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가는 길

내 안에 수많은 나

칠통漆桶 조규일 2024. 6. 9. 07:59
진리 속 바다물고기 / 칠통 조규일


진리란
바다 에 사는
바다 물고기는
진리의 바닷물을 떠나 살 수도 없으며
한시도 진리의 바다를 떠나 있지 않고
진리의 물을 머금고 산다 .
진리의 물을 먹으며 산다.

그럼에도
바다물고기는
자기 자신이 바다물고기인지는 아는데

자기 자신이 진리의 바다 속에서 살고 있으며
먹고 마시는 것이 진리의 바닷물인지 모르고
진리의 바닷물 한 모금을 마시기를 갈망한다.
진리의 물을 쉬지 않고 먹으면서도....

"나는"
진리의 바다 속 물고기로
진리 속에 내가 있는 있는지를 알면서

자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물고기인 자기 자신을 인식하면서도 진리의 바다를 보지 못하고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


물고기인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에
진리의 바다는 보이지 않고
바닷물 역시도 보이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면
진리의 바다이고
떠 먹으니 진리의 물 한 모금이다.


바다에 사는 모든 것들은
바다를 볼 때에
바다 아닌 것이 없이 바다다.

바다를 보는 것과 같이
진리에서 보면
진리 아닌 것이 없다
진리 속에 모든 것이 진리이다.

바다를 보되
바다 속에 사는 하나 하나의 명명의
이름들을 바라볼 때에는
명명의 이름들은 바다가 아니라 명명의 이름들이 된다.

명명의 이름들을 보되 바다를 볼 때에
명명의 이름들은 명명의 이름이 그러할 뿐 바다인지를 본다.

진리를 보되
진리 속에 있는 하나 하나의 명명의 이름들을 보고

그 이름들에 빠져 상을 볼 때에
진리를 보지 못하고

명칭의 이름과 상들 보되
명칭과 이름 상에 빠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때에
너는 진리를 보리다.


바다는 바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고기 역시도 물고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물고기 바다에 사는 것처럼
진리는 진리라 말하지 않았고

"나" 자기 자신도 "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나"라고 했을 때에 "나"로써 "자기 자신에 빠져 "나"라 하나

나는 내가 아니라 진리에 있는 "나"로 진리라 할 것이며

일체 법하면 일체법으로 역시 그러하고
깨달음이라 하면 깨달음으로 그러하다.

일체가 하나로의 깨달음이라면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은 깨달아 있고
일체가 불이라면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불 아닌 것이 없고
일체가 하나님이라면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아닌 것이 없이 하나님이리요.

진리의 물 한 모금
지금까지 바라보던 시선 경계를 넘어
눈을 돌려 있는 그대로 보고 떠 먹으면 된다.

진리의 바다 속에 있으면서
왜 진리의 바닷물을 떠 먹지 못하는가?
먹기만 하면 된다.
할!

2004. 10. 19



내 안에 수많은 나 / 근영무상시 칠통 조규일


누구나 할 것 없이 내 안에 너무 많은 내가 있을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는 지금에서 보면 내 안에 저마다의 나는 전생에 나다. 
전생의 내가 지금의 내 안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생에 내가 어떻게 했으냐에 따라서 업과 의식을 갖기고 하고

전생에 내가 어디에 살았느냐에 따라서
살았던 세계에서의 언어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결계를 치거나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결계를 해놓고 오늘의 지금의 나로 산다.

지금의 나는 수많은 전생의 나가 각기 저마다 내가 모이고 모여서

지금 나라고 하는 우리의 내가 되었다가

전생에 나, 그 전생의 나...수많은 전생마다의 내가 하나, 둘,....
수많은 윤회한 만큼의 내가 모이고 모여서
각기 저마다의 내가 지금의 내가 되어 있기에

전생의 각기 저마다의 나는 각기 저마다 생마다의 나이고
생마다의 나는 지금 내 안에서 나와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되어 전체의 내가 되어 있어서

한 생, 한생 드러내면 각기 다른 나이지만
하나로 보면 지금 현재 저마다 나라고 하는 나다.

