 하나도 없는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머무름으로 해서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작용하되 마음의 무소유처에서 작용하고 마음의 무소유처에서 작용한 것이 머리 부분으로 올라가서 현재 의식이 되어 드러나되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생각을 일으키고 일으킨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생각해 드러내는 것을 두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멸할 것이 더 이상 없음으로 다 멸하였다 하며 멸진정(滅盡定)을 말하며 열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말하며 마음을 관하는 계통에서 보면 마음을 관하여 들어가니 마음에 식(識)이라는 것이 있는지를 알고 그 식에 들어가서 그 식도 놓아버린 상태를 무소유처라 하고 멸진정의 열반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의 식(識)이란 머리부분의 의식이 업이 되려고 업(식)덩어리에 붙으려고 하는 식(識)을 여읜 것을 두고 멸진정(滅盡定)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두고 열반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으로 볼 때 업이 되어서 업(식)덩어리로 윤회의 주체에 있는 것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이 없고 단순히 이생에서의 머리 부분과 마음 부분에서만 서로 다른 두 수행 계통에서 말을 했을 뿐, 업의 주체인 업(식)덩어리에 있는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이라고 하는 제7식과 제8식에 대한 해탈부분이 없다.

업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면서 수행해서 업을 내려놓는 것에 대한 말이 없고 이생에서의 색(色) 수(受) 상(想) 식(識)에 대하여 말을 하면서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하고 해탈 열반을 말하면서 죽어서 이생에서의 색 수 상 식에의 수행의 경지에 따라 간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 생각하며 받아드려야 할지 조심스럽고 또 걱정이 되기도 한다.


본인이 "영적 구조와 선 수행의 원리"란 책에서 말한 5공 4해탈로 살펴본다면,

현실세계란 욕계, 색계란 육체, 무색계란 머리부분에서의 공(空), 마음부분에서의 공(空)을 말했을 뿐, 업(식)덩어리를 뚫고 들어가게 되는 삼매에서의 공(空 )애 대한 설명이 없고 삼매를 통한 공(空)에서 깨달음의 공(空), 깨달음의 공에서 자등명(自燈明)에 이르게 되는 것에 대한 말이 전무하다.


이 글을 읽는 동안 그대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본인이 5공 4해탈을 말한 공(空)에서 살펴보며 관하여 보라. 공무변처와 식무변처와 무소유처가 과연 어느 곳에서 공을 체험하고 해탈하고서 상수멸이니 멸진정을 말하고 있는지 관하여 살펴보며 알도록 하라.
그리고 수행하면서 경지에 올라선 경지에 따라 죽어서 가게 된다는 욕계 색계 무색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누어져 있는 33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만약에 업(식)덩어리가 있고 업이 자등명이란 것에 달라붙어 있음으로 업(식)덩어리가 되어 있는지를 알고 자등명에 달라붙어 있는 업을 내려놓거나 닦거나 하는 부분에 있어서의 수행면에서의 설명이 있다면 4선 4선정 이외의 다른 부분들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업이 있다는 말을 하면서도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업에 대한 수행 부분이 없고 이생에서만 드러나 있는 현재 의식과 현재 마음 부분에 있어서의 수행에 대한 말만 있으니 업이 있다고 받아들이면서도 죽으면 허공으로 흩어지게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수행을 직접해서 단계단계 올라선다면 모를까 수행을 하면서 학문적으로 정리를 한다면 아마도 "아무 것도 없다" "무(無)다" 또는 "공(空)이다" "공의 성품이다" "그러므로 허공에 흩어져 공의 성품으로 있게 된다"...등등의 말을 하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좌선 수행하면서 머리부분이 쉬어서 선(禪)을 이루고 마음이란 부분에 닿아 정(定)에 든 사람은 4선(禪)을 말하는 계통에서 보면 이미 상수멸(想受滅)하고 열반한 것이 될 것이며 또 4선정(禪定)을 말하는 계통에서 보면 업(식)덩어리를 뚫고 들어가는 삼매(三昧)에 든 사람은 이미 멸진정(滅盡定)하고 열반한 것이 될 것이다.

자등명에 달라붙어 있는 업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삼매이로되 삼매가 변형되어 말하고 있는 깊게 들어가는 몰입되어 있는 상태를 단순히 삼매라고 하는 차원에서 보면 물론 아니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업(식)을 뚫고 들어가는 행위에 있어서의 삼매라면 삼매를 듦과 동시에 멸진정한 것일 게다.


4선(禪)을 말하는 계통에서 볼 때 선정(禪定)에 들면 4선을 말하는 계통에서는 무색계에 이른 것뿐만 아니라 해탈 열반한 것이 될 것이며, 4선정을 말하는 계통에서 볼 때 삼매에 들면 4선정을 말하는 계통에서는 무색계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해탈 열반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뿐인가? 수행함에 따라 이르게 되는 33천에 대해서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그럼 업(식)덩어리를 직관하는 자등명 직관함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자등명 직관이란 업(식)덩어리를 직관한다함은 삼매로 들어가는 것이 될 터인데....이미 선(禪)은 넘어섰고 선정(禪定)을 지나 삼매에 든 것이 아니겠는가? 이유야 어떠하든 4선과 4선정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옮겨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마음을 관하면서 머리가 쉰다면 자등명 직관을 통하여 마음이 쉬게 되는 것 아닌가? 마음이 쉬게 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머리부분도 자등명직관하면 쉬게 되는 것 아닌가? 4선을 말하는 계통에서 보면 자등명직관이란 업(식)덩어리는 있지도 않은 것일 것이며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할 것이 아니겠는가? 4선정을 말하는 계통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자등명직관하면서 몰입해 들어간다면 머리부분은 쉬고 마음부분도 쉬고 삼매에 들어가 가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묻노니 생각하고 스스로 대답해 보라.



4선(禪)에서 머리 부분을 쉬게 되는 상수멸에 이르러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깨달았다고 하겠는가? 열반에 들었다고 하겠는가? 해탈했다고 하겠는가? 해탈했다고 한다면 수많은 해탈 중에 머리부분으로부터 해탈했다 할 것이며 4선정에서 마음부분을 쉬게 되는 마음의 멸진정에 이르러 삼매에 들었을 때 깨달았다고 하겠는가? 열반에 들었다고 하겠는가?


해탈했다고 하겠는가? 해탈했다고 한다면 수많은 해탈 중에 마음으로부터 해탈했다고 할 것이다. 업이라고 하는 것을 뚫고 들어가는 삼매에 들었다고 하여 깨달았다고 해탈했다 하겠는가? 삼매에 들어서 업을 다 놓거나 떨구어 내고 공(空)을 보거나 되었을 때 해오(解悟)나 혜오(慧悟) 또는 견성(見性)했다고 할 것이다.


업(식)덩어리를 관하며 삼매에 들어서 업을 다 내려놓고 다 떨구었다고 할지라도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있다.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있는 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이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깨고 우주와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할 것이다. 확철대오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4선에서 상수멸을 말하며 열반을 말하고 4선정에서 멸진정을 말하며 열반을 말하고 있으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두 계통에서는 위 수행 단계의 경지에 어느 곳에 반야와 해인(海印)삼매(三昧)를 넣을까? 싶다.


