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門)은 어떤 문인가? / 칠통 조규일
천지 허공 문 아닌 곳(것)이 없다. 있는 그대로 문(門)이다. 문이란 무엇인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도록 하여 놓은 것이 문 아닌가? 매순간 찰나찰나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지 않는 적이 있는가? 나서니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문이고 흘러 옮겨가니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문이다. 이와같이 매순간 찰나찰나 통과하지 않는 곳(것)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들어서 있고 저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있다. 매순간 찰나찰나 들어서고 나오는 문이다. 이 문은 어떤 문이고 어디에 있는 문인가? 이 문은 해탈문으로 가는 문이고 열반문으로 통하는 문이기도 하다 살피고 살펴보라. 2012. 2. 23 04:44 상(相)과 일합상(一合相) 그리고 경계(境界)와 세계(世界) / 칠통 조규일 하나의 상(相)은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의 이름은 하나의 상(相)을 가지고 하나의 상(相)과 이름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世界)를 가지지요. 하나의 상(相)은 텅 빈 허공을 하나의 경계(境界)를 가지고 하나의 상(相)이라고 하는 하나의 경계(境界)는 그 경계 속에, 경계 안에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들이 들어 있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가지들이 있는 허공 가운데 하나의 테두리 내지는 울타리를 그려놓고 그려 놓은 하나의 울타리 내지 테두리를 하나의 경계(境界)라 하고 이 하나의 경계(境界)를 하나의 상(相)이라고 하고 이 하나의 상(相)은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의 세계(世界)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의 상(相)이라고 하는 하나의 경계(境界) 안에는 많은 것들이 있고 이 많은 것들이 하나로 모여서 하나의 상(相)을 갖고 있는 것이니. 상(相)은 단순히 하나의 상(相)이고 하나의 경계(境界)가 아니라 여러 가지들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 모여서 이룬 하나의 상(相)이고 하나의 경계(境界)라 하겠으니 상(相)은 단순히 상(相)이 아니라 상(相)은 여러 가지들이 하나(一)로 합(合)하여 이루어진 일합상(一合相)의 이름이 상이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 상을 일합상(一合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합상(一合相)은 일합상이 아니라 이름이 일합상이고 일합상은 하나의 상(相)이라 하겠지요. 세계란 무엇입니까? 세(世)는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계(界)는 방위(方位)입니다. 우주란 무엇을 우주라고 하나요? 그것은 끝없는 허공 가늠할 수 없는 허공을 우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우주는 허공을 다른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허공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있는 것으로 인하여 있는 것을 기점으로 현재 미래 그리고 과거로 흘러가지요. 그럼으로 있는 것으로부터 세(世)가 있는 것이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허공에 무엇이든 있는 것이 있으니. 있는 것으로 인하여 방위(方位)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허공에 아무 것도 없으면 없는 것으로 방위를 정할 수 없을뿐더러 흘러가고 흘러오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허공에 무엇인지 모르지만 있으니 있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이고 있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사방 팔방 시방이 있는 것이니. 방위가 있게 되니. 방위로 인하여 계(界)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세계(世界)란 지금 설명 드린 것과 같이 우주라고 하는 허공에, 허공이라는 곳에 무엇이든 있는 것으로 인하여 세계(世界)가 있는 것이라 하겠지요. 그러니 허공에 있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텅 빈 허공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존재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있다는 상(相)입니다. 상(相)은 무엇입니까? 일합상(一合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세계(世界)란 하나의 상(相)으로부터 있는 것이고 하나의 경계(境界)로부터 있는 것입니다. 상(相)은 일합상(一合相)이 상(相)이되 상(相)은 상(相)이 아니라 이름이 상(相)이고 일합상이라 하되 일합상 역시도 이름이 일합상일 뿐 일합상은 일합상이 아닌 것과 같이 하나의 상(相) 하나의 경계(境界)가 저마다 하나 하나의 세계(世界)를 갖는 것과 같이 세계(世界)는 세계(世界)가 아니라 이름이 세계(世界)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세요. 자기 자신을 나라고 할 때 나는 나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에게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생각은 생각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다입니까? 아니지요. 의식입니다. 