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8회] 안심법문(安心法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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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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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회 |
안심법문(安心法門) / 칠통 조규일 |
저는 요즘 남회근 선생이 쓴 "불교수행법강의"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불교를 전체적으로 손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시작을 했지만
선종과 화두에 관련된 부분은 전혀 수행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힘들어
이 카페를 빌어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 책에 의하면 달마조사가 이조에게 "그대는 뭘 바라는가? 라고 물었을 때
"이조는 안심법문이 어떤 것인가요?" 라고 묻습니다.
----- 중 략 -------
후에 이조 혜가는 삼조에게 법을 전했는데,
의발을 전한 후 온통 먹고 마시며 어지럽게 돌아 다녔습니다.
제전화상보다도 더했습니다.
그렇게 쟁쟁하던 학자가, 출가 후 온 힘을 다해 달마조사로부터 인가까지 받은 사람이,
의발을 전한 후 만년에는 완전 딴 판이었습니다.
술 마시고 사창가를 전전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선종의 조사인데 어떻게 미친듯이 술집으로 달려 갈 수 있습니까?"
이조는 한 마디 합니다.
"내 스스로 마음을 조복하는데,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
문제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구한 것은 안심법문이며
달마조사는 그를 받아 들여서 안십법문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만년에 이르도록 그는 여전히 마음을 조복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조가 말한 안심의 심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철대오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안심에 이를 수 없습니다.
현재는 유심론과 유물론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물이 일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이 어떻게 물질을 형성할 수 있는지는
성불의 경계에 이르지 않고는 누구도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론상으로야 누구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여전히 편안해지지 않는 것이 마음입니다.
이것이 선종입니다.
이 이후 선종은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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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이지만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방향을 잡기가 힘이 드네요.
남희근 선생되시는 분의 견처가 그러한 것을 가지고
남희근 선생 견처로 드러낸 것을 가지고
마치 선종 전체가 그러한 것처럼 말해서 아니 될 것이며
그렇게 인식해서도 아니되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남희근 선생 스스로 그 경지에 가보고서 말하라는 것이 옳을 것이요.
조금 알고 있는 알음알이로 선지식들을 욕되게 해서도 아니되고
싸잡아서 선종을 죽여서도 아니될 것이지요.
책에 다른 글은 모르겠고 이런 글들이 선종을 죽이고 있는 것 아닌가 싶군요.
이런 책들이 "불교수행법강의"라는 책자로 팔리고 있다는 현실이 가슴 아플 뿐이네요.
안심법문(安心法門)
안심법문(安心法門)은 말 그대로 마음을 편안하게하는 법문을 말합니다.
마음을 편안하기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란 그릇에 있는 것 담겨 있는 것들이 없어지거나
(마음의 그릇에 담겨진 것들을 업식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있는 모든 것들을 조복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편안하게 할까? 할 수 있을까?
즉 마음을 조복 받을 수 있을까?
(조복이란 말보다는 마음을 내려놓을까? )
이름하여 마음이라고 하는 마음은
마음이라고 이름하나 하나의 울타리 테두리를 말합니다.
이 마음이라고 하는 울타리 테두리를 마음이란 그릇이라 말하고
마음의 그릇 울타리 테두리를 그리며
저마다 한정적으로 하나의 울타리 테두리를 이루는 것은
저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업식(業識:個業)이고
이 업식으로 저마다 하나의 울타리(테두리)를 이루고 있는 이것을
우리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 안에 담겨져 있는 업식이
테두리 안에서 즉 마음 안에서 작용하는 것을 마음작용이라고 하고
이 마음작용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 마음작용이라고 하고
내 마음이라고 하지요.
너 나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업으로 나타나는 작용인
공업(共業)의 작용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라 하지요.
이는 업식이 있음으로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음으로 업식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저마다의 마음 일체 일체지(一切地)에서 보면
마음은 오로지 하나의 마음으로 일원(一圓)을 이루고
일원(一圓) 속 상(相:업식)이 있는 것이지요.
즉 심물(心物)이 일원(一圓)이고
일원(一圓) 속 상(相: 업식)이 인(因)과 연(緣)으로 정신과 물질이 생멸을 하지요.
