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불완전하다 하는데...무엇을 찾는가 찾는 이 누구인가? / 칠통 조규일
답을 구함이 퍽 서툴러서 답이 어려웠습니다. 어차피 육신의 삶은 좀 먼저야 나중이냐 일뿐인데, 고달픈 삶이어서 답을 구하였습니다.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원망. 후회해 본들, 살아왔다는 것을 반품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삶을 지속해야하는 이유를 찾아지지 않는다면, 내 안에서 찾아야하다면, 이유를 찾는 것이 삶이라면, 정성과 수련이 연속이라면, 이를 위해 머뭇거릴 것이 있을 널지요. 누구를, 나를 위하여... 란? 할 수 있음이 보일 때이고, 스스로에게 사명 느낄 때가 아닐는지요. 잠실에서 미련 갖고...
생멸(生滅) 없는 본성(本性)에서 생멸하니 생하면 생하는 것으로 고락(苦樂)이 있고 멸하면 멸하는 것으로 고락이 있으니. 이는 자기 자신이 지은(행한) 업(業)으로 인한 원인이 인(因)으로 그 결과를 맺는 연(緣)으로 나타나 연기(緣起)하였다 사라지니. 업이 있는 이상 업을 가지고 있는 이상 끝없이 생멸하는 윤회의 굴레에서 끝없는 전생의 업으로 현재 인간의 몸을 받았고 몸을 받아 태어남(생함)으로 멸하여 가는 육신과 (여기서 인간이란 육체 세포의 집합체로 세포 하나 하나가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을 무시하고 세포의 집합체 육체만을 볼 때를 말합니다.) 육신의 몸을 받아 살아가는 자체를 삶이라 이름하여 살아가지만 삶이라며 살아가는 그 자체 역시도 연기의 인연법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연기의 인연법에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또 업을 짓는 행동 행위를 살아간다 산다 삶이라 말하지만 살아간다 산다고 하는 삶은 업으로 인한 업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생멸 그 생멸의 끊임없는 연기의 인연법이 연속적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작용의 흐름을 우리는 인생이다 삶이다 하지만 본성에서 보면 우주 만물의 본성은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여여하게 있으나 그러한 지를 모르고 본성에 있는 이(覺者)는 본성의 여여한 곳에서 가운데(中道)에서 업이 생멸하는 작용을 보고 현상을 보고 듣지만(객관적인 입장에서) 중생은 업 따라 생멸하는 인연법의 작용을 보고 현상을 보고 듣고 보면 본 것에, 들으면 들은 것에,... 인연법의 작용이 현상이 마치 자신의 행인 것인 것으로 인식하여 주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업의 연속선상에서 업을 "나"라고 인식한데서 업이 되어 업으로 업의 작용이 되고 현상이 되니 현상이 작용이 "나"의 실체 실상인지 인식하고 마치 이러한 업이 없으면 "나"가 없다라는 존재의 부재성, 허탈과 허무 허망에 빠져 늘 업 속에서 업과 함께 있다할 것입니다.
업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업과 함께 흐르고 구르니 업 덩어리가 업 덩어리 속에서 업들의 작용과 현상 연기의 인연법을 보고 듣고 그 속에 빠져 업으로의 생사고락에 빠지고 희노애락에 빠지고 그럼으로 업 덩어리를 "나"하고 또 이"나"의 업 덩어리를 위한 삼독(탐,진,치) 그 삼독에 빠져 삼독으로 인한 업으로의 작용 현상을 삼독에 대응 화합시켜 생로병사고락에서... 희노애락에서...
