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 저마다는 의식 전쟁 속에서 산다.
의식 전쟁 그래서 스타워즈다. / 칠통 조규일 우리가 살아가고 살아지는 생각 작용, 마음 작용, 상상작용 이 모든 행위로 드러나는 언행의 행위는 모두 다 의식 작용이다.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하고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마음을 일으키는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 없이 행하는 모든 행위가 의식적 행위이다. 의식적 행위가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모두 다 의식적 행위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 안에서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이루고 있는 일합상의 존재 존재자들이 움직이고 움직이며 의식적 싸움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각자 저마다 안으로부터 안에서부터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의식 싸움을 하고 이것이 밖으로 드러나면서 밖의 대상들과도 부딪칠 때마다 의식적 싸움을 한다. 깨어 있으면 깨어 있는 대로 깨어 있지 않으면 깨어 있지 못한 대로 옳으니 그르니 이거니 저거니 모든 언행과 어떤 것, 곳에 대한 선택적 행위를 하면서 한시도 그냥 두지 않고 의식 행위를 하며. 끊임없이 의식 싸움을 한다. 무엇인가 집중할 때만 의식 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 외에는 거의 모두 다 의식 싸움을 하고 있다. 우리는 너나없이 모든 존재 존재자들은 이와 같이 한시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움직이며 행동과 행위를 한다. 의식적 싸움을 한다. 존재하는 모든 존재 존재자들 각기 저마다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을 이루고 있는 일합상 일합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존재 존재자들은 각기 저마다 자기 자기 안팎에서 자기 자신 안팎으로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쉬지 않으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움직이며 의식 행동과 행위를 한다. 싸움을 한다. 의식 전쟁을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세계의 세상은 의식 전쟁터이다. 작게는 나에서 더 나아가서는 더 크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끊임없이 의식의 전쟁터에서 의식 싸움을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 죽기 위해서 위 세계로 올라가기 위해서 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보다 더 좋은 것을 얻거나 획득하기 위해서 보다 더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 보다 더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의식 싸움을 한다. 온 세상 천지는 어느 세계든 세상이든 모두 다 의식 전쟁터이다. 위아래 올라가는 것 역시도 치열하게 의식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각기 저마다 자기 자신 스스로부터 이는 더 좋은 것, 더 좋은 곳, 더 좋은 세계, 더 위 세계, 더 편안하고 더 행복하고 더 즐겁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의식 싸움을 하게 하는 것이다. 살아서는 이러한 우리들 각자 저마다 존재 존재자들이 영적인 의식에 맞게 죽어서 가도록 되어 있는 수없이 많은 세계가 은하수 그 이상 몇 곱절로 펼쳐져 있는 세계들로 들어가는 문의 통로로 들어가는 곳 되어있는 것을 스타워즈라고 한 것이다. 각기 저마다의 의식에 맞게 들어가는 곳을 스타워즈라고 하는 것은 이러하기 때문이다 각 세계에 살아 있는 존재 존재자들은 살면서 그 세계에서 그러하지만 살아 있던 세계에서 죽은 존재 존재자들 역시도 각자 자기 자신의 의식에 맞게 머무르지 않고 살아 있을 때와 비슷하게 위 세계로 끊임없이 올라가기 위해 움직이고 움직이기 때문에 이것이 마치 존재 존재자들 각자에게 전쟁과 같기 때문에 이들이 가도록 되어 있는 곳을 스타워즈라고 부른답니다. 우리들 각자 저마다는 살아가는 자체가 어느 세계의 세상에 살아있던 죽어있던 의식 전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자신 스스로 자기 자신 안팎으로 세계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 존재자들과 의식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있는 곳으로부터 2021. 04. 13 10:48 칠통 조규일 선사님 법문 발췌문 - 아래 세계의 믿음과 위 세계 믿음과의 차이 190210(일요법문) 문: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다 하고 불교에서는 ‘가피’를 입는다고 합니다. 그 ‘가피’라고 하는 게 도대체 그러면 능력이 안 되는데 기도는 합니다. 각 종교에서의 교주의 ‘가피’를 입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그 교주분들이 ‘가피’를 줬을까요, 사람들이 ‘가피’를 입었다고 할까요, 아니면 자기 인연, 공덕으로 이루어진 것을 ‘가피’라고 돌리는 걸까요? <김00> 신(神)은 자기 바깥에도 있고 자기 안에도 있다. 이 神이 드러남은 자기 안에 믿을 信으로부터 생긴다. 그러기 때문에 바깥에서 주는 것도 있지만 자기가 믿음으로써 자기 안에서부터 드러나는 것도 있다. 