육체 밖에서 만나게 되는 공(空)이 있고, 수행을 통하여 육체란 부분을 여의면서 만나는 공(空)이 있다.



수행하면서 머리를 쉬게 됨으로 해서 만나게 되는 공(空)이 있고, 마음이라고 하는 업이 되려고 하는 제6식을 놓게 됨으로 만나게 되는 공(空)이 있으며, 업(식)덩어리에 붙어 있는 제 7식을 놓음으로 만나게 되는 공(空)이 있고, 업(식)덩어리에 붙어 있는 제 8식을 놓음으로 만나게 되는 공(空)이 있고, 제9식이라고 할 견성식(見性識) 내지는 혜오식(慧悟識)에서 만나게 되는 공(空)이 있다.


이 모든 공을 뛰어 넘어야 10(十)이라고 하는 완성의 숫자를 만나게 되고, 완성의 십(十)을 만나 이르렀을 때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다. 깨달음을 증득하고 더 수행 정진해 가야 자등명이란 빛을 만날 수 있다.


본인이 5공(空) 4해탈(解脫)을 말할 때 첫 번째 공(空)은 머리를 쉬면서 만나게 되는 공(空)을 말했으며 4해탈을 말할 때 머리부분의 현재의식에서 업이 되려고 마음이란 업(식)덩어리에 달라붙어 있으면서 마음작용을 일으키는 제6의식을 떨어내고 얻게 되는 해탈을 첫 번째 해탈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밖에서 만나는 공(空)에서부터 시작한다면 7공(空)을 말해야 할 것이며 자기 자신 밖이라고 하는 욕계(欲界)를 내려놓고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즉 색계(色界)로 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밖이라고 하는 욕계(欲界_를 해탈하는 것으로 한다면 7해탈을 해야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다 하리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은 삼매를 걸쳐 왔고 삼매 중의 최고의 삼매인 해인 삼매를 통하여 왔다는 말이다.



반야와 해인삼매 견성은 7공(空)으로 볼 때 6공(空)에 들어서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본인이 말한 5공(空으로 볼 때는 4공에 들어서서 체험하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4선 4선정을 말하고 있는 계통에서는 어디에 두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본인이 5공 4해탈을 말한 것에 비교하여 4선을 말하는 쪽을 살펴본다면 첫 번째 해탈도 못한 것을 두고 해탈 열반했다고 하는 것이며 4선정을 말하는 쪽으로 살펴본다면 첫 번째 해탈한 것을 두고 열반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2010. 05. 10 15:19



바르게 공부하는 이 / 칠통 조규일




(하나(一)란 한 물건)
바르게 공부하는 이

이 하나(一)는
일체의 하나(一)로
한 물건이라고도 하고
이 한 물건을 큰 바다에 비유하여
바다라 말하기도 한다.

이 하나(一)
한 물건은
천지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천지가 다 없어진 후에도 있을 것이며
천지가 수천 수만번 생기고 부서져도
변동없이 항상 있을 것이다.

크기는
가늠할 수 없는 허공의 몇 천억배가 넘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크고
그 밝기는 일월보다 몇 천억배나 밝고 밝은 광명으로
온 시방 세계를 항상 없이 비추고 있다.
그래서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무량광은
밝음과 어둠을 벗어난 절대적인 광명으로
항상 우주의 모든 만물을 비추고 있고
이 비춤으로 우주의 모든 만물이 저마다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 하나(一)
한 물건으로
우주의 모든 만물이 저마다 드러나 있는 그대로
전체가 하나로 하나가 전체로 오롯히 있어
우주 삼라만상이 저마다 오릇히 있고
저마다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 하나(一)는
모든 상(相)과 이름과 분별을 떠난 절대적인 것이라
절대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지만 부득이해서 절대라는 이름으로
절대자(絶對者)라 하는 것이다.

이 하나(一)
한 물건 속에 있는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 중에서
아무리 작고 미세한 것(중생)일지라도
모두 다 이 하나(一) 한 물건을 가지고 있고
이 한 물건 하나(一) 속에 있다.

이 하나(一)
한 물건은
자기 스스로 깨쳐서 쓸 따름이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도 못하고 전할 수도 없다.

이 하나(一) 한 물건을 확연히 아는 사람을
깨친 사람이라 하고 부처라 하고 그리스도라 하며

하나(一) 한 물건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깨치지 못한 이를
중생이라 하고 아들이라 한다.

깨친 부처든 깨치지 못한 미세한 아주 조그마한 미생물까지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이들 사이 서로 다른 것이 있다면
이 하나(一) 한 물건을 확연히 아느냐 모르느냐
즉 깨쳤냐 못 깨쳤냐에 따라 다를 뿐 똑같다.

오직 이 하나(一)
한 물건만
믿고 의지하는 것을 바른 신심이라 하고



오로지 이 하나(一) 한 물건만 믿고 의지하며
이를 알려고 하는 공부
이를 깨치려 하는 공부
이를 조금씩 알아 가는 공부를
바른 공부라 할 것이다.

즉 바른 공부란
오직 하나(一)
한 물건
이름 붙일 수 없는 무량광(無量光) 절대자(絶對者)에
이름 붙여진 저마다의 각기 서로 다른 이름을 바탕으로
각기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각기 서로 다른 종교에서 이름하는

오직 하나 한 물건에
붙여진 이름의 한 물건을
믿고 의지하며


마음을 활짝 열고
바른 마음 바른 생각 바른 행을 하며



자기 스스로 본성의 빛을 덮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놓아버리고 닦아내며
놓고 닦아냄으로 현현하는 자기 안에 본성의 빛을 조금씩 밝히며



무량광(無量光)의 빛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이를 두고 빛으로 가는 길이라 할 것이며


이렇듯 빛으로 가는 이를 두고 바른 공부하는 이라 할 것이다.

2005. 07. 28 09:00



어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도 못하고 전할 수도 없는가? / 칠통 조규일

어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도 못하고 전할 수도 없는가?
어찌
하나(一)란 한 물건을
자기 스스로 깨쳐서 쓸 따름이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도 못하고 전할 수도 없는가?

그것은
이미 하나(一)란 한 물건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떠나 따로이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그 누구나 보고 듣고 행하는 모든 것 곳에 이것이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행하고 있는 곳 것에 있고
보고 듣고 행하고 있는 것 곳을 떠나 따로이
이 하나(一)란 한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전체 속에 전체가 하나로
이 하나(一)란 한 물건이 있고
이 하나란 한 물건 속에 스스로들 있고
그것에 둘러쌓여 있음에도 스스로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보지 못하고는 그 누구도 그것을 보여주어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一)란 한 물건은 이미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고 있기 때문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미 없는 곳 없이 드러나 있고
없는 곳 없이 두루해 있어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
이것 속 이것으로 있음에도 이를 스스로 보지 못할 뿐

이미 하나(一)란 한 물건 스스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따로이 다른 사람이 보여줄 것이 없기에
자기 스스로 깨쳐서 보고 알고 쓸 따름이다.