"어차피 육신의 삶은 좀 먼저야 나중이냐 일뿐인데, 고달픈 삶이어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원망. 후회해 본들, 살아왔다는 것을 반품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삶을 지속해야하는 이유를 찾아지지 않는다면, 내 안에서 찾아야하다면, 이유를 찾는 것이 삶이라면, 정성과 수련이 연속이라면, 이를 위해 머뭇거릴 것이 있을 널지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본성과 본성에서의 업의 작용과 현상을 설명했습니다. 깨달은 각자는 업의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업을 벗어나 본성에 있고 중생은 업의 몸을 하고 업과 어우러져 있다할 것입니다. 그럼 본성으로 가는 길 수행이니 정성 수련은 결국 업으로부터 벗어남 놓아버림이 그 쟁점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업이 이것다' 하고 업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알고 업이 되는 현상과 작용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업이 이것이구나' 하면 이미 그것은 업이 아니라 그냥 업으로의 작용이고 현상입니다. 업을 알고 업으로의 작용과 현상을 아니 업을 확연히 알기 전에 "나"라고 인식한 업으로 이루어진 "나"는 이제 업으로의 "내가" 아니라 참나(我)를 보거나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참나를 보거나 생각함으로 '이것이 업이구나' 했던 업으로부터 벗어나 있다할 것입니다. 앞에서 업으로의 작용 현상에 나는 업이 주관이 되어 주관적인 업의 "나"이고 뒤에 '이것이 업이구나' 했던 업은 업을 바라봄으로 관(觀)함으로 업의 작용과 현상을 보았으니. 본, 관함으로 인하여 주관적이든 업은 이제 나에게 있어 객관적인 업이 되었다 할 것입니다. 얽매이는 것 얽매여 있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주관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고 느슨함 놓아버림 벗어나 있는 것은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은 (정진은 수련은) 결국 주관적인 업의 얽매임 그 얽매임의 집합체 업의 "나"를 느슨함 놓아버림 벗어나 있게 객관적 업으로 즉 주관을 객관화시키는 것으로... 주관적 업을 벗어나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이든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시키기 위해서는 놓아버려야 할 것입니다. 놓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서 갖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혹 가진 것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관망 내지는 무관심 방관하지 않고는... 수행은 놓아버림입니다. 무엇을 업을...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업 덩어리를... 하나 하나를 관하고 바라봄으로 얽히고 설킨 업이 마치 얽힌 실타래 풀리듯... 처음 관하고 바라봄으로 그 매듭을 찾고 (수행에서는 업장을 녹인다) 매듭을 찾음으로 매듭을 풀 방법을 찾고 찾는 동안 (업이 이것이구나 하는 업을 찾고 "오온"을 알고 "오온"을 밝게는 과정) 얽히고 설킨 업의 얽힌 끈은 더욱 느슨해지고 (오온을 앎으로 연기의 인연법을 아는...) 느슨함으로 이제는 이제 실마리를 찾는 실마리를 찾으매 (그럼으로 인연법 하나 하나를 관하여가는...) 이제는 하나 하나 풀어가고 이 풀어 가는 것이 바로 놓는 방법을 안 것이고 놓는 것이니. 수행에 최선의 방법은 놓아버림 방하착이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수행해 가며 업장을 녹이고 업의 인연은 만나 업은 풀되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이 방법으로 최선의 방법은 역지사지입니다. 바꾸어 생각함... 바꾸어 생각해 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거의 없고 이해하면서 이제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그럼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그럼으로 업장이 없어지는 사함이 됩니다. 이런 상황이 빈번해지면서 이제는 모든 행이 타인으로부터 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나로 인한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안을 관(觀)함으로 행복도 슬픔도 내 짓, 업의 결과이구나. 행복, 슬픔, 고통도 내 업으로 생하여 내 업을 사(死, 소멸)하는 것이니. 이를 인식하고는 감사하게 되고 이제 모든 일에 매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다른 쪽으로 한번 생각해 볼까요? 본성은 있는 그대로 여여하다고 늘 설명했습니다 본성을 일직선으로 그리고 일직선에 연속적 주기의 그림을 그리십시오. 그럼 주기율과 폭은 상하로 나타나고 위의 상(上)은 생, 좋은, 희, 락, ...이고 아래의 하(下)는 노, 애, 고, 집, 멸...입니다. 