이와 같이 지금의 나는 그냥 보면 한 몸으로
많은 전생 각기 생에서 너 나 없는 지금의 나이지만

지금의 내 안에 들어가서 보면 지금의 내가 있고 전생이 있고 그 전생의 내가 있다. 
수많은 윤회를 하며 살았던 각기 저마다의 내가 있다.

이런 관계로 나는 나이면 내가 아니고 내가 아니면서 나이다.

이러한 내 안에 수많은 나는 살았었을 때의 습으로 인한 업이 있어서

한몸으로 하나가 반응할 때 대응하며 드러나되 이것을 나라고 하고 나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 전생에 기억에는 없지만
전생 어느 때인가 살았던 습의 업으로 대응하며 드러날 뿐 지금의 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한 몸 속에, 
내 안에 너무 많은 나를 전생의 누구였을 때, 

윤회했을 몸을 받아서 살았던 현성했던 나의 또 다른 나를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전부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한 몸 안에 있음으로
나라고 지칭하는 한 몸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한 몸 속에 하나 있는 가운데 수많은 많은 나는
전생의 나로 각기 저마다 살았었을 때로의 나로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내가 아니지만 나라고 하는 것과 같이
나는 구별하여 인식하느냐에 따라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러일수도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여러 사람이 있을 때 각기 저마다 다른 것과 같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수많은 나도 각기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고

각기 저마다 다른 나는 여러 사람이 있을 때 각기 저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닫혀 있는 것과

내 안의 나도 이와 다르지 않게 닫혀 있거나 열려 있고, 

대부분의 많은 존재들 각기 서로 다르게
자기 자신 안에서 다른 모습이 되기가 싫어서 묶어놓고 결계를 해놓고 있으면서

그 당시 살았을 때의 업만을 드러내지만
그 자체로는 지금의 내가 아닌 내 안의 나로 한 몸을 하고 있는 존재의 나이다.

내 안의 수많은 나를 하나하나 깨우면

그 당시 살았던 능숙하게 잘했던 그 당시를 끄집어내고 결계를 친 부분을 없애거나 풀면
결계로 묶였던 전생이 풀려서 그 당시에 능숙했던 것들이 살아나서 좋아지게 된다.

결재는 보통 열쇠, 숫자, 알파벳, 로마자 밑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물을 통해서
문을 알게 하고 열쇠 내지는 숫자로 풀어야 할 수(數)를 보지 못하거나 소리를 듣지 못하면
풀 수도 없고 제거할 수도 없다.

비밀의 문을 열 듯 신비의 문을 열 듯 몇 개씩 되는 그 문을 열면

그래서 전생의 결계가 풀리면 전생이 살아나서 전생에 있는 것들이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내 안의 수많은 전생, 전생, 윤회한 전생의 모든 나다.

밖에서 보면 일체의 하나로의 나이지만 안에서 보면 각기 다른 내가 있는 것이다.

이는 여럿이 방에 있을 때 안에 들어가면 여럿이 있지만 밖에서 보면 그냥 한방인 것과 같이
밖에서 보면 한몸 하나로의 나이고
자기 자신 안에 들어가면 수많은 내가 있는 것은 나라고 하는 내 안에는 여럿 사람이 있는 것이다.

단지 다른 것은 하나의 방과 한몸에 비유해서 이야기했을 똑같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모두 다 일체의 나다 다만 각기 다르게 보니 각기 다를 뿐이지

전체에서 보면 일체의 나이고 나 아닌 것이 없이 모두 다 나이고
이 나는 내 안의 나이고 내 안의 나는 각기 다른 저마다의 나이다.

이는 윤회하면서 한생, 한생.... 각기 저마다의 나를 각기 저마다의 나라고 했을 때

윤회한 모든 전생이 한몸 안에 있어서 이를 통털어서 나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 안에 수많은 내가 한생 한생 업의 차이 각기 저마다 수많은 내가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라고 했을 때 우리들은 각기 저마다의 업을 다를 뿐

우리 모두는 전체에서 보았을 때 하나다.

2015. 09. 02 1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