이렇듯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고
있는 그대로 있는데

이미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데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을 떠나
따로이 무엇을 전할 수 있으며 전한다 하겠으며
이미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데
또다시 무엇을 전해받겠는가?

이러하기에
하나(一)란 한 물건은
자기 스스로 깨쳐서 쓸 따름이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도 못하고 전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자기 스스로 깨쳐서 보고 알고 쓸 것인가?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자기 스스로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자기 스스로를 가리고 있는 것을
제거 내지는 깨트리고 봐야 비로서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티끌의 업식이라 할 것이며
그대가 알고 있는 것 아는 것 식(識)이라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업식으로 둘러쌓인
자성경계의 일원상 통을 깨트릴 것인가?
그것은 칠통을 이루게 했고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되게 하는 것을 깨트려야 한다.

무엇이 이 통을 단단하게 하고
깨트리기 어렵게 하는가?
그것은 아만과 자만 거만이 더욱 더 단단하게 하고
삼독심이 그러하고 내가 있음으로 그러한 것이니.

이 전체를 하나 하나 살펴서
스스로 깨쳐서
하나(一)란 한 물건을 보고 쓰시길바랍니다.

2005. 07. 31. 08:18



스승과 제자 ? / 칠통 조규일

스승과 제자 ?
모처에서 스승이란 단어를 접하고
전에부터 가지고 있는 생각을 써 봅니다.

스승이란
어떤 분을 스승이라고 하는가?
제자란
어떤 분을 제자라 하는가?

단순히 가르치는 자를 스승이라 하지 않으며
단순히 배우는 자를 제자라 하지 않는다.

배우고 익히는
익히고 배우는 곳이면
어디나 스승과 제자가 있다.
그리고 친구와는 구별된다.

명상 수행하는 정신계에서는
친구라는 도반이 있고 스승과 제자가 있다.
그리고 배우고 익히고 익히고 배우는 사이에도
스승과 제자라기 보다 도반으로 밀고 당기며
앞서 간 도반이 따라오는 도반을 이끌기도 하고
또한 따라가는 도반이 밀다가
어느 날 앞서기도 하는 게 이쪽이다.
앞서거나 뒤서거나 함께 더불어 가는 것이 도반이다.

그럼 이곳에서 스승과 제자란 어떤 의미일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다고 스승이 아니며
단순히 배우고 익힌다고 해서 제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정신계에서 스승과 제자라면
많고 많은 도의 세계에서
하나의 맥을 있어가는 도줄로
스승과 제자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하나의 법맥과 도맥을 잇는 관계로
사바세계에서의 아버지와 자식 같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스승이 되고자 한다면
적어도 스승된 자는
제자를 자식 섬기 듯
제자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 줌으로
오직 한 소식 돈오의 깨달음을 얻도록 해야 하고
스스로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적어도 스승된 자를
어버이 섬기듯
스승을 믿고 의지하여 나아가되 최선을 다하여 섬기며
오직 한 소식 돈오의 깨달음을 향하여 나아가되
스승된 자를 부끄럽게 해서는 아니 된다.

이렇듯
스승이 되고자 하는 자가
제자를 대함에 자식 대하듯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스승되기를 버리고 도반으로 있기를 바라야 하고
제자 되고자 하는 자가
스승을 어버이 섬기듯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제자되기를 버리고 도반으로 함께하기를 바라야 한다.

이런 관계로
출가하지 않은 제가자가 스승되기는 어렵고
제가자로 자식이 있다면 더 더욱 스승될 자격이 없다 하겠으며
출가해서 그것도 일찍 출가하여 자식이 없다면 스승될 자격은 있으나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없다면 이 또한 스승되기가 어렵다할 것이며
제가자로 마음의 출가를 하지 않고 제자되기는 어렵고
제가자가 마음의 출가를 하지 않고 처자를 거느리고 산다면
더 더욱 제자될 자격이 없다할 것이니

먼저 간 이는 스승되기를 버리고
좋은 도반으로 함께하는 도반을 이끌어 주고 더불어 함께가야 할 것이며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이는 제자되기를 버리고
좋은 도반으로 언제까지나 함께하기를 바라며
바른 마음 바른 생각을 가지고 배우고 익혀서 바른 행을 하며
일심 일념으로 수행 정진하여 먼저 가며 알려주는 도반을 앞질러야 할 것이다.

이렇듯
무량광의 빛으로
빛으로 가는 길목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도반으로 더불어 함께 가야 한다

이러함에도
혹여 스승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과연 내가 스승될 자격이 있나를 살펴보고
이러함에도
혹여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과연 내가 제자될 준비가 되어 있나를 살펴보라.

스승될 자격이 없음에도 스승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명예나 권위 아만과 자만 거만에 빠져 있는 자라 할 것이며
제자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 제자 되기를 바라는 자가 있다면
이는 명예나 권위를 쫓고
제사 보다는 잿밥에 관심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2005. 07. 30. 10:29



나는 누구인가요? / 칠통 조규일


나는 누구인가요?

너무나 당신을 사랑하기에
전 당신을 단 하루 한 순간도
당신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언제나 난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이 너무도 좋아서
전 당신을 늘 감싸안고
당신을 제 품 안에서
저버리거나 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언제 어디나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숨쉬면 숨쉬는 곳에
생각하면 생각하는 곳에
행동하면 행동하는 곳에
보면 보는 곳에
들으면 듣는 곳에
당신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당신과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너무도 좋아서
너무도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의 몸 영혼 어디든
스며있지 않은 곳 없이 스며 있어서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당신과 떨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무시이래
당신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과 한 몸 하나로 있습니다.

너무 오랜 동안 함께 했기에
당신은 저를 잊었지만
전 지금도 당신 품에 있고
당신에 깃들어 있고
당신 주변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당신을 감싸며
당신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보고 나를 반기며
나를 맞이하니 깨달았다 하고
당신이 나를 모르고 외면한 채 살아가니
중생이라고 하네요.

2005. 08. 04 08:18 칠통 조규일



동그라미 하나에 / 칠통 조규일


동그라미 하나에
0
그 테두리 하나로 한점이 되고
그 한점이 움직이니
한점 자체로는 중생심이고
동그라미 하나
0
안팎으로 여여한 것이 평상심이로니

본래 몸은
0 안에도 있고 0 밖에도 있으니
평상심으로 안팎 없이 여여하니
본래 몸에 있게 되고
0 에 있고
0 안에서 움직이고
0 이 0 의 밖과 서로 다르니
안팎이 서로 다른 것으로 인하여
0 이 움직이니

주(主)는
0 자체에 있는가?
0 안에 있는가 ?
0 밖에 있는가?
안팎으로 있는가?

객(客)은
0 자체에 있는가?
0 안에 있는가?
0 밖에 있는가?

무엇이 주(主)이고 객(客)인가?