그러나 보시는 관하는 사람에 따라 어떤 분에게는 좋은 일일 수 있는 것이 나쁜 일이기도 하고 어떤 분에게 나쁜 일일 수 있는 것이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어떤 것이든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그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은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전체의 하나 하나에서 살펴볼 수 있는가 하면 하나에서 그 어떤 것 일이든 그곳에서 음양중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것임에도 어떤 이는 밝은 쪽을 보고 어떤 이는 어두운 쪽을 봅니다. 이는 그것이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내가" 어떤 상황 즉 어떤 안의 대상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또는 보완적 또는 일치로 대응한다할 것입니다. 이 상대적, 보완적 일치로 인식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개업(個業)으로 자기 자신 안으로부터의 탐, 진, 치 삼독의 만족을 위한 행위로부터의 욕망 충족을 쫓아 행한 행위의 대응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듯 면밀히 관찰해 보면 기쁨을 알기에 슬픔을 알고 슬픔을 알기에 기쁨을 알며 기쁨을 알기에 고통을 알고 고통을 알기에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이들은 본성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에서의 흐름에 불과합니다. 이 흐름은 본성에서의 파문이고 파장입니다. 무엇으로 인한 파장 파문인가 하면 업장으로부터... 저마다 가지고 형태의 형상의 우주 만물의 저마다의 업으로... 그럼으로 수많은 파문과 파장은 그 파장 파문의 증폭의 고저가 서로 얽히고 설키고 서로 서로 얽히고 설키며 만나는 점이 매듭이 되고 이 매듭은 업의 나타남 드러남의 인연이 생멸하는 만남의 점이 되고 이 수많은 점은 파장과 파문이 서로 어우러져 허공(하늘) 가득 망을 이루고 사람들은 이 망을 하늘 망(그물) 또는 인트라 망이라 이름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늘 망 인트라 망을 이루는 것은 업(오온,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의 식)이 본성에서의 하나의 흐름으로 업의 나타남 드러남 인연 연기에 있습니다. 이 연기의 인연을 드러남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또다시 얽매임으로 업을 짓는 것은 본성에서의 "나"가 아니라 업으로 인식한 업의 "나"가 나의 만족 충족을 위한 탐, 진, 치 삼독 그 만족을 위한 행위로부터의 욕망 충족을 쫓아 행한 행위의 대응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육신의 삶은 먼저와 나중의 업의 인연으로 나타남 주어진 것이며 그 살아가는 삶은 업의 인연의 작용 현상이 나타남인데도 업의 연기의 인연법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업의 작용에서 보고 탐, 진, 치 삼독의 빠져 업으로 인한 삼독의 업의 만족을 위한 행위로부터의 욕망 충족이 되지 않음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원망... 후회해 본들,.. 살아왔다는 것을 반품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삶을 지속해야하는 이유를 찾아지지 않는다면,..."라하고 "내 안에서 찾아야하다면, 이유를 찾는 것이 삶이라면, 정성과 수련이 연속이라면,....."라고 한다면 본성의 일직선 업이 작용하는 연속적 주기의 그림 일직선상의 주기율과 폭, 상하, 명암,...선악, 음양 이분법적론에서 그 어떠한 경우든 일직선상 아래 밑 하(下)에서 보는 위 상(上)은 감사해야할 것입니다만 본성의 일직선상에서는 바라보는 쪽이 어디든 바라본 쪽은 위, 상, 선, 양..이 될 것이고 바라보지 않은 뒤쪽은 아래, 밑, 하. 악, 음...이 될 것이나 이는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이지 그 근본 본성에서 보면 그냥 업으로 나타난 연기의 인연이고 업의 작용이고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니 수행하는 수행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매사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 때는 태어난 것을 감사한 적이 있을 것이고 어느 때는 태어난 것을 후회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태어난 상태는 변함없이 똑같은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이는 본성의 일직선상에서 어느 쪽을 보고 있느냐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인식의 작용은 본성에서 상하 위아래 전체를 하나에서 본 것이 아니라 본성의 일직선상에서 위... 또는 아래...