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공덕과 진리를 전하는 공덕 / 칠통 조규일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굳이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공덕이 된다 하여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수행이 있고,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종교, 도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공덕이 있을 텐데 이를 자세하게 확연히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깨달은 자가 지구에 나타나는 것만으로 지구의 의식이 높아지고 깨달은 자가 지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각자가 하는 말과 전해지는 말이나 글로 지구의식이 상승하고 지구가 정화된다고 .... 언젠가 다른 글에서 말했던 것 기억이 나네요.
깨달은 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공덕이 된다 하여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수행이 있고,
지장보살이 "지옥에 있는 중생을 다 구하기 전에는 난 성불하지 않겠다."하였다 하나 앞뒤가 맞지 않지요. 보살이 지옥에 있다 하나 보살이 있는 지옥은 지옥이 아닐 것이며 "성불하지 않겠다." 하나 성불하지 못 하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고 성불했다면 중도의 행만이 있으니 천당과 지옥이 있고 없고 떠나 있다 하겠지요. 아이러니 하지만 경전에 있기에... 또한 서원이 그러하다 하니... 지장보살이란 이름으로 보여지기 위한 상징적 의미라 하겠지요.
세상은 나로 생멸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중심에는 내가 있고 "나"를 떠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없다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부터 끝나는 것이지요. 이 세상 역시도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난다 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내가 인식하고 의식하는 만큼 이 세상은 의식되어지고 인식되어질 것입니다. 의식되어지고 인식되어지는 만큼 세상은 존재하고 존재하는 세상은 의식되어진 만큼 인식되어진 만큼 그 범주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나" 즉 내가 의식하고 인식하고 있는 만큼 세상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것과 같이 님의 의식만큼 수행의 경지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수행이 이루어진 만큼 이루어진 경지 안에 세상은 있고 경지 안에 있는 세상은 그 어느 곳(것) 보다 더 청정할 것입니다. 즉 님이 이루어진 수행만큼 의식이 깨어 있는 만큼 경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님의 범주 안에 있게 되고 님의 범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님의 범주 안에서 님의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게 되는 님의 범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님의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은 그들에게는 득실을 떠나 덕이 되고 그들에게 덕이 되는 만큼 님에게 있어서는 공덕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는 님이 있는 것만으로도 님의 범주 안에 있는 것들에게는 공덕이 있는 것과 같이 깨달은 자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공덕이 있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깨달은 자가 깨닫고 아무런 드러남이 없이 침묵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드러남 없이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각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보고 듣고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보다 더 많은 행을 합니다. 그는 침묵하되 지구를 바라보고 지구 밖으로부터 지구 안으로 기운을 끌어올 것이며 국가 사회 주변...을 바라보고 살피며 청정하게 하지요. 이렇게 그가 있는 곳(것)만큼은 그가 바라보는 곳(것)만큼은 청정하게 할 것이며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보이지 않는 영혼들을 천도할 수 있는 한 천도할 것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괴로워하는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운을 보내고 서원을 보내며 기도할 것입니다. 이는 깨달은 자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의 의식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런 만큼 깨달은 자가 있는 세상은 그가 존재해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는 이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공덕이 있다 하겠으나 이는 영향을 받는 이들로부터의 생각이고 공덕이지 진정 깨달은 자에게는 공덕이랄 것이 없이 여여함 속 보고 듣고 부딪치는 가운데 중도의 행에서 이루어진다 하겠습니다. 마치 신통처럼 수행의 법력만큼 이루어지고 행해진다 하겠습니다. 법력이라 하나 기운이고 기운이라 하나 "나"를 이루고 있는 체기권(體氣圈)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겠습니다. 체기권이라 하나 모든 이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자성경계의 일원상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힘만큼 기운만큼 법력만큼 행해지고 이루어진다 할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무엇보다 우선하여 "나" 스스로를 구해야 하며 "나"를 구한 만큼 "내" 범주 안에 있는 것들과 함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면 행복한 마음에 허공을 다 집어넣어도 다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지만 내가 불행하고 화나 있으면 화나 있는 마음에 바늘 들어갈 구멍이 없듯 내가 알지 못하고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종교, 도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한다면 이는 봉사가 길을 안내하는 것과 같고 종교란 금은보화의 창고에 갇힌 노예와 다름이 없고 도와 진리란 금강석을 손발에 묶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으며 자기 자신을 포장하여 아름답게 꾸민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살아가는데 종교가 필요하나 종교에 빠져서는 아니 되고 도와 진리가 살아가는데 편안하게 해 주고 좋으나 도와 진리에 빠져서는 아니 되지요.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서 아니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개인의 나의 깨달음이 우선 되어야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길에서 있어서 이루어진 만큼 종교, 도의 진리를 전하고 포교 포덕을 쌓아야 하는 것이지 종교의 노예가 되어 종교에 갇혀서 도나 진리에 묶여서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겠습니다.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종교, 도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엄밀히 말해서 깨달음보다는 종교의 존속을 위한 입장이 강하다 하겠습니다.
아무리 종교가 좋아도 종교의 노예가 되거나 종교란 감옥에 갇혀서는 아니 될 것이며 종교를 일으킨 교주의 말씀이 아무리 좋고 보배고 보석이라 할지라도 종교 교주가 말씀하신 말이나 글 가르침에 빠지고 갇혀서 스스로 일어설 수 없다면 이는 믿는 종교가 종교 교주의 말씀들이 진리도 보배도 보석도 아닌 자기 자신을 가두는 감옥에 불과할 것입니다.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종교, 도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자신의 수행을 게을리 할 경우 자칫 종교란 수렁과 교주가 말씀하신 도의 진리란 수렁에 빠져 종교로 인한 꿀맛과 종교 교주가 말씀하신 도의 진리란 꿀맛에 취하여 가야할 길을 잊고 달콤함을 탐닉하는 꼴이다 할 것입니다.