본래 몸
본래 주(主)는
0 안에 있고 밖에 있으며
0 안에서 0 이 주(主)라고 하는
0 는 0 으로 본래 안팎 없는
아무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 주(主)이되
이 주(主)에서 바라보는 0 는 객(客)으로
객(客)은 0 안에만 있다.

한점
0 을 나라고 하며 주(主)되어 움직이고
움직임을 따라 0 에 있으니
0 안팎으로 여여한 0 의 움직임을 따라 출렁이니
한점의 움직임에 있게 되어
고통과 괴로움 희로애락을 몸소 느끼지만
한점
0 의 움직임을 바라보되
0 밖에서 바라보니
0 밖이 주(主)이고 0 은 객(客)이라

한점
0 에서 움직이고
움직임을 따라 0 이 흘러가니
0 은 변화무쌍하되
0 밖은 여여하다.

여여함은
0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0 안에도 있으니
한점 0 에서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지 말고
0 에 있되 0의 움직임을 관하라.

그러면 전도된 주객이 자리를 잡고
주(主)에서 객(客)을 바라봄으로
0 의 움직임을 보고 0 안의 생멸을 보니
0 안의 생멸로 움직임을 바라보게 되고
0 안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지 않으니
0 안의 움직임은 그저 흔들릴 뿐이다.

주객이 전도되어
객(客)을 주(主)라 하며
한점 0 안에서 움직이며 움직임에 따라 흔들릴 때
한점 0은 주(主)이고 "나"라 하겠으며
한점 0 안에서 움직이는 마음을 중생심이라 하겠으나
한점 0 이 주(主)가 아니라 객(客)인지를 알고
한점 0 밖에서 한점 0 을 보고
0 안에서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며 흔들리는
한점 0을 볼 때에
안팎 없는 여여한 마음으로
한점 0 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림을 볼 뿐
한점 0 의 움직임을 따라 요동도 없이 흔들리지 않는
이 마음을 평상심이라 할 것이다.

이는 도반산행에서
나비기공하며 체기권을 하는 중에
중간 중간 합장하고
몸을 관찰하며
통증이 느껴지는 곳 검게 보이는 곳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을 따라
움직이며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심하게 마음이 요동을 칠 때
합장을 하고 요동치는 마음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요동치는 것을 하나 하나 관하여 보라.


그러면 어느 덧 나는 마음작용하는 곳에서
마음작용을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작용하는 것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이렇게 전도된 주객이 자리를 잡고 바라볼 때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은 객에 지나지 않기에
마음작용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마치 합장하고 자기 자신의 몸을 전체를 관찰하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 안에서 움직이며 일어나는 마음작용을 바라보는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것이 잘 되지 않을 때
연습으로 합장하고 몸 전체를 자꾸만 관찰하라



그래서 관찰이 잘 될 때
자기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의 주에서 흔들림 없이
객으로 마음작용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2005. 08. 05 07:02




남에게 충고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은 어렵다. 남을 충고하기 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하여 노력하는 하루가 되세요..()
2006. 09. 20 08:55 칠통 조규일




내가 맑고 향기로우면 주변이 맑고 향기롭고 주변이 맑고 향기로우면 주변 사람들이 맑고 향기로워서 온 천지가 맑고 향기롭게 되지요...맑고 향기롭게 주변과 주변 사람들을 맑고 향기롭게 함과 천지를 향기 가득 맑게 하는 하루되세요..()
2006. 09. 19 07:43 칠통 조규일


이렇게 깨달음은 이루어진다. / 칠통 조규일




이렇게 깨달음은 이루어진다.

본래 하나의 한 물건은
자기 스스로 깨쳐서 쓸 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도 전하지도 못하는 것이지만
자기 스스로 깨지는 경험을 통하고
본래의 하나의 한 물건을 보게 되는 체험을 통해서
확실하게 하나의 한 물건을 보고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깨달음
인식하고 의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사물을 보고 그 사물을 아는 것처럼
자기 안팎으로 있는 하나의 한 물건을 직접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보고
눈앞에 사물을 보고 사물을 알고 구별하듯
하나의 한 물건을 확연히 알게 되는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럼으로 깨달음의 순간에는
자기 스스로 자기가 깨지는 행위가 있게 되고
이 깨지는 행위를 통하여
눈을 뜨고 있음에도 보지 못했던 하나의 한 물건을
눈을 뜨고 있음에도 깨지지 않았던 것이 깨짐을 통하여
또 한번 더 눈을 뜨게 되고 한번 더 눈이 뜨게 된 눈을 통하여
자기 스스로 직접 눈으로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눈으로 보게 된다.

이렇듯
자기 스스로의 눈을 통하여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더 이상 하나의 한 물건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생길 수도 없다.
확연하게 보지 못했을 때야 이런가 저런가 하겠지만
확연히 스스로 보게 되면
그 누구에게 확인 받을 필요도 없이
하나의 한 물건을 본 것이고 봄으로 인하여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찾고 찾았던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웃는 것이다.
그리고 기쁨과 환희에 본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본 그대로 문자로 표현해 놓는 것이
바로 오도송이다.

그대는 그대가 눈앞에서 본 것에 대하여
그 누군가 그것을 보고 말한다면
그것을 어느 각도에서 보고 표현한다 할지라도
그대가 눈앞에서 본 것에 대하여 표현을 하고 있는지
또는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는지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확연히 알 수 있는 오도송을
거짓으로 짓고 그것이 오도송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고
또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역대 고승들의 오도송을 보면
오도송 아닌 것도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전해져 내려가고 있으니
이는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 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끓어지고 전해지지 않는 그 순간까지
많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될 것이며
욕되게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이들이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한 하나의 한 물건을
의심할래야 할 필요 없이 확연할 것이며



누가 너는 보지 못했다고 해서 본 것이 못본 것이 되지 않고
직접 보지 못한 하나의 한 물건을
본 듯 아니본 듯하여 미심쩍어
누구에게 물어보았을 때
대답하는 이가 보았다 하여 본 것이 아니다.
누가 너에게 보았구나 하였다 하여 보지 못한 것이 본 것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깨쳐서 직접 눈으로 확연히 보았을 때 진정 보았다 할 것이다.
이렇듯 확연히 본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도 없다.
하나의 한 물건을 본 것이고 깨달은 것이다.

오래 전부터 비유한 말이지만
주전자가 있다고 했을 때
이를 본자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도 안다
주전자를 말하고 있는지
그런데 주전자를 보지 못한 사람은
주전자를 아무리 잘 설명해 주어도
주전자를 말하고 있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주전자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주전자를 설명하면
아무리 주전자를 잘 설명하려고 해도 어긋나기가 쉽다.
그 어긋남으로 인하여
이미 주전자를 본 사람은
저 사람이 주전자를 말하려고 하는 지는 알지만
주전자를 보지 못한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남대문 가보지 않은 사람이
남대문에 가본 사람 보다 더 설명을 잘하고
남대문에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 진다는 말이 있듯
이쪽 역시도 다반사다.

지금까지 많은 말을 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깨달음은 체험과 경험을 수반된다 하겠다.