가 아니라 업을 가지고 업이 있는 마음에서 마음 작용을 하고는 마음 작용한 업으로 일직선상의 기준 점을 잡고 이미 나타난 주기에 업의 기준으로 한 일직선상을 그려놓고 바라보기에 똑같은 작용 현상임에서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바라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주기의 업 작용에 서로 다른 업의 서로 다른 마음작용을 대응시키면 그 기준 점 일직선상은 바꾸고 바꾼 일직선상에서 바라보는 본성의 일직선상에서 바라보았던 바라봤던 점은 다르게 보이고 그럼으로 똑같은 업의 작용 현상임에도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을 보고 인식한 이것이 3차원 이상에서 이루어지니 어느 때는 이루어지는 지를 알고 어느 때는 모르고 또 이루어짐의 변화가 업이 대응하는 일직선상에 따라 대응하는 대응점이 다르고 수없이 변화해 나타나는 업의 작용에 대응하는 밖에 대상이 하나라 할지라도 안으로부터의 업의 수 없는 작용이 계속적으로 변화 작용하니 그 변화에 대응하는 밖의 대응 그 교차점이 계속 변하고 계속 변하는 수많은 교차점을 보면 그 변화 대응이 변화무쌍하고 그 교차점 또한 변화무쌍하니 안에서의 업의 작용이 밖으로 나타나는 그 인연의 매듭과 풀림이 계속 변화하는 안의 대상과 밖의 대상의 교차점이 항상 불완전하니. 이를 전혀 모르는 이들은 밖의 대상에 대응할 때마다 불안 초조하고... 이를 보고 인식한 또는 느낀 사람들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본성에서 보면 진리 그 자체로 흐르고 흐르나 업과 업, 업으로의 파문과 파문, 업으로의 파장과 파장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본성의 바다에 파도를 일으키고 물거품을 일으키나 본성을 확연히 아는 자 이를 알고 업이 "나"라 인식한 이 업이 자신인 줄 알고 업으로의 파문과 파장 그 파도와 물거품의 꿈속에 있으나 그것이 업으로 인한 파도 물거품 꿈속에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본성은 전체가 하나의 일직선상입니다. 더 이상 위없는... 시작도 끝도 없는...가늠할 수 없는...사방 팔방 시방이... 깨달음을 각자는 이 본성의 일직선상에서 육체란 업 덩어리를 통하여 상하, 명암,...선악, 음양의 이름이 그러할 뿐 전체가 하나로 통하여 있음을 알고 보고 말하고 중생은 본성의 진공묘유 속 업으로 수없이 변화하는 묘법의 업의 일직선상에서 인연의 작용 현상을 보니 보는 지점이 다각도로 변하고 다각도로 변한 지점에 다각도의 업이 작용하니 변하는 그럼으로 업이 대응하는 진공묘유에 업이 인연으로 인연이 업으로 얽히고 설켜 얽매이고 그 얽매임의 업으로 일직선상을 만들어 보니 또 변하는 그럼으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진공묘유 속 업의 주체로 있는 것입니다. 업의 주체로 있는 "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다를 것이 무엇이고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육체를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의 차이일 뿐 "내가" 본성의 주체가 아닌 업의 주체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한다고 달라질 것 없었을 것이며 금생에 태어나지 않고 계속 영계에 있었다면 어느 때인가 태어났을 텐데... 지금의 금생 아닌 어느 때 태어났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스스로의 사명을 느끼고 알았을까요? 말한 이유들을 알았을까? 이러할진데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태어난 것에 감사해야하고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해야합니다. 태어나 "나"로 인하여 일어나는 모든 생멸의 인연법이 "나"의 업을 떠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업에서 업장으로 일어나니 업을 소멸해 가는..수행, 정진 수련에 입장에서는 업장 해소니 업장으로 일어나는 좋고 나쁜 희노애락 생로병사... 그 어느 것인들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감사하지 않고 기쁘지 않겠는지요?. 모든 인연의 작용 현상에 늘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본성에서 언제부턴가 업을 "나"라고 인식했는지 모르지만 업으로의 "나"는 본성에서의 "나"가 아니니 본성에서의 가아(假我)라 할 것이며 업의 작용이 없는 현상이 없는 본래의 본성이 진정한 "나"입니다. 진아(眞我),.. 참 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진아의 참나의 나는 본성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할 것입니다. 본성의 진아 참 나로부터의 업을 "나"라 했으니 이 업의 "나"는 "나'라고 하되 가아(假我)라 합니다. 가아의 나와 진아의 나 사이에 놓여진 것이 걸림돌이니 그 걸림돌은 업이라 할 것입니다. 걸림돌 제거 업의 제거는 진아 참나 본성으로 가는 길이라 할 것입니다.
