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여(一如)는 돈오(頓悟) 즉 깨달음의 여여(如如)가 아니다. / 칠통 조규일 수행자가 수행이 많이 되어야 일여(一如)로 수행이 된다. 수행과 수행자, 수행의 행과 육체의 행, 의식의 잠재의식의 무의식의 식(識)과 수행의 깨어있는 의식의 식(識)이 하나로 이루어지는 하나로 행해지는 수행을 일여(一如)의 수행이라고 하고 일여(一如)로 행해지는 수행이 어느 때 행해지느냐에 따라 행해지는 각기 다른 이름과 일여(一如)의 수행이 하나로 합하여져 이름하니.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란 이름아래 수행이 일여로 이루어진다고 일여(一如)가 돈오(頓悟), 혜오(慧悟)의 깨달음이 아니고 깨달음 이후가 아니고 돈오의 깨달음 이전으로 수행자가 수행 선상에 있는 상태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늘 일여(一如)로 수행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수행 중 몸이 피곤하면 몸(육체)은 잠을 재우고(쉬게 하고) 의식은 깨어 깬 의식으로 일심 일념 일여(一如)의 수행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이루어지는 수행이 숙면일여(熟眠一如)의 수행이고 숙면일여(熟眠一如)의 수행 중 깨어서 꿈이라고 말하는 꿈속에 현실에서도 일여(一如)로 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을 몽중(夢中)에도 일여(一如)로 수행이 된다 이루어진다 하여 이를 몽중일여(夢中一如)의 수행이라고 하나 이 역시 수행 선상에 있는 깨달음을 향해 있는 나아가는 길의 일여(一如)다. 즉 일여(一如)는 수행이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고 깨달음은 돈오(頓悟)라 하고 돈오(頓悟)하고 보니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깨달아 있으니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니. 있는 그대로이고 있는 그대로 인가하면 여여(如如)한 가운데 오는 것이 있으니 이를 여래(如來)라 한다. 깨달은 자를 부처라고도 하고 여래라고도 한다. 여래(如來), 깨달은 자(覺者)는 일여(一如)에 있는 자가 아니라 여여(如如)에 있는 자이고 여래(如來)에 있는 자이다. 즉 여여(如如)는 깨달음의 상태 즉 깨달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에 있어서 일여(一如)와 깨달음에 대하여 좀더 이야기하자면 수행이 깊어져 일여(一如)로 수행이 이루어지면 일여(一如)로 수행이 이루어지니 조금만 더 수행에 매진하면 일심 일념이면 조금만 더 하면 깨달음을 얻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때 이 생각이 들면 출가한 분이나 출가하지 않은 분이나 조용한 곳(장소)에서... 어느 토굴에 들어가.... 혼자서... 홀로 몇 날 며칠 몇 달이 되었던 한 소식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아무런 거리낌없이 수행에만 매진하고 싶어진다. 그래서인지 많은 분들이 이때가 되면 하고 싶은 대로들 한다. 출입이 불과한 토굴에 들어서 음식만을 전해 먹는다던가... 때로는 음식을 먹는 때를 잊기도 하고... 대소변 역시도.... 기간을 정하고 들어간 분들은 기간 안에 못 이루고 나오기도 하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아....스스로 나오기도 하고... 한 소식하고 토굴을 박차고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는 수행... 하던 수행 계속적으로 수행해 나가면 일상에서 유무형 소리에 눈을 뜨게 된다. 이제 이를 좀더 이해하기 쉽게 비교 설명한다면 여기 풍선이 있다. 수행을 통하여 풍선 안에 바람(기운, 에너지)을 불어넣는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갈수록 풍선은 부풀어오르고... 부풀어오르는 동안 잠시 잠깐 쉬면서도 분다. 이제 부풀대로 부풀어 어느 한계점을 지나면 이제는 연속적으로 불어야 한다. 연속적으로 불지 않으면 한계점 넘어서 있지 않고 한계점을 넘었다가도 다시 한계점 이하로 떨어지니 계속 불어야한다. 계속 불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바람불기 수행을 통하여 호흡이 깊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한계점에 이르면 연속적으로 불 힘이 생긴다. 즉 수행이 일여(一如)로 행해진다. 일여(一如)로 행해지되 일여(一如)로 행해지는 수행으로 풍선이 부풀어올라 한계점을 지나 터지는 터져야 하는... 즉 한계점을 지나 터지는 순간(깨달음의 돈오)까지 일여로 행해진다. 조금만 더하면...바로 터질 것 같은.... 조금만 조금만 더....느낌이 들고 생각이 든다. 터질 듯 터질 듯하면서도 터지지 않으니. 이제는 전념하기 위하여 혼자 있을 장소(토굴)를 찾는 것이다. 풍선이 부풀어올라 그 한계점을 지나 풍선이 터지는 순간까지 한계점과 터지는 순간 사이에서 팽팽히 맞선다. 무엇이 풍선을 이루는 고무질의 탄력성과 풍선을 벗어나려는 풍선 속 기운과.... 풍선 속 바람(기운 힘 에너지)이 풍선의 고무의 탄력성을 헤할 때까지... 뚫을 때까지...넘어설 때까지 팽팽히 맞선다. ...무엇으로 일여(一如)로.... 그러다 터진다. 터지니 돈오(頓悟, 깨달음)다. 풍선에 바람넣기는 수행이고 풍선은 업으로의 육체다. 수행을 통하여 바람을 넣으므로 업이 소멸되면서 부풀어오르고 부풀어오르며 풍선의 한계점과 터지는 한계점 사이서 팽팽히 맞선다. 안팎이 구별되어 하나의 원을 이루니. 하나로 일원상이다. 팽팽히 맞서다. 터졌다. 터지니 돈오 깨달음의 순간이다... 풍선이 안팎 없이 하나가 되었다.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다. 있는 그대로 있되 여한 상태로 흐르니 여래(如來)다. 의식 헬츠의 수치로 보면 일여(一如)로 수행되는 수행자 대부분이 의식적으로 550 -600헬츠 사이 의식을 가진 분들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400 - 550헬츠 사이 의식의 수행자에게도 종종 일여(一如)의 수행이 이루어지나 이때 일여(一如)로 행해지는 수행으로 토굴 및 혼자 있는 곳을 찾아 들어 수행한다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그냥 다시 나오는 이들이 이에 속한다 할 것이다. 550 - 600헬츠 사이 의식을 가진 분으로 일여(一如)의 수행 중 토굴 및 혼자 있는 곳을 찾아 수행한다면 거의 다 깨달음을 얻고 나온다할 것이다. 깨달음의 의식적 수치는 600헬츠 깨달아 의식적으로 본성 진리를 보려면 600헬츠를 넘어야 하니. 견성(見性)은 의식적으로 600헬츠 우주의식이되 깨달은 자가 아니고 견성한 자요 깨달은 자는 600헬츠 우주의식으로 깨어지고 깨어져 깨어나 보니. 깨달은 자는 의식적으로 600헬츠를 넘어선다. 넘어서 우주의식 본성 진리를 보고 오도송을 읊으니 오도송은 600헬츠를 넘어선 수치를 나타낸다. 2002. 8.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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