그냥... 우연히...무상태...어떤 상태가 되더라...어찌 되더라...
어찌 되었다가가 아니라....
깨달은 직접 하나의 한 물건을 보고 확연히 알게 되는 것이지.
어물쩡하게 보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어떤 것을 볼 때
보는 것에 대하여 본 것에 대하여 더 이상 의문이 없는 것처럼



한 번 보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 언제든지 보려고하면 볼 수 있는 것을
의문이나 의심이 있겠는가?



이렇듯 직접 보고 알게 되는 것이고
그 속에 본인도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견성할 때
은백색의 빛을 보고
전체가 은백색으로 빛나고
빛으로 빛 속에 있게 되는 체험과 경험을 하듯



이 깨달음 역시도 직접 하나의 한 물건을 보고
하나의 한 물건으로 하나의 한 물건 속에 있는 지를 알게 된다.



그렇다고 인식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나 것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을 인식하고 의식한다.
확연히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견성할 때
빛이 빛속에 있게 되고
빛이 빛을 인식하고 의식한다고 하니까.
말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라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험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이들이 하는 말이고



내가 말한 것처럼
견성할 때 빛이 빛속에 있게 되고



깨달음할 때 역시 하나의 한 물건을 보고


하나의 한 물건으로 하나의 한 물건 속에 있는 지를


보고 알게 되는 체험과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듯 깨달음 이루어진다.

2005. 08. 07 06:30



오직 무량광(無量光)만이 있다. / 칠통 조규일


오직 무량광(無量光)만이 있다.
오직
무량광만이 있다.

본성이 있고
부처님이 있고
하나님이 있고
주인공이 있고
내가 있다.
다른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무량광만이 있다
우주가 있고
삼라만상이 있고
산하대지가 있다.

지금
어디를 걷고
어딜 가고 있고
무량광 속 자등명이 ....

지금
무엇을 보고 있지
무량광 속 자등명이...

무량광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없는데...
저것들은 뭘까?

2005. 08. 13 08:34



무명의 때와 옷을 벗어야 한다. / 칠통 조규일


녹이 쇠에서 나서 다시 그 쇠를 녹슬게 하듯이
악도 역시 사람의 몸에서 나서 다시 그 몸을 망친다
행실이 옳지 못한 것은 마음의 때요
물건을 탐하는것은 보시(자선행위)의 때요
악한 행동은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의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보다도 더 심한 때는 무지의 때이다
이 무지의 때를 씻어 버리지 않으면
영혼의 새벽은 오지 않는다
***** 법구경 *****

수행 정진하지 않고
무지의 때를 씻어 버릴 수 없고

수행 정진하여 가지 않고는
밝은 광명이 오지 않는다

어둠을 뚫고 지나야
광명의 아침이 오듯

수행 정진을 통하여
자등명을 덮고 있는
무명의 때와 무명의 옷을 벗어야 한다.

행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과

무명을 뚫지 않고는
자등명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니

깨어서 시작하라.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
수행 정진하라.

2005. 08. 15 08:08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움직입니다" / 칠통 조규일


좌선할 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움직입니다"


보고 듣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단단히 붙어 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갖 사물들을 보면서
형태의 형상 사물 그대로 보는 거지요. 흔들림 없이...

수행이라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관하면서 마음을 정리 정돈하는 과정에서
수행이 깊어지고 깊어지면서
마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집착의 마음에 붙어 있다가 떨어지기 위해서 또는 느슨해지기 위해서
수행 중에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좌선 수행 중에
잠시 잠깐 또는 오랜 동안
수행할 때마다 한동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마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것들이
수행을 통하여 떨어져 나가면서 그러는 것이니
그 와중에도 열심히 수행 정진하시면
보이는 사물들이 흔들리고 또는 흔들리면 사라지고
사라지는 곳으로 온갖 형태의 형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며
산과 들 강을 지나고 구름이 쏜살같이 지나고...
마치 세월이 쏜살같이 흐르듯 지나가지요.
그러다가 고요해지면서 뚜렷해집니다.
뚜렷해지면서 이제 청정한 본래의 마음자리에 이르고
더욱 더 관(觀)함으로 해서 마음자리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지요?

그런 만큼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움직입니다" 하는
흔들리는 자체로 보면 습과 업이 떨어져 나가기 위한
마음이 자리를 잡기 위한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외에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움직이며 흔들리다가 흐려지고
흘려지면서 흔들려 보이던 모든 사물들이 더욱 더 흐려지고
점점 사물은 사라지고 보이는 모든 것들은 점점 뿌옇게 변해가고
마침내 사물은 없어지고 뿌옇게 흐려지다가
점점 은백색으로 변하게 되고
보이는 모든 것이 형광등 불빛 같은 은백색의 빛으로 변하고
하고 이상해서 수행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자기 자신도 은백색의 빛으로 빛나고 있고
빛이 빛 속에서 빛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빛이 빛 속에 있다고 하여
내가 사라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나는 전체가 은백색의 빛 속에서 빛으로 보이되
빛으로 있는 나는 나를 생각하고 의식을 하고 인식하고 있고
그럼에도 빛을 보고 빛 속에 빛으로 있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도 마음 자리를 본 것으로 깨달음 아닙니다.

수행 정진
오직 한 소식 돈오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아가는 길에
돈오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듯
이외 많은 풍경을 보고 체험 내지는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것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오직 한 소식 돈오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쉬지 않고 수행 정진해 가야할 것입니다.

제가 누차 말하지만
다른 분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깨달음을 얻지도 않았으면서 얻은 척하는 이들의 잘못된 언어에 놀아나지 말고
돈오의 깨달음은 누구에게 확인 받을 필요도 없이 스스로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일체를 보고서 너무나 어이없어 박장대소하며 기뻐하며
아! 이것이 돈오의 깨달음이구나 알 수 있을 때까지 수행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도 앞에서 말한
수행 중 빛이 빛 속에 있는 체험과 경험을 하고
수행하는 분들에게 물었을 때
깨달으셨군요..했지만...스스로 아니다 싶어서...
계속 수행 정진하던 중....덜커덩 꽝 소리에...
눈을 뜨고 있음에 또 한 번 더 눈을 뜨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확신이 듭니다.
더 이상 깨달음이니 돈오니 하는 것에 의문이 없게됩니다.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수행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2005. 08. 18. 08:58





어떻게 마음을 세수하고 목욕시킬까? / 칠통 조규일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세수를 하고 치장을 하고 옷을 입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육체를 위해서 몸에 치장을 하고 멋을 부르면서도
육체 보다 더 중요한 영혼을 위해서
그대는 무엇을 합니까?

그대 안에 있고
그대가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그대가 행하고 쓰는 모든 것이
모두 다 마음에서 작용하여 몸으로 옮겨져서
몸으로 쓰고 행하는지를 알면서도
몸으로 드러나는지를 알면서도
가끔은 마음에서라기보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지만
눈에 보이는 육체를 위하여 멋을 부리면서도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대 마음을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어떻게 하면 마음을 정리 정돈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육체가 세수하듯 목욕하듯
마음을 세수하고 마음을 목욕시킬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마음의 멋을 부르고
그 마음이 육체 밖으로 나타나게 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그대 마음은
그대 안에서 작용을 일으키고
(밖의 작용에 대상에 대응하여 또는 안의 작용에 대상에 작용하며)
생각으로 의식으로 인식으로 그대 안에서 작용하고
작용하는 것들이 그대 마음에서 작용하고
작용하는 마음에서 일어난 것들을
몸 육체를 통하여 드러내고 나타나며 행하고 있지요.



