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에 질문에 대답한 글..

화두의 심천이 있는 것인지요?

칠통漆桶 조규일 2007. 6. 21. 10:07


화두의 심천이 있는 것인지요?  / 칠통 조규일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저의 작은 질문에 대한 대답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삼배하옵고 몇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의 참선법은 현재 간화선을 주로 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젊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관법이나 위빠사나 등을 도입하는 등 수행의 방법이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수행을 주장하시는 분들은 화두 참선법이 부처님시대에는 없었으며 부처님이
성도하신 것이 간화선이 아니라는 논리로 원시불교의 수행법을
도입하자고 주장합니다.



과연 간화선은 조계종단에서 주장하듯 상근기들이 수행하는 최고의 수행법인지
아니면 일반 수행법중에 불과한 하나의 수행방법으로 보아야 할지요?






간화선은 상근기들이 수행하는 수행법이라 할 것입니다.

화두의 간화선은 화두를 들음에 대부분이 머리로 드는 경우가 많으니

머리로 든다는 것은 상단전 수련으로 상근기가 아니면 어렵지 않나 싶지요.

물론 단전이나 가슴 또는 좌선 중 반개한 눈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화두를 들기도 하지만...이런 경우는 많지 않으니.

상근기 수행법이고

또한 여러 가지 수행방법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만 여러 수행자들이 수행을 해 보니

여타 다른 수행방법보다 더 쉽고 빠르기에...전해진 것이고

또한 간화선으로 깨달은 분들이 많으니

(여기서 깨달음은 인식의 깨달음까지를 말합니다.)

저마다 깨달은 분들이 한결같이 전하여 말하니

그것이 간화선이라 할 것입니다.

간화선의 화두가 1700공안으로 너무도 많고 많은 가운데

자칫 잘못하면 화두의 공안이 수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수행을 겉돌게 할 수도 있습니다.

화두는 그것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본인에게 맞아야 하고

본인에게 너무나 뼈에 사무치고 간절한 화두여야

그 화두가 머리에 생생에게 살아서 수행이 이루어 진다할 것입니다.

아니고 누가 잡았으니. 누가 이것으로 깨쳤더라..해서 잡은 화두는

수행자 본인에게 맞는 것이 아니다 보니

화두가 생생하게 살아서 수행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화두를 잡고 수행을 하되 화두가 머리에 생생하지 못하고

화두를 잡았다 놓치고 그러다가

수행의 무기에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니

의심 의문의 생사결반의 의심 의문의 화두가 아니면 그리되기 쉽다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대행스님의 주인공 관법을 시작하였다가 후에
간화선에 관심을 두고 알려진 공안중에 "이뭣고?'라는 공안을 스스로 택해 수행을
하다가 해운정사의 진제선사님을 찾아뵙고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화두
공안을 받았습니다.



이 화두를 받은 후 그 전에 제가 들고 있던 화두와 상충되어 갈팡질팡하였는데
우연히 알게된 바에 의하면 진제선사를 만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같은
화두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화두는 근기에 따라 택해야 함이
타당할 것인데 이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요?







화두가 똑같을 수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이 똑같다"면

살아 있는 화두를 주기보다 죽은 화두일 가능성이 더 크다할 것입니다.

화두는 제가 늘 말한 것처럼

수행자 자신에게 맞아야 하고

수행자에게 꼭 최고 최상의 의문이고 의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고민이 있으면 고민에 직면하게 되면

잠 못 이루고 그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까

머리에 생생하게 살아 밤낮없이 고민하는 것처럼

화두 역시도 그래야 한다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화두를 줄 때는

화두를 받는 사람을 확연히 알아야하고

그것이 쉽지 않을 때에는

본인 스스로 화두를 잡아가는 것이 더 좋지 않나 싶습니다.

예전에는

제자와 스승간에

한솥밥을 먹고살면서 그 내막을 속속들이 알기에

화두를 내려 줌에 생생한 화두가 되었음이 많았겠으나

요즈음의 세태로 보면 생생한 화두를 주고받음이 쉽지 않으니

스스로의 생활 화두를 기초로 수행하며 가되

진보된 화두를 잡아가며

최종의 그럼 "이 것이 무엇인고"의 화두의 귀결처를 잡아서 타파해야 할 것입니다.



잘 알지도 모르는 분에게 화두 달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모르면서 화두를 준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요.

화두를 달라하면 최소한으로 화두를 달라는 사람의

많은 부분을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화두를 달라는 사람에게 맞는 화두를 주어야 하겠지요.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살펴보고 주었다면

다 똑같은 들 무슨 상관 있겠어요.

받은 화두로 수행이 잘 된다면...

그러나 수행이 잘 안되고 수행의 무기에 빠져 수행이 겉돈다면

이는 화두를 잘못 받았다할 것이겠지요.