퍼센트로 봤을 때 ‘가피’라고 하는 것을 100이라고 놓고 봤을 때 자기 안의 믿음(信)으로 인해서 드러난 것이 85%이고 神들이 줄 수 있는 건 15%미만이다. 예를 들어 아미타불이 56단계 안 ‘반야바라밀 길’ 단계에 있을 때는 15%를 줄 수 있었는데 자등명 본향, 고향에 올라가니까 힘이 미약해서 0.2%를 못 넘는다고 한단다. 그러면 이것은 자기가 자기 안에서 믿음(信)으로 일어나는 게 85%라는 얘기다. 만약에 0.2%인 경우라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게 99.8%라는 것이다. 자기가 창조자이니까 그러면 옛날 어르신들이 얘기하시는 ‘그 정도로 빌면 부지깽이한테 빌어도 된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맞다. 그래서 神이 무지하게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를 믿든 간에 그 믿음으로부터 자기 안에서 드러나서 이루어지니까 ‧‧‧‧‧ 그러니까 중요한 게 뭐냐면 누구를 믿느냐가 아니라 믿음을 갖는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걸 통해서 스스로가 이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꼭 믿는 그 대상이, 예를 들어 어떤 교주가 됐든 교주가 아니더라도 열심히 뭐든 믿으면 대답이 들린다. 대답이 들리는데 이게 자기를 이루고 있던 수많은 존재가 대답해줄 수도 있고 주변의 영적인 존재가 대답해줄 수도 있다. 그런데 누구를 대상으로 놓고 기도를 해서 어떤 대답을 들으면 그 대상이 대답해 주는 걸로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뭐냐면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고 그렇다라고 인정한다. 그러면 누가 얘기해도 소용없다. 나는 내가 누구한테 기도했는데 이런 소리를 얻었다. 예를 들어 하느님한테 기도했더니 이런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 그것은 하느님이 대답해주는 거고 석가모니, 예수님한테 기도했더니 이런 소리를 들었다라고 하면 그분들이 대답해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기도를 그렇게 했고 응답으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답은 수많은 내 안의 나, 나와 인연된 주변의 영적인 분들, 어떤 교를 믿는다면 교를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神들보다 나하고 가깝게 늘 잘되게 하는 분들이 누구냐면 나하고 인연되신 조상님이다. 그러면 그런 분들<하느님,부처,예수>보다 조상님이 먼저 대답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걸 믿는 사람은 어쨌든 간에 대상을 두고 했으니까 들으면 그 대상으로부터 응답을 얻었다라고 하는 것이다. ............... 중략 190215 금요법문 문: 제가 만약에 어떤 의지가 있어서 그걸 계속 믿고(信) 의지를 갖고 집중하면 어떤 神을 만들 수 있다. 神은 내 안에서 나온다는 그런 말인지요, 이 세상에 나오는 神은 우리가 만들어낸 神이다라는 말인지요?<임00> 예전에 이 지구에는 토테미즘,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것이 처음에 생긴 그런 것들이 뭐냐면 지금 우리가 과학적으로 보면 황당하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그게 믿으면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루어졌다. 그게 뭐냐면 자기 안에서 믿는 信을 통해서 神이 드러나게 해서 가피를 받고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信은 자기 안에서 믿음으로 인해서 神이 드러나서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가 하면 또는 이 위 세계 올라오면서 神의 세계에서 내려와서 관리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이 지구는 지금 28,29,30단계에서 내려와 관리도 하고 또 더 위 세계에서도 관리를 하니까 그 많은 분들을 神이라고 지칭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지칭을 하면서 자기가 모르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 때 이들에 의해서 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 부분도 사실은 56단계에서는 더 위에서 관리를 받고 더 위쪽은 더 위에서 관리를 받으면서 다 전체적으로 얽히고 설켜 있으면서 네트워크처럼 이루어진 것처럼 다 소통이 되고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라도 자기하고 전혀 관계없는 일들이 일어나지를 않는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거의 다 자기하고 인연돼서 위아래 얽혀있어서 이루어지는 게 20%정도 되고 그다음에 자기 안에서 어떤 걸로 인해서 어떤 걸 믿고 받아들이고 또 행하느냐에 따라서 그걸로 인해서 神이 드러난다든가 나툰다든가 주변에 있는 분들이 행해준다든가 하면서 이루어지는 게 80%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안에서 자기 스스로 믿는 만큼 또 자기 안에서 믿고 행해진 만큼 자기 밖으로부터 이루어지고 행해진다라는 것이다. 190322 금요법문 문: 저희가 믿음이 있고 없고라는 것은 일단은 믿음을 전제로 하고 선원에 와서 공부하는 거지 단지 믿되 거기에 따르는 수행을 못하고 모자라는 점이 많고 현실에 부딪쳐 못가는 거지 저희가 선원에 와서 공부하는 걸로 보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지 않는지요? <이00> 앞서 얘기한 믿음은 질문한 것처럼 그런 믿음이 아니고 밝혀 온 이런 세계들에 대한 변질되지 않은 믿음, 