그대 안에 너무 많은 그대가 있는 듯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지요. 그대 마음에서...
그럼으로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작용하고
마음이 작용함으로 희노애락이 생멸하는
마음을 그대는 어찌해야하겠습니까?

2005. 08. 19 11:16



241122 금요법문-이 위 새로운 신성에너지 세계 같은 본성 세계를 밝혀 올라와 끝(30) 본성까지 올라오도록 쏴주고 모두를 이롭게 하라는 향출 빛천 꽃꽃황 출빛 천이 되도록 하며 일이 해결되도록 향출 향빛을 밟도록 하고 천향빛 꽃천 빛꽃성 빛향 천이 되어 올라가도록 쏴주었다.
혼에 대해 이야기하다.


법문 중에서
: 선사님 그러면 꼬인 곳을 또 푸는 곳이 있잖아요? <김래>


아니그러니까 그게 이제 수술이라는데 집도해서 한다잖은가.


김래: 아니또 그...


선사님: 그것은 또 다른 거고.


김래: 아니다른 건데요제가 거기서 이제 우리 식구를 의념을 해보니까 몸에서 꼬인 줄이 이렇게이렇게 굵게 해서...


선사님: 그것은 이제 우리가 이렇게 해가지고 자기 하는 일이 잘되게 하는 곳계단 내려와서 여기가 그런 거 아닌가그러니까 이게 현실의 일이 꼬인 거 그다음에 전생의 업들이 꼬인 거이런 것들이 풀어지는 곳이다.


김래: 굵은 줄이 이렇게 꼬아진 줄이 이렇게 몸에서...


선사님: 풀어지는 거고 그건그러니까 이게 꼬인 게 풀어지는 곳여기는<소나무의 대리석뭐 했는가영적 수술영적이 꼬인 것그게 꼬인 게 뭐라고 그랬는가아까 뭐라 그랬는가영과 혼신 이런 부분들이 꼬여 있는 것들을 수술한다고 그랬잖은가그러니깐 다른 것이다.


김래: 다른 건 아는데요이렇게 줄이 몸에서 나와 있으니까 신기하더라고요.


선사님: 아이여기서는 그러니깐 자기도 모르게...


김래: 우리 식구들 넣었더니 몸에서 줄이 막 이렇게 나와요그래서 공중에 이렇게 떠 있는데 온몸으로...


선사님: 그러니까 이제 풀어지는 것이다.


김래: 굵어가지고.


선사님: 그러니까 굵으면 굵을수록 잘 안 풀리는데 어쨌든 굵은 것들이 풀어졌다라는 것은 뭐 그만큼 본인한테 좋은 것이다.


: 천상빛문길 있는 데 거기 이야기하는 거죠?


김래: 그래서 그게 짚으로 된 거 있잖아요짚으로 된 새끼줄도 나오고 명주실 같이 하얀 줄도 이렇게 나오고 해서 종류도 달라요.


선사님: 그건 이제는 우리가 예를 들어 어떤 걸로 꼬여 있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다예를 들어서 뭐 그렇잖은가꼬인 게 뭘로 꼬였느냐는 우리가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꼬여져 있는 것들이 풀린다는 것이다뭐 한 번에 다 풀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 풀어진다라고난 이 얘기해서 여러분들한테 얘기해준 것이다그러니까 그건 여러분들이 가서 거기서 풀고 안 풀고는 저기지만 어쨌든...


: 저희들 몫이네요?


선사님: 그렇다.




: 선사님그러면 우리 현실에서 꼬여 있는 게 원만하게 풀어지는 것도 되지만 영적으로도 과거에 이렇게 됐던 것들도 다 풀어진다는 이야기입니까? <>


이건 영적으로 얘기하면 안 된다업으로 얘기해야 된다업도 풀어진다어느 부분은 누구와 누군가에 얽혀 있는 업.


: 얽히고 설키고 한 업도 풀어진다!


선사님: 그렇지그렇다그렇게 보셔야 된다영적인 건 자기에 한한 것이다아까 얘기한 거기는 영적 수술하는 건 어떤 A라는 사람 한 사람한테 있는 것이다그러니까 누구하고누구하고 이게 아니라관계 속에서 있는 일이 아니고여기는 꼬여있는 것은 관계 속에서 풀어지는 거고.


: 그러니까 천문성빛길 있는 데는 꼬인 업도 풀어진다!


선사님: 그러니까 이렇게 질문하다 보면그죠?


김래: 이거 정리하다가 못 올렸거든요잠들어 가지고^^.


: 선사님요번에 보면 우리 도반님들 중에 어느 분이 질문했는지 모르지만 영적 미아 있잖아요영적 미아 보내는데 뭐 우리가 복제 못 되고 하는 그런 것도 보내야 된다고 그랬고그죠?


: 영적 미아가 아니라 천도를 다 못 시키는 걸... 다들 천도를 하려고 하는데 천도를 안 시킨다고 그랬잖아요따님이그래서 거기서...


선사님: 그것은 자기 조상님들왜냐하면 어쨌든 간에 나하고 인연되신 분들 또 조상님들을 천도를 하고 내 주변에 있는 분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천도를 하고 이러면 자연스럽게 내가 좋아진다는 것이다나 욕심만 갖는 게 아니라.




: 그러면 무생물 나오고 그런 부분들 천도하는 것은... <>


그러니까 무생물까지는 안 치는 것이다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쉽게 얘기하면 인간 천도그다음에 동물 이 정도아니고서는 뭐 동물 그다음에 바다생물육지생물까지 해주면 더 없이 좋다고 그런다근데 가장 먼저는 자기하고 인연된 조상천도가 첫째다그다음에 이제 자기 안팎에 걸려있는 주변에 있는 또 인연되신 분들 그다음에는 아까도 얘기한 동물 천도니 뭐 이런 분들이렇게 이루어져야지 어떻게 되는가내가 깨끗하니까 깨끗한 만큼 뭐 없는 만큼 걸림이 없는 것이다그러니까 어떻게 되겠는가자연히 내가 좋아질 수밖에 없잖은가편안해지고행복하고마음도 편안하고걸림이 없으니까. 이렇게 보면 된다그런 부분은이건 영적 미아하곤 또 다르다.


: 아니그러니까 영적 미아가 덜 된 부분이 있다고 도반님이 질문한 게 있어가지고...


선사님: 영적 미아는으흐흐흐흥.


: 선사님 보내주신 것 중에 빠진 게 있다고 그래가지고...