그리고 공안도 과거시대의 공안만 쓸 것이 아니라 현대의 깨달은 분이 계시다면
그분들의 법거량중에 문답 중에 나오는 공안을 쓰면 현대의 수행자들이
받아들이기가 더욱 쉬울 것이라고 보는데 현대의 선사님들 중에는 공안을
만들만한 법기가 없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 세상에 화두 아닌 것이 없고 공안 아닌 것이 없지요.

다만 현대인들이 명성만을 쫓고 이름만을 쫓는 가운데

스승과 제자의 믿음이 예전만 못 하니

그 전달되는 고민과 의문 의심의 화두 역시도

생생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죽어 있는 경우가 더 많다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옛날 이름 있는 공안을 많이 쓰게되지요.

그래야 받는 사람도 받은 것 같고 준 사람도 준 것 같으니...

주고받는 사람이 이러하니

형식에 매여 있고...남을 의식하고..이름과 명예..권위와 존경...

통함이 아니 막힘에서 통함을 말하려 하니

남의 이름 있는 것을 사용 도용하는 것이지요.

머리 좋은 이들의 법의 도둑질이다 보니....

진정으로 수행이 완연히 이루어졌다면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는 주는 사람이 완연히 이루어져 주어도 받는 이 의심이 있다면

별 효과가 없다할 것입니다.

정법은 바른 것만이 정법이 아니라

사법도 받아드리는 수행자에 따라 정법이 되는 것과 같이

정법과 사법을 떠나 수행자가 자신이 정도를 걸으며 수행해야 한다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화두를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화두를 받는 것 역시도 중요하다할 것입니다.







또 화두 공안을 타파했다고 하는 스님들 중에 다시 대오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걸로 보았을 때 화두의 심천이 있는 것인지요?







화두의 심천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요.

화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에 있는 것이지만

되돌아보면 화두에 맺음과 풀림으로 보는 것이니

이는 화두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화두를 잡은 수행자에게 있으니

수행자의 심천이 화두의 심천이고

화두의 심천이 수행자의 심천이니

화두의 심천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요.

깨달음을 어디에 두고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생각의 변화에서부터 --- 확철대오의 깨달음까지의

많은 깨달음이 있는 것과 같이

화두의 타파함에

전체가 하나인 하나의 자리에서의 타파가 아니라면

일체지에서 "이 뭣고"에 확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타파라 하나 인식의 타파로는 아니다 할 것이지요.







또 공안을 타파한 후 선지식의 점검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스승이 없는 깨달음은 마구니요 외도라고 했다는 말을 하면서
깨달음에 대한인가를 받도록 하고 있는데 과연 이점이 타당한지요?







깨달음이 하도 많다 보니.

일체의 하나됨의 깨달음이 아닌 여타 다른 깨달음을 가지고

깨달았다 하고 ..또 다른 수행자에게 그런 식으로 인가하고...

그러다 보니 자칫 잘못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미명으로....여러 가지를 하니..
.
그것이 바르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자신의 명예나 명성 지위 돈...부귀명예에 있다면

올바로 깨달은 것이 아니거니와 이는 마구니이고 외도이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이러할지니 일체의 하나됨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확연히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깨달았다 하는 것은 깨달은 그것이 진리의 법의...

일체의 하나됨의로 깨달음이 맞는지 맞지 않는 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것이 전체의 하나됨으로부터의 깨달음인지 확인하라 하는 것이지요.

타파하고도 일체의 하나를 모르는 경우가 더 많고

공(空)의 인식함으로 또는 진실허공을 앎으로...

인연법을 앎으로... 마음을 앎으로...일체유심조를 인식함으로...

견성함으로...깨달음을 말하니..

깨달음은 본성의 빛임을 말하는 것이 아닌

본성의 속성으로의 하나의 전체의 하나로의 깨달음을 말하고

그것을 확연 인식 동동...너나 없이 하나됨을 말하니.

여기서 깨달음의 인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러나 이미 확연히 대오한 분에게는

더 이상 누구에게 확인하고 받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가 않지요.

어느 분의 오도송을 보나 전법게를 보고 틀림이 없고 확연하니

그러다 보니 누가 인가를 해주고 아니 해주고가 문제가 되지 않지요.

그러나 스스로 확연하지 않은 분은

여러 선사들의 오도송을 보나 전법게를 보나 확연하지 않으니

자신의 깨달음이 일체법으로의 깨달음인지 확인하고 싶어지고 확인받고자 하지요.