정신과 물질이 마음이란 그릇 안에서 업식 안에서 업식의 테두리 안에서
인과 연으로 연기의 인연법으로 생멸이 이루어지는 것을 두고
우리는 저마다 마음작용이라고 하고
마음작용을 따라 생멸하는 것에 끌려다니니
생멸하는 것으로 생로병사가 있고 희노애락이 있게 되고
생로병사 희노애락으로 물결치는 업의 파노라마 속 고(苦)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음작용을 여의었을 때
우리는 업을 떠나 있다. 마음을 조복 받았다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조복이란 말이 맞지는 않지만...)
그럼 어떻게 마음을 조복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마음을 여힐수 있을까?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이란 그릇 마음이란 울타리 마음이란 일원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마음의 그릇을 ...울타리...일원(一圓)을 없도록 할까?
우선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마음이 되고 있고 것을 알아야 하겠지요.
위에서 마음이 되는 것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업식이라고 했으니 업식을 여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업식을 여의을까요?
그것은 지금 "나"라고 하는 내 마음 내 마음의 그릇을
일체(一切) 일체지(一切地)의 마음 오직 한 마음
심물(心物)을 일원(一圓)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지금의 내 마음을 일체의 일원된 마음으로 만들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으로 만들어 놓은 내 마음의 그릇을
키우고 키워서 일체지의 일원 한 마음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만드는 것은
지금 현재 내 마음이라고 하는 마음의 그릇에
본성의 속성(본성 주변에 있는 것들을 끌어 모으려는 힘: 자력)으로 뭉쳐져 있는
업식을 하나 하나 놓는 것입니다.
업식을 놓음으로 놓음으로 인한 업식이 느슨해져서
업식으로 뭉쳐진 테두리 울타리 일원이 점점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업식으로 인한 자성경계의 일원 일원이란 마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럼 업식을 놓는다고 집착하지 않는다고 업식 놓여지는 것인가?
마음이 커지는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놓는 작용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을 놓는 작용은 한 생각 바꿈으로 인하여 한 생각 돌이킴으로 인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이 바꾸고 의식이 바꾸고 기운이 바뀌어
바뀐 기운으로 의식으로 생각으로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본성의 속성 본성 주변에 있는 것들을 끌어당기는 힘
자기 자신 안에 힘 자력의 테두리를 크게 할수록 점점 커진다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마음이란 그릇을 고무풍선처럼 부풀리고 부풀려서는
일원(一圓)의 마음을 터트림으로써 일원이 없어져서는
마음이라는 일원 안팎이 없어지고
(이때가 돈오의 깨달음이라 할 것입니다)
안팎없는 일원 속 마음이 있고 없게 되고
마음이 있고 없게 되는 마음 속 업식은 있고 없고를 떠나
우주에 일체지에 흩어져 있게 되고
흩어져 있는 공간의 틈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것들로 인한 작용은 미세하게 이루어지는 만큼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도 업(業)이 있고 없고를 떠나 있지만
떠나 있는 업식으로 오고 가는 인(因)과 연(緣)을 맞이하고 보내게 되니
여기서 인과 연을 보면 인연의 연기 속에 있게 되어
인과 연 바라봄으로 생멸을 보게 되고
생멸을 봄으로 고(苦)가 있을 수 있으니
이는 안심법문을 얻었으나 진정한 안심법문을 얻었다 할 수 없을 것이나
업이 있고 없고를 떠나
업을 실어 나르는 법륜을 보고
법륜 속에서 업이 실려가고 오는 인과 연을 보지 않고
인과 연으로 인한 생멸을 보지 않고 법륜을 본다면
그리고 법륜 속 여여한 가운데 오는 여래를 보고 여래에 있다면
이것이 진정한 안심법문에 들었다 할 것입니다.
즉 안심법문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법문으로
마음을 조복받는 마음을 떠나 있게 되는
업식을 떠나 있게 되는 법(法)의 문(門)에 들어 섬으로 말하는 것으로
법과 진리 속에 있게 되어 더 이상 마음을 이루고 있는
업식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인식도 의식도 해오(解悟)도 아니고 혜오(慧悟)도 아니며 견성(見性)도 아니고
확철대오 돈오(頓悟)의 깨달음에 있다 할 것입니다.
확철대오 돈오의 깨달음에 있다 하나
이는 마음에 있지도 않고 법과 진리에 있지도 않고
본성이나 본성에 속성에 있지 않고 여래(如來)에 있고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에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도 말이 그러하 것이지
안심법문(安心法門)은 안심법문(安心法門)에 있고
이름이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할 것입니다.
