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367 글쓴이: 칠통 시간: 2001-08-16(목) 00:01:02 조회: 44 단 몇 줄의 선시만 보고, 그 사람이 깨쳤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 칠통 조규일 "금오 큰스님, 효봉 큰스님, 만암 큰스님...읽다 보니 의문 나는 것이 조금 있었습니다. 깨달으신 분들은 오도송을 읊기도 하고, 선시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일반적인 선사들의 경우, 아니면 수행자들이 오도송으로써 쓴 선시를 볼 때, 깨달은 분들이나 깨닫지 못한 분들이나 누가 쓴 시라 하여도, 제가 보기에는 그 시가 그 시 같고, 뭘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느끼지 못하는데 단 몇 줄의 선시만 보고, 그 사람이 깨쳤는지 못 깨쳤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깨닫지 못한 사람이 쓴 시는 깨달은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인지. 그 시로는 아직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인지요? " 깨달음은 얻은 각자는 깨달음의 순간(한소식)을 생각해 오도송을 읊습니다. 책 "빛으로 가는 길"에서 '제6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 각자가 선시를 쓴다면 그 선시는 깨달음을 표현하고 본성의 자리를 표현하여 수행자나 선사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오도록 유도 또는 표현하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선사나 수행자가 선시를 쓰면 그 선시를 보고 깨달음은 얻은 각자는 그 선시가 오도송인지. 혜오송인지. 찬탄시인지. 어느 경지에서 쓴 것인지를 압니다. 그것은 본성을 본 사람은 그 누가 어떻게 본성을 표현하여도 본성을 표현했구나 또는 본성을 보고하는 소리이구나를 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본성을 본 일이 없으니 긴가 민가 확연히 알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 만큼 누가 오도송, 혜오송, 선시, 게송, 열반송을 써서 보여준다면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오도송인지 아닌지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도송, 선시. 게송..을 보고 그 글을 쓴 사람이 깨쳤는지 못 깨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구의 글이라 하면 그 글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식 속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만큼 세상을 인식하여 법과 율에 따라 나오는 만큼 알 수 있습니다. 혹 다른 깨달은 사람의 글을 도용했다하여 앞뒤 정황이 다르다면 그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알 수 있지 않나 합니다. "빛으로 가는 길"이란 책 82페이지 '진리와 진실' 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귀하에게 누군가가 주전자를 설명한다면 주전자의 짧은 설명만으로 주전자를 말하고 있구나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설명하는 사람이 주전자를 확연히 보았구나. 알고 있구나 하지만 주전자를 아무리 잘 설명해 주어도 놓아도 주전자를 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주전자를 설명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고 주전자를 본 사람은 주전자가 아닌 비슷한 것 아무리 잘 설명하고 놓아도 주전자를 말하지 않았구나라고 확연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큰스님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깨달음을 얻지 않은 사람이 있고 오도송이라고 스스로 말하며 내놓은 오도송도 오도송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오도송만을 묶어 놓은 책을 접해 보고 나서 알았습니다. 혜오와 오도송과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어느 스님은 혜오를 마치 자신이 오도한 것처럼 오도송이라고 내놓아 제자들에게 이어져 현재에 이어져 오는 오도송도 있더군요. 그런 것을 보면 한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전에 이것을 짤막하게 시적으로 쓴 것이 있는데 그리고 누가 오도송이라 이름한 것이 오도송이 아니라고 그는 누구라고 밝힐 수도 없고.... 그 분의 문파 내지 문하가 있으니.... 그 글들이 항간에는 지금도 오도송으로 전해지고 이야기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애석하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경허스님도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경허스님 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나라에서 선의 대가라는 것밖에 기억을 못하겠군요. "또 스승이 질문을 제자에게 던졌을 때, 제자가 답변을 한 내용으로 스승이 '그래, 대오했구나' 라든지 '아직 멀었다' 라든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요? 성철 스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 걸로 압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네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확철대오했다고 인가를 내려주마' 라는 그런 것 말입니다. 선시나 선문답으로써 확철대오인지 아닌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런 시들을 접할 때면 시들이 전부 그 시가 그 시 같고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앞에 내용으로 이 질문은 이해를 할 것 같은데 더 설명이 필요할까요? 좀 더 부연 설명을 한다면 스승의 질문이 본성에 있고 본성에서 대답한다면 대오했구나 하겠지만 본성에서 질문을 했는데 본성을 벗어나 대답한다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일 아닌 가요. 그리고 그 대답이 대답하는 수행의 경지에서 나오는 대답인 만큼 그 대답을 들으면 그 대답이 본성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수행은 길 없는 길을 찾아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산의 정상에 오른 것과 같고 산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것과 같다고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 대답이 산 아래인지 중턱인지 바로 정상 밑인지 정상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질문이 본성에 있고 대답을 본성에서 한다면 '확철대오했구나' 하고 인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본성을 보지 못한 사람은 본성에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혹 실수로 또는 깨달은 사람의 언어를 빌려 했다하더라도 이치가 어긋날 것이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여 주전자를 설명해 준 것처럼 주전자를 묻고 주전자를 말하면 주전자를 본지를 알지만 그렇지 않다면 주전자를 묻는데 주전자 주변만을 또는 주전자를 비슷하게 설명하여 대답한다면 주전자를 '보지 못했구나'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도송인지 혜오송인지 선시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귀하에게 귀하가 확연히 아는 것을 설명하면 그 설명만 들어도 표현한 글만 보아도 확연히 아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아무리 잘 설명하고 표현하여도 귀하가 확연히 아는 것에 대한 설명이 아니고 표현이 아니라면 그것이 귀하가 확연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표현했다고 설명한 사람이 표현한 사람이 말할지라도 귀하는 아니라 할 것입니다. 그렇듯 아닌 것은 아닌 것과 같고 맞는 것은 맞다할 것입니다. 이런 것과 같아서 깨달은 사람은 깨달음을 얻었는지 얻지 못했는지 아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사람은 이 전체의 의식을 오가며 시 내지는 선시를 쓸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식과 그 아래의 의식을 오가며 선시를 쓸 것입니다. 그 어떤 시든 시를 쓴 사람의 의식을 벗어나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시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글이라도 글은 글을 쓴 사람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든 의식이 있는 만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식 안에서 법과 율이 나오고 의식만큼 세상을 인식하며 살고 바라봅니다. 귀하도 이제 의식테스트를 할 줄 아니 아리송한 선시를 가지고 그 시의 의식을 테스트해 보세요. 그러면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선시라면 시라는 글의 의식이 230은 넘어야 할 것입니다. 230-300의 의식을 나타낸다면 의식이 깨어있는 선시라고 할 수 있으며 400-500이라면 수행선상으로 이끄는 선시이고 500-600이라면 본성의 인식 정도로 본성으로 이끄는 선시 및 게송이라 할 수 있으며 600이라면 혜오송 및 게송시라 할 수 있으며 620이상이면 오도송 및 깨달음이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하가 궁금한 시, 선시들을 한 번 테스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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