이는 종교뿐만이 아니라 현재 가르침을 주는 분(스승)에게나 알려주는 분에게도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벗하여 의지하고 더불어 가되 빠져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믿고 의지한다고 하여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믿고 의지하는 분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할 경우 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님이 스승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스승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라 하여 님의 수행은 뒤로하고 스승의 도의 진리를 전하라 하면 어찌하겠습니까? 믿음이 강하여 전하라는 말을 그대로 듣고 스승의 도의 진리를 전하는 포교를 했을 때 님에게는 어떤 공덕이 있겠지는지요.? 종교란 이름과 스승이란 이름으로 달리했을 뿐 같은 상황은 아니겠는지요?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종교, 도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종교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 즉 종교의 입장에서 종교가 있기 위한 존재하기 위한 수단이고 방편이지 종교가 가진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A란 종교가 있다고 합시다. 이 A란 종교의 교주의 제자로부터 종교는 생겨났으며 교주의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과 신뢰가 없다면 A란 종교의 교주로부터 생겨난 종교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며 A란 종교가 생겨난 이후에는 종교가 전파되기 위해서는 종교를 믿는 신도들이 많이 있어야 하고 신도가 있다 할지라도 종교에 대한 교주에 대한 믿음이 강해야 하고 교주에 대한 믿음이 없다거나 신도가 없다면 A란 종교는 얼마지 않아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믿음을 전재로 하고 믿음으로 시작해서 교주의 말씀에 복종해야합니다. 믿음이 전재가 되어야 만이 하나의 종교가 되고 복종해야만이 종교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종교는 있을 수 없고 믿음 없이는 복종도 없고 복종없이는 종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의 성립에서 보면 가르치는 미명 아래 스승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가르치는 범주에서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리겠다는 스승의 생각으로 제자들에게 전파하게 하고 또는 제자들 생각에 스승의 가르침을 많이 알기 위한 전파하려하고 이는 순수한 의미에서도 시작될 수 있고 또는 다른 의미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가르치는 스승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고 배우는 제자들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스승이면 스승 제자면 제자 스스로들로부터 "나 아니면" "내가 최고.."" 전하고 싶어서..." "난 이런 스승의 제자다..." "스승의 가르침이 너무 좋아서..."라는 등으로부터 시작된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종교의 입장에서 종교가 되게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가 생겨난 당시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믿음으로 종교가 생겨나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교가 생겨난 이후에는 계속적으로 종교가 전파되고 포교되는 것도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교주가 살아 있고 교주의 가르침이 살아 있게 되고 제자인 그들 또한 더불어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종교를 전파하고 포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가 전파 포교되어야지 만이 생겨난 종교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것이며 종교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종교의 교주가 말한 경전이나 코난 성경...이 신성시되어야 하고 그것들이 끊어지지 않고 전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의 교주가 말한 것이 사라지지 않고 전해지지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요? 개인의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 종교를 전하고 전파하는 것이 중요하고 종교를 전하고 전파하는 공덕이 없다하면 그 누가 종교를 전하고 전파하겠습니까? 사경의 공덕이 없다면 누가 사경하겠습니까?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경이 아주 중요했겠지요. 그러나 인쇄술이 발달한 지금은 사경도 중요하지만 그 말의 뜻과 의미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말의 뜻과 의미를 아는 것보다 더 그것을 의식 인식하며 깨어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종교가 전해지고 전파되어져서 이를 전해 듣고 깨어나는 이로부터 전파한 나에게로 공덕이 돌아오는 것과 내가 수행의 경지만큼 아니 깨달음을 얻어서 "나" 안의 범주 안에 있는 것들에게 전하여 주는 것과의 공덕의 차이는 지금 님께서 묻고 있는 질문의 요지라 할 것입니다. 님은 종교를 전파하고 포교해 주신 분들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님에게 종교를 포교해 주신 분에 대해서는 님의 변화만큼 포교해 주신 분에 대하여 감사할 것입니다만 포교 전파되어 먼 미래에 종교를 접하는 이들도 그러할까요?만 윤회해서 그 인연으로 또다시 그 종교에 믿음을 가지고 수행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역시도 개인의 수행보다 포교 전파의 공덕을 생각해 수행하지 않고 포교 전파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개인의 깨달음을 구하며 구한 만큼 포교 전파하며 수행을 한다면 이생에 구하지 못할지라도 전파 포교한 인연으로 또다시 그 종교의 만남으로 수행해 가서는 어느 생에서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만 수행의 방편으로 포교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은 내가 있어 나로 있는 것이지요. 내가 없는 세상에게 누가 있습니까? 육도 윤회한다 하나 누가 육도 윤회하는 것이지요? 육도 윤회는 내가 육도 윤회에 있을 때 육도 윤회하는 것이지 육도 윤회를 벗어나 있으면 육도 윤회는 있다 없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육도 윤회하는 입장에서 보면 육도 윤회가 있으며 육도 윤회를 벗어나 있는 입장에서 보면 육도 윤회는 없다 할 것입니다.
우주는 그 테두리의 이름이 우주이고 우주 전체는 우주의 영향을 주고 우주 전체는 우주의식이라 할 것입니다. 우주는 우주의식을 벗어나 있지 않고 우주 의식이라 할 것입니다. 님이 수행하여 올라선 경지만큼의 의식은 그 의식의 경지만큼 그 안에 있는 것들에게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포교하는 것은 포교한 분에게로부터 공덕이 돌아오니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후자보다는 전자가 되어야 한다 하겠습니다.
2005. 3. 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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