선사님: 여러분들이 이생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전생수많은 전생을 생각하면 영적 미아가 여러분들과 인연되신 분들이 지구에 있을 때만 2곳이 아니라 명스즘샷에서도 3곳 있고가상현실에도 20개 있다그러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보냈을 거 같은가내가 해줬으면 얼마나 어디까지 해주고내가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거 다 한다고 다 가겠는가한 번에-대 안 되는 것이다근데 어떻게 이걸 한 번에 할 생각을 하는가됐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그건그죠?


: 나머지는 저희들 몫입니다.


선사님: 그런 것이다.


: 맞습니다알겠습니다.


선사님: 그러니까 뭐든지 한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자기가 내 스스로 아는 만큼 해 내야지 되는 것이다. 안 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내가 백날 여러분들한테 알려줘도 뭐하겠는가실천을 안 하면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내가 여러분들한테 알려주고 내가 해주고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더 했을 때 시너지 효과가 나면서 그다음엔 여러분들이 또 하려고 했을 때 내가 힘만 조금만 보태줘도 쉽게 하지만 내가 하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꼼짝을 안 하면 뭔가미동을 안 하는 것이다돼야 거기에 동요하는 몇몇만 된다고 이렇게 보시면 된다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그럴 마음을 내야지 냈을 때 내가 해줄 때 더 잘 되는 것이다그러니까 여러분이 생각해보라여러분들이 뭘 쥐고 있다잡고 있는데 이걸 안 놓으려고 한다그럼 내가 이걸 무슨 수로 뺏으려고 하겠는가보내려고 하고그러니까 내가 그런 작용을 해주려고 했을 때 여러분들이 쥐고 있는 걸 놔야 된다그래야지 내가 해줄 수 있는 한 해주는 거잖은가근데 해주려고 했는데 쥐고 있다. ‘나 뭐무슨 소리’ 이래버리면 내가 무슨 재주가 있겠는가아니힘준 사람이 쥐고 있으면 여러분들은 이거 펴겠는가절대 안 되는 것이다그러니깐 늘 내가 여러분들한테 얘기하는 건 뭐냐면 여러분들이 뭐해야 된다했을 때 믿고 해야지 된다놔야지 된다그래야 내가 해줄 수 있는 만큼 해주고 그래도 안 됐을 때 여러분들이 또 하고 이렇게 돼야지 된다근데도 나는 해주려고 했는데 딱 쥐고서는 아냐’ 뭐 이렇게 해버리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해봐야 별 효과가 없다라는 것이다해줘도그러니까 그것은 내 몫이 아니다나는 해주고 싶어도 여러분들이 그렇게 안 저기되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그러니까 자꾸 내가 여러분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여러분들이 예를 들어서 나한테 돈 1달에 30만 원 주고 이렇게 하지만 여러분들이 그런 부분을 놓고서 하면 뭐 몇 억몇 천억을 여러분들이 이렇게 가져가는 거지만 아다 그거 쥐면 30만 원이 아니라 돈 10만 원도 아니돈 천원도 못 가져갈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그러니까 와서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 나한테 왔을 때는 마음 열고 할 수 있는 한 놔야지 된다는 것이다그래야지 만이 내가 여러분들을 통해서 해줄 수 있는 한 여러분들이 그만큼 뭐할 수 있다좋아지고 또 여러분들하고 인연되신 분들을 보낼 수 있다라는 것이다그러니까 제가 백날 여러분들한테 설명해도 소용없다여러분들이 동요를 안 하면같이 움직여서 같이 저기를 해줘야 되는 거지그건 이제 여러분들 몫이고 나는 늘 뭔가제가 여러분들 해줄 때는 뭐라고 얘기하는가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한 다 해준다그렇지만 되고 안 되고는 내 몫이 아니다다 여러분들 몫이다금방 얘기한 것처럼그런 부분이다만약에 여러분들이 나한테 와가지고 뭐 다 놓고서 막 다 그렇게 보낸다라고 해보라어디 가서 몇 천만 원몇 억 들여서 해야 될 거그냥 돈 줘도 못 할 거 다 해결하니까 얼마나 좋은가근데 그것을 여러분들이 꼭 쥐고 안 저기하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방법을 알려줘도 안 되는 거고그렇잖은가!


김래: 이건 질문은 아니고 어떻게 보면 소감이나 감사함 뭐 이런 건데요아까 태중의 아이 그 얘기를 처음으로 조심스러워서 이렇게 제가 예의를 지킨다고 거부하고 있던 마음의 문을 열었더니경험을 딱 하고 나니까 좌선 시간에 에너지를 받는데 눈물이 나왔어요^^. 그래서 새로운 앎의 기쁨과 또 제 생각보다 오히려 제가 마음의 문을 열었더니 같이 좋아해주는 그런 게 너무 행복감을 느꼈거든요.


선사님: 그럼 당연하다.


김래: 그래서 눈물이 저는 오늘 뭘 쏴주시는지도 모르고 신성에너지가 있는 줄 몰랐는데 제가 눈물을 흘렸잖아요그러니까 눈물이 이렇게 볼을 타고 여기 이렇게 막 맺혔는데 뭐가 보였냐면 아이들하고 어른들이 제가 이렇게 흘린 눈물의 강에서 세수를 하면서 세신<洗身>을 하고 있는 거예요인도 갠지스 강처럼그러면서 저의 깨우침에 그런 눈물이 자기들을 또 이롭게 하고 있다고고맙다고...


선사님: 그게 이제 정화의 눈물이라고 하는 것이다정화의 눈물눈물은 그래서 어떤 눈물을 흘리느냐에 따라서 그 눈물이 정화를 시킨다고 하는 것이다그러니까 나도 정화를 시키지만 보이지 않는 쪽도 그 눈물을 지금 얘기한 대로 그렇게 하면 자기네들을 정화시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김래: 너무 감동적인 체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행운이가 큰 역할 했다하하하.


김래: 감사합니다.




: 선사님제가 3차원이나 뭐 이런 지구에서의 어떤 업에 대한 것을 참회하고 이러는 과정에서 너무 좀 어렵고 좀 힘든 과정이 있었는데신성에너지 세계를 선사님이 밝혀주시고 그 세계에서 선사님이 그 세계의 이름 중에 업빛업천그런 세계 이름 속에 그런 게 있어서 제가 저도 이제 그런 거를 저의 업에 대한 어떤 그 세계에서 이제 업이 빛이 되고 업이 천이 되고 이런 거를 제가 해봤을 때 그게 지금 어떤 참회나 뭐 이런 걸 들여다보고 이런 걸 하지 않았음에도 그게 이루어졌다는 그런 거는 어떤 작용일까요? <>