밝혀온 세계들에 대한 올바른 법과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밝혀온 세계들에 대해서 그 법과 진리를 믿는다기보다 내 방식대로 그래서 자기가 현재 알고 있는 현재 의식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질문한 것에서의 믿음과 밝혀온 세계들에 대한 법과 진리, 어긋나지 않은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믿는다라고 했을 때 내 방식대로 즉 내가 현재 살아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쌓아온 현실에서 익혀온 이런 것들로 인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까지만 믿는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러냐면 우리는 살아오면서 남들한테 많이 당해 왔다. 당한 사람일수록 덜 믿는다. 왜냐하면 내가 온전히 믿게 되면 또 뭘 당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어떤 걸 믿어도 꼭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믿는다. 그다음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예 자기합리화하든가 믿음에서 제외시켜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는 믿음은 그런 게 아니고 어쨌든 이 세계들을 밝혀 드러낸 것에 있어서는 우리가 ‘본연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이것 자체를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적으로 믿을 게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들을 밝혀 드러낸 법과 진리는 어긋남이 없는데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믿기 때문에 그 법과 진리라고 하는 차원에서 보면 어긋나 있다라는 것이다. 그것을 올바른 믿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볼 때 물론 믿으니까 선원에 오는 거지만 어떤 믿음을 갖고 오느냐는 것이다. 제가<선사님> 밝혀온 이런 세계들에 대해서 온전히 우리가 가야 될 길이다, 또한 이게 ‘법과 진리다’라고 믿는 게 아니라 야, 그래도 가면 현실에 좋은 뭔가 주면 좋고 내가 불편한 게 있었는데 가니까 좀 낫더라, 그러니까 가서 그냥 좀 하면 그것도 믿음이다. 어쨌든 조그만 밀알이라도 그 믿음으로 시작하는 건데 그 믿음을 키워서 온전한 믿음이 돼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안 떨어지는 거지 밀알 같은, 씨 같은 믿음을 가지고 믿는 건 사실이지만 온전하지는 않지 않은가! 우리가 씨를 뿌렸다고 해서 다 싹이 트는 게 아니듯이 어느 순간 쭉정이 돼버리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쨌든 간에 밀알 같은 조그만 믿음을 가지고 온전히 아, 이렇게 보니까 예를 들어 내가 알고 있는 자라오면서 배워 온 걸로 이렇게 비춰 보니까 내가 모르는 건 몰라도 아는 것에 있어서는 틀린 게 거의 없더라, 그러면 내가 모르는 것까지도 믿어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로부터 자꾸 많이 당해온 사람, 내가 믿으니까 손해를 많이 보더라, 당했다는 이런 사람들일수록 믿음에 대해서 약하다. 늘 언제든지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왜! 아니면 내가 손해 보니까, 다치니까. 그러니까 다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우리가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많은 부분에도 이런 게 포함되어 있다. 나에 대한 진실을 다 얘기하면 그것이 언젠가 나한테 돌아와서 내가 해를 입더라. 이렇게 몇 번 당하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진실을 얘기 안 하게 된다. 어릴 때 자라나는 얘들을 보면 순수해서 다 얘기한다. 그런데 커가면서 거짓말하기 시작한다. 왜, 거짓말 하는가! 아, 내가 있는 그대로 다 얘기하다 보니까 내가 불편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아이일수록 더 많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보호하고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들로 생긴 믿음이 아니고 이것은 우리가 언젠가는 가야될 길이다. 이건 법과 진리이다. 이런 쪽의 얘기다. 그러니까 내 방식대로 내가 이러니까 내가 편한 대로 이런 믿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아까도 얘기한 것처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봐서 지금까지 성장해 오면서 나름대로 들은 것도 많고 공부 많이 하지 않았는가! 그럼 이제 그런 걸로 비춰봤을 때 틀리지 않고 맞는 부분이 더 많다라고 생각이 들면 전혀 접해보지 못한 거라도 자기가 맞춰본 것에 대해서 틀린 부분보다 맞는 것이 더 많으면 그만큼은 더 믿어줘야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그런 부분은 안 믿으려 한다. { 위 발췌문은 빛방 수행하시는 여러 도반님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올립니다. 다만, 법문을 듣고 옮기면서 문맥의 순서, 문맥 끊김(화제 전환), 말줄임, 못 알아들음, 덧붙임 말로 다소 내용 전달이 흐려질 수도 있지만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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