업은 연기의 인연법으로 나타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없어짐을 멸(滅)이라 합니다. 생한 것 일어난 것은 업으로 인한 것이니 생한 것을 관(觀)하여 역(逆)으로 가면 업에 이르는 업장소멸, 제거라 할 것이며 생한 것을 관하여 바라보면 멸(滅)로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하는 생멸 순리(順理)라 할 것입니다. 순리는 업의 작용이고 현상이니 업의 제거를 위해서는 생한 것을 역관(逆觀)하여야 합니다. 역관에 수행 정진 수련하는 입장에서 보면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일 것입니다. 왜! 고통의 생 즉 고통의 생김은 업의 멸이고 생의 역관은 진아로 가는 길 해탈로 가는 길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좋고 나쁜 "나"로부터 생하는 일어나는 것은 좋은 건 좋은 대로 나쁜 건 나쁜 대로 그대로 즐거움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수행자는 매사에 감사하고 인생을 즐겨야할 것입니다. 태어남을 고통을... 수행자는 악업이든 선업이든 만나는 인연을 즐거워하고 반가워하고 감사해야할 것입니다. 인연이 도래함을 감사하며 도래한 인연의 만남을 반가워하고 생한 업을 역관하며 "네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구나" "네가 있어서 그랬구나"하고 "아! 그래서..."즐거워하며 바라볼 때가 한 번 두 번 많아질수록 아는 것으로부터 놓아버리게 되고 얽매였던 것으로부터 자유롭게될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의 행입니다. 나를 찾는 삶이고 삶의 연속성을 위해 머뭇거릴 것이 머무름 없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나를 위하여... 그런 만큼 수행은 고통으로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 안팎에 일어난 일들을 즐기며 역관하는 것입니다. 수행한다고 조용한 곳 수행처를 찾지만 세속의 시끄러움 속을 벗어나 조용하고 고요한 속세를 찾지만 세속을 벗어나 속세에서 역관이 안되고 업의 생멸만을 본다면 밖은 조용한 속세일지라도 안은 늘 시끄러운 세속일 것이며 시끄러운 세속 밖은 시끄러워도 안을 조용히 밖의 시끄러움을 따라 역관한다면 세속은 세속이 아니라 속세일 것입니다. 세속과 속세는 한 몸으로 안팎이 없거늘 자신의 업으로 일직선상을 그려놓고 안팎을 구별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보이는 모습 모양 형태의 형상에 있지 않습니다. 수행자라 하며 모습 모양 형태의 형상을 쫓는 이들이 많으니 눈빛만 배워... 척만 배워...모습 모양 형태의 형상을 갖추고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것인 양 앵무새노릇 하는 이들이 많은 까닭입니다. 이러한 이들을 배제하고 스스로 역관이 잘되는 분에 있어서는 마음 안으로부터의 속세인지 세속인지를 알며 세속과 속세를 구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속세와 세속이 둘이 아닌 가운데 수행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수행함에 있어 밖이 시끄러우면 안으로 몰입하여 들어가기가 쉽지 않으나 몰입하면 깊게 몰입할 수 있고 밖이 조용하면 안으로 들어가기가 쉬운 반면 안에 몰입하기 쉽지 않으니 자신의 몰입력 집중력의 근기가 어떠냐에 따라서 다르다 할 것입니다만 찾아야 한다는 의미와 사명에서 본다면 교회에 나가는 것보다는 법당이 어떨까 싶군요. 교회는 믿고 의지하고 가르침을 따라가는 나를 버리고 가는 종교라면 법당은 믿고 의지하고 가르침을 받되 스스로 나를 찾아가는 종교라 할 것입니다. 찾아야 한다는 의미 사명에서 당연히 법당에서 이루어져야할 것입니다. 이는 교회 내지 법당 안은 고급의 신들이 있기에 저급령들로부터 보호를 해 주시기에 찾는데 찾아가는데... 수행하는데 도움이 된다할 것입니다.
다른 쪽으로 한 번 살펴볼까요? 업으로 태어난 삶에서 육신도 업의 연(緣)이고 육신이 살아가는 삶은 업의 어우러짐 인연의 연속적이고 이 세상도 모든 형태의 형상 그 작용과 현상의 어우러짐이 연(緣)이니 업으로 인(因)과 연(緣), 연과 인이 되어 맺고 풀고 맺고 푸는 그럼으로 생멸하는 업이 업에서 허우적거리니 이 허우적거림으로부터 나옴 업으로의 벗어나기 위하여 머뭇거릴 것 없이 찾을 것이라면 이는 안팎으로의 대상과 그 대상으로부터 일어나는 걸림의 생을 역관함으로 안으로부터 고요함을 얻고 밖으로부터의 대상들을 놓아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긍정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밖으로 향하는 마음으로 안으로 추스리고 밖에서의 모든 일을 "내 탓이다" "내 복이다" "매사에 감사하며..." 부정적 사고 방식을 떨치고 의식 안에서 잠재의식 안에서 무의식 안에서 긍정적 사고 방식에 긍정적 면을 보고 긍정적인 면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어둠이라 하나 어둠은 스스로의 어둠이 아니라 밝음이 조금 있는 것으로의 어둠이니. 칠흑의 어둠이라 할 때도 칠흑의 어둠 속에는 밝음이 아주 조금 있는 것이니 그 어느 곳에서든 조금 있는 밝음을 보고 밝음을 밝히는 그럼으로 늘 밝음을 보고 밝음에 있는 있게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많은 말을 했음에 말이 말에 있지 않고 의미와 뜻에 있지 않고 허공을 맴도는 이유는 왜일까? 놓아라. 사정없이 놓아버려라. 벗어라. 더 이상 벗을 수 없을 때까지 그리고 보아라 꽈리를 틀고 앉아 있는 이 누구인가 보아라 시방세계 찬란하게 비추는 광채를...
2002 .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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