그런 건 다른 게 아니다왜냐하면 A라고 하는 세계, B라고 하는 세계예전에 보면 이제 생명에너지 세계신성에너지 세계이게 하나의 통로다올라오면서통로의 세계라고 보면 된다예를 들어 이 밑에서 보면 빛에너지 세계가 있고 기에너지 세계 있고 생명에너지 세계가 있고 신성에너지 세계가 있다이렇게 쭉 통과해서 올라오잖은가단계로는 빛에너지가 20, 21, 22, 23, 24. 이렇게 단계다근데 이렇게 딱 통과해 올라오면 여기 이 생명에너지 세계는 나의 부족한 생명에너지를 채우지만 신성에너지를 통과하면 나한테 붙어있는 걸 뭐하는가다 떨어뜨리는 것이다그러면서 통과해 올라오는 것이다그러니깐 밝혀 드러낸 그런 세계들지금 업천이니 업빛이니 이런 세계도 그냥 거기가 그런 게 나오는 게 아니라 생명에너지신성에너지 세계가 그랬던 것이다그러니까 거기를 통해서 올라오면 자기도 모르게 뭔가떨어진다는 것이다그게 떨어져야 이 위에 올라오니까그러니까 여기서도 전에도 얘기했잖은가이게 신성에너지 세계... 이제 생명에너지 세계는 없어도 되는 저기다그러다 보니까 이제 신성에너지 세계만 나온다고 얘기했잖은가그럼 신성에너지 세계가 나오는 이유는 뭐냐여기에서도 업이 있으니까 여기를 올라가려고 하면 이 세계를 걸쳐서 뭐해야 된다업을 떨어뜨리고 가는 것이다그러니까 본인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위로 올라가려면 이 세계에 걸쳐서 이 세계까지 있는 업을 떨구어 내는 만큼 올라가는 것이다그게 이제 본인은 그것을 알아차린 거고다른 사람은 못 알아차린 것뿐이다차이는올라온 사람이라고 하면그렇게 보면 된다.




: 아래 세계에서는 너무 힘든 그 업을 내려놓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


그것은 왜 그러냐면 아래 세계에서의 업을 내려놓는 것은 달라붙어 있는 이들을 어떻게 해줘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근데 이제는 나한테 얘기는 아까 그런 얘기를 했을 때 또 있는데요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나를 놓지 못하면 이런 것들도 쉽게 되지 않는다나를 놓은 만큼 쉽게 된다’ 그러니깐 쉽게 말해서 아래 세계에서 그렇게 한 것은 예를 들어 나하고 인연되신 분들이 나를 잡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그들을 잡고 있어서도 그럴 수 있다라는 것이다위에서도 마찬가지고그러니깐 나라고 하는 걸 놓기만 하면 어디를 이렇게 해서 올라가더라도 놓은 데서 놓은 만큼 뭐한다쉽게 내려놓고 갈 수 있다그러니까 어디든 간에 밑이든위든 간에 내가 나를 놓지 못하면 어렵다더군다나 내가 놓지 못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놔주기를 바란다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내가 나 먼저 놔야 상대방도 놓는다라는 것이다그러면 둘 다 놔지면 올라가기도 더 쉽고그러니까 늘 얘기가 뭔가나를 놔라내가 없다뭐 이런 얘기 늘 하는 거잖은가.


: 아니저는 선사님이 그 세계를 밝히면서 이제 올라오는 분들의 업을 사해주셔서 업빛하면 이게 이렇게 빛이 돼가지고 흩어지고 업천하면 천이 돼가지고 막 이렇게 되는 줄 생각을 좀 했었거든요.


선사님: 예를 들어서 그러니까 내가 놔줬을 때내가 나를 놔줬을 때인연자들이 나를 잡고 있는 걸 놨을 때그럼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근데 놓지 않았을 때는 아까도 얘기했잖은가내가 놓은 만큼인연자가 놓은 만큼 이루어진다라는 것이다잡고 있으면 잡고 있는 만큼 어려운 거고그렇게 보시면 된다여기서는<보이지 않는 쪽> ‘또 있습니다선사님!’ 그러기도 한다그건 뭐냐면 자기 스스로가 끌어당기질 않아야 된다고 그런다왜냐면 자기 자신을 끌어당기는 건 뭐냐면 그런 상황이 맞닥뜨렸을 때 내가 잘 되려고그러니까 내가 없다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무엇인가 잘하려고잘 되려고 하는 것도 끌어당기는 거란다그냥 흐름에인연에 맡기는 게 아니라그러니까 밑에서든 위에서든 그냥 흘러가는 흐름인연에 맡기고서 나를 놓으면 저절로 떨어진다고 그런다근데 예를 들어서 그러지 못하고 나는 놨다라고 얘기하면서도 어떤 욕심을 갖는다든가 이랬으면 그것이 또 끌어당기는 역할을 한다라고 얘기를 한다인연에 맡기면 모든 것들이 내려놓기가 쉽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한다나를 놓고뭐 또 있는데라고 얘기하는데 이건 또 이상한 얘기한다허헝그래서 이건 얘기를 안 하련다이게 누군데 이렇게 얘기하나해주란다스스로가 놓기가 어려우면 나한테<선사님의지하면 또 놔진단다믿고 의지하면이 얘기를 해주라고 그런다.




: 근데 선사님위 세계에 올라가면 저희가 그 위 세계에 제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데 또 그거에 하는 게 있을까요? <>


그러니까 여기서는 이제 하는 게 인연에 의해서 그냥 이루어지고 가야 되는데 욕심이라는 게 뭔가수행도 욕심이 있어야 한다라고 얘기하는데 왜수행하려고 하고 이렇게 돼야 되는데 이 위에 오면 그것까지도 필요 없는 것이다그럼 뭐가 필요하냐그냥 위에서 하라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그러니까 나 같은 경우도 뭐하는가요즘은그냥 쉬라고 하면 쉬고밝히지 마라고 하면 안 밝히고어떤 때는 그렇게 하면 뭐라고 얘기 하냐면 이게 밝히는 게 몇 시까지 해야 되는 게 있다그러면 시간이 그냥 오전에 다른 거 못하게 한다밝히지도 못하게시간 딱 돼서 딱 밝히라고 하고그럼 어떠냐면 시간 있으면 그때 시간 쓰고 밝힙시다’ 이런다근데 어떤 때는 될 때가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될 때가 있다근데 내 입장에서는 막 밝혀가고 싶다그렇잖은가시간도 많고근데 안 그런다그러면 뭐 하겠는가할 일 없으면 왔다 갔다좌선도 했다가누웠다 이러는 것이다그리고 이제 밝히자’ 이러면 밝히는 것이다그러니까 지금은 많이 밝혀야지가 없다밝히라고 하면 밝히고그만하라고 하면 그만하고 이러는 것이다그리고 오늘 쉬십시오그러고 이따 만치 또 밝히십시오’ 그러면 또 밝히고그러니깐 그냥 지금은 그런 것까지도 이제 여기서<보이지 않는 쪽얘기가 그거다. ‘이제는 여기까지 왔으니까 수행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다. ‘죽으면 다 가니까’ 이렇게 얘기한다.


: 하긴 악바리처럼 했네요제가~진짜.


: 수행하려면 욕심조차도 버리라는 얘기네요그죠?


선사님: 그러니까 어느 정도 와서는넘어서 까지는.


: 선사님 경지만 그렇고 우리는 해야 되네요욕심 있을 때.


: 우리는 뭐 열심히 해도 부족한 판인데.


: 선사님 경지에 왔을 때 그렇다는 거죠.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