제가 알기에는 임제선사께서 일구에 깨치면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고 이구에
깨치면 인천의 스승이 되며 삼구에 깨치면 자기조차도 구제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래선과 조사선에 법신구, 최초구와 말후구(저는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만)가 있는 줄 알았는데 돌아가신 성철 스님과 향곡선사께서 향상(하)구를
주장하셨고 마조스님께서 향상구를 주창하시고 그 아래 오종도 모두 향상(하)의
일구를 주장하셨다고 하시는 해운정사의 진제법원선사(향곡혜림의 법제자)님께서는
우리 근세 선사님들이 향상(하)의 일구를 모르고 있었는데 성철스님과
향곡스님께서 향상구를 다시 제창해 내셨다고 하시며 향상구를 주창하고 계시면서
향상(하)의 일구를 알아야 돈오돈수라고 하십니다. 과연 향상(하)의 일구는 따로
있는 것인지요?

있다면 이전의 법신구, 최초구나 말후구로 득도하신 분들은 확철대오하지 못했다는
말인지요?






법신구, 최초구와 말후구, 향상(하)구가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무엇을 뜻하는 지를 몰라서 대답해 드릴 수가 없군요.

차후에 정확하게 설명해서 멜 준다면 대답해 드리리다 .






그리고 항간에는 선문답이 선승들끼리 "짜고치는 고스톱"이며 화두는
"개뼉다귀"라는 말도 있습니다. 관연 화두와 선문답은 말로할 수 없는 이치를
진리를 법을 ... 은유로 표현한 것인지요?






선문답은 선승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자칫 잘못하며 말장난 같고...개중에는 그런 분도 있을 수 있으니...

본래 자리 본성에서 나타내는 표현인 만큼

어떻게 표현해도 다 맞는 듯하나

확연한 각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 하나 틀림이 없으나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확연한 것이 없다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선문답은 본래의 자리, 본성, 전체의 하나를 바라보고

묻고 대답하니

본성을 인식 내지는 확연하지 않은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인식하고 확연한 만큼 묻고 답하게 되니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본성의 자리를 인식했구나. 또는 확연하구나.

또는 아! 예 ...묻고 대답함에 어느 정도 공부됨을 알 수가 있지요.

그러다 보니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선문답만을 하다보면

선문답에는 능통하나 실적으로는 그만큼 수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법의 도둑질하되 머리 좋게 도둑질한 꼴이 되기도 하지요.

또는 전혀 선문답을 접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설령 깨달은 분이라 할지라도

선문답으로 묻는 질문을 살펴보지 않고 바로 대답하기란

숙달되어 있지 않고는 어렵다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선문답은 선승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할 수도 있고

화두는 말 그대로 말머리로...

수행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필요충분 조건을 가진 ,....

자기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화두는 공염불과 같음으로...

여러 의미로의 "개뼉다귀" 같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개뼉다귀" 란 말을

어떤 식으로 말하고 사용했느냐가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이는 흔히 쓰는 말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질문에 대답에서 사용했느냐에 따라

본성을 말할 수도 있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는 뜻으로 쓰였을 수도 있는 만큼

그 차이는 크다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문답으로 깨달음을 얻기 어려우나

수행이 익을 대로 익은 수행자에게는 선문답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물론 이때가 되면 단순히 부르는 소리...

또는 자연의 유형 무형의 소리에 눈을 뜨게 되지만...

본성을 인식하고 주인공, 부처, 하나님, 유일신, 일체법, 일체유심조...

진실허공, 공...을 인식하니

어디서 질문하고 대답하는가가 서로 다르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문답은 은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되..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고서 묻고 대답하는 것으로 ...

어떻게 보면 사로 상반되는 것 같으나 같은 맥락에서

보고 대답하되...서로의 공부됨을 위하여

상대방이 보고 있는 바로 옆을 보고 대답할 수도 있고

정반대를 보고 대답할 수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있어야 하고

그럼으로 미진한 공부를 더욱 더 확연하게 해 감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할 것입니다.



처음 수행하는 수행자에게

화두는 수행의 목적이 되고 길의 안내자이며

수행하며 해결해야할 숙제를 가지는 것이다 할 것입니다.

공부함에 있어 공부할 것이 없다면 공부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이

인생의 고통과 고민 걱정이 없고 늘 편안하다면

공부꺼리가 없으니 공부가 되지 않을 것이나

숙제가 있다면 숙제를 해결하고자 공부하게 되는 것과 같고

자신에게 맞는 화두는 지금 직면한 과제이고 숙제이며

고민 고통 걱정거리이니.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는 편안하지 않으니

늘 그 걱정과 고민으로 밤낮 생각하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본인에게 최고 최상의 화두로

성성적적 생생하게 들려 있다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살아 있는 화두라 할 것이며

앞에서 단순한 숙제적 차원으로 보면..하고 하지 않고 큰 의미가 없다면...

이는 한 마디로 죽은 화두라 할 것입니다.

어느 사람에게는 죽은 화두가 살아 있는 화두가 되기도 하고

어느 사람에게 살아 있는 화두가 죽은 화두가 되기도 하니.

엄밀히 말해서 화두는 본인에게 생생히 살아 있어야 한다할 것입니다.





2003.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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