이름이 안심법문(安心法門)인 안심법문(安心法門)을 살펴보면
안심(安心):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은
마음이 평상심일 때
마음이 도를 행할 때
마음이 법이나 진리에 있을 때
마음이 본성이나 본성의 속성에 있을 때
마음이 불이나 불성 하나님에 있을 때
마음이 절대자로 있을 때라 할 것입니다.
이는 들어서 편안함으로 인할 수도 있고
이는 바라봄으로 인식 의식하고 그럴 수도 잇으며
이는 스스로 그곳에 이르러서 그럴 수도 있고
이는 그 안에 들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안심(安心): 평상심, 도, 법, 진리, 본성의 속성, 본성, 주인공, 불, 불성,....을
드러냄으로 말하는 법문(法門)의 설법(說法)으로 볼 때에
안심법문(安心法門)은 평상심, 도, 법, 진리, 본성, 불,..을 말함에 있고
이러한 것들을 들음에 있다 하겠습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안심(安心)의 법문(法門)에 이르는 것으로 보면
평상심, 도, 법, 진리, 본성의 속성, 본성, 주인공, 불, 불성...
이름한 것들의 법(法)의 문(門)을
의식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인식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해오(解悟)에서... 혜오(慧悟)에서
법(法)의 문(門)바라보며 안심법문(安心法門) 말할 수 있으며
또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을 주고 받을 수 있으며
법(法)의 문(門)에 서서
견성(見性)에서 안심법문(安心法門) 말할 수 있으며
또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을 주고 받을 수 있으며
확철대오 돈오(頓悟)의 깨달음
법(法)의 문(門)을 지나서
안심(安心) 속에서 안심법문(安心法門) 말할 수 있으며
또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만큼 안심법문(安心法門)을 말함에 있어 각기 다르다 할 것이며
안심(安心) 또한 다르다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줄터이니 한 번 살펴보세요.
줄을 셋을 그리고 三
아래는 바닷물이고
가운데는 물결이고 파도고
맨 위가 업식이라고 합시다.
마음은
바닷물이 아니고
물결이나 파도도 아니며
업식이 마음을 이룹니다.
마음작용은
업식의 작용이고
이 업식의 작용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결 파도로 이루어 지며
이는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과 연에 의하여 물의 법과 진리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마음의 편안함은 어디에 있겠습니다.
물결이나 파도 업식에 있다면 당연히 고통스러울 것이며
바닷물에 있다 당연히 편안할 것입니다.
아래 바닷물에 있을 때나
바닷물의 물결에 있을 때나 파도에 있을 때
바다 표면에 있을지라도 바닷물 자체로 있을 때가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업식에 따라
인과 연에 살고 법과 진리에 따라 흐르는 물결 위 파도 위
업식에 살고 있고 그 작용에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을 말하고 마음작용을 말합니다.
三 이것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상태에서
맨 위에 있는 경우 가운데 있는 경우 맨 아래에 있는 경우가 다르고
바닷물에 속에 있는 경우가 다르다 할 것입니다.
또한 이를 바라보는 것 역시도 어디서 바라보고
인식 인식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바닷물을 바라보는 바닷물 표면에서 물겨 내지는 파도에서
바닷물 속에 들어서 바닷물을 말함에 다르다 할 것입니다.
안심(安心)은 바닷물에 자체 있고
법문(法門)은 바닷물의 표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본성과 본성의 속성과 업식 사이에서
앞에서 말한 마음에 있어서 어디에 있느냐
어디를 바라보느냐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마음을 이루고 있는 업식을 있고 없고를 떠나 있을 수 있고
바닷물 속 수많은 것들의 업식으로 있을 수는 있어도
바닷물 자체가 마음을 이루는 업식을 조복 받는 일은 있을 수가 없으니
"마음을 조복을 받는다."는 표현은
이조 혜능이 잘못 말을 했거나 말을 옮기는데서
해석하는데서 잘못되었다 할 것입니다.
자!
한 번 살펴보세요
안심(安心)의 심(心)은 도대체 어떤 것이고
안심(安心)은 어디에 있으며
법(法)은 어디에 있고
법문(法門)은 또 어디에 있는가요?
진정한 안심법문(安心法門)은 무엇이고
진정한 안심법문(安心法門)은 어디에 있는가요?
살펴보세요.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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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light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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