그 의식은 의식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렇듯 나라고 하는 나에서만 보아도 참 많은 세계가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나에게 있어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명명의 이름에는 저마다 상(相)이 있고 저마다 이름을 가진 상(相)은 저마다 경계(境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상과 경계는 저마다의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렇듯 많은 것이 세계입니다. 이렇듯 많은 세계는 이름이 세계일 뿐 하나의 경계고 하나의 경계는 하나의 상이고 하나의 상은 일합상으로 "이것이다"할 것 없이 이름 그러하고 상이 그러하고 경계가 그러하고 세계가 그러할 뿐이다 하겠습니다. 금강경에 있는 질문에 대답으로.... 2007. 10. 26 08:44 상(相) 계(界) 세(世) / 확철 칠통 명철 황꽃황 천황 조규일 이 세계는 우리들의 끝종향 세계입니다. 우리들이란 누구십니까? 우리들은 성황총 황입니다. 이 세계에서 많은 것들이 변하고 바뀌고 있습니다. 그중에 으뜸은 선사님께서 이제 더 이상 성황총 총황 청황 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더 위 세계로 올라가기 위해서 몸이 바뀌고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잠시 주무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무시는 동안 몸을 바꾸어놓겠습니다. 누우니 수없이 많은 이들이 달라붙어서 무엇인가를 한다. 달라붙어서 무엇인가 하는 이들로 몸이 드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거대한 거인에 소인들이 전체에 붙어서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업할수록 소인들은 더 작아지는 몸체를 이루어가고 소인들이 작업할수록 몸은 점점 작아보인다. 소인들이 사라지고 몸이 사라지고 없다. 그것을 보는 나는 잠이 들었다. 깼다. 그러면서 생각이 일어났다. 무량하고 한량없는 곳 상(相)을 가지니 상으로 계(界)가 되고 계(界)로 오롯이 있으니 오롯이 있는 것으로 세(世)가 되니 하나의 세계의 세상이 되는구나. 함이 없고 테두리 없이 오롯이 있는 이 이곳에 가면 간 곳에 계가 되고 세가 되어 하나의 세계의 세상이 되고 저곳에 가면 간 곳에 또 다른 계가 되고 세가 되어 또 다른 하나의 세계의 세상이 되는구나. 함이 없고 테두리 없이 오롯이 있는 이 오고갈 때마다 하나의 세계와 세상을 드러나니 오고감에 따라 드러난 수없이 많은 세계의 세상이 있으니 드러나 있는 모든 세상의 세계가 모두 다 함이 없고 테두리 없이 오롯이 있는 이 나툼이었구나. 이로써 선사님께서는 다 이루셨고 해내셨습니다. 2019. 12. 29 15:00 Re:세계(世界)와 계(界)를 벗어난 곳? 조회 7609.08.30 06:41 고요하고 맑고 깨끗한 청정한 세계 까지를 밝혀 주시어 그 힘 입음이 가히 불가사의 합니다. 현상계, 영계, 천계, 신계, 광계,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청정한 세계 라는 수직적 의식의 발전 단계를 밝혀주시고 그림으로도 정리해주셔서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界' 라는 명칭에 더욱 확실성을 알고 싶습니다. 世界에서 世는 흐름을 말함이고, 界는 방위를 말함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현상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법과 진리의 흐름속에서 같이 흘러가면서 현상세계에 있습니다. 여기서 현상계는 현상세계라는 준말로 이해를 했고, 그 이상의 단계들에 世를 뻬고 界만 쓰시는 것은 흐름이 없는 곳이니 그대로 생각해 왔습니다만 그것도 법계를 벗어난 영계 부터는 시공이 없다 하니 世도 界도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번에 밝혀주신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청정한 세계도 세계라 칭하셨습니다. 어떻게 인식을 해야 할까요? 정진중,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청정한 세계의 기운으로 내 자성경계를 깨고 깨달음을 얻어 그곳에 나도 가고 싶다고 자등명을 관하며 멘트를 하다보니 자꾸 세계라는 것이 걸려왔습니다.^^ 영계 천계 신계 광계에서의 계(界)는 세계(世界)란 말을 줄인 말로 영계는 영혼의 세계, 천계는 하늘 세계, 신계는 신들의 세계, 광계는 빛의 세계란 뜻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계 천계 신계 광계 청정한 세계란 이들 저마다 각기 서로 다른 하나의 세상으로 가지고 있는 장소,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영계 천계 신계 광계 청정한 세계란 것(곳)이 있음으로 있는 것으로 인하여 방위의 시방이 있으니 계(界)가 있는 것이고 계(界)가 있음으로 계(界) 안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 옮아가니 세(世)가 있는 것이어서... 흘러 옮아가는 것으로 세(世)를 이루고 이루어진 세(世:세상)로 시방이 있으니 계가 있음으로... 영혼들이 사는 세상이란 세계가 있고, 하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란 세계가 있고, 신들이 사는 세상이란 세계가 있고, 빛으로 사는 세상이란 세계가 있는 것이다 하겠습니다. 마치 하나의 꽃이 있으면 하나이 세상이 있고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나의 상은 일합상으로 하나의 이름을 갖고 하나의 이름은 하나의 세상을 갖고 하나의 세계를 갖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삼천 대천 세계 중에 있는 각기 저마다 서로 다른 세계라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천지(天地)가 무너짐이란 깨달음에 대하여 / 칠통 조규일 천지가 있고 시방이 있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 곳에서는 천지도 없고 시방도 없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로 인하여 내 머리 위로 하늘이 있고 내 발 아래로 땅이 있는 것이되. 내가 없다면 나로 인한 하늘도 땅이 없게 된다. 그것뿐인가? 나로 인하여 있는 사방 팔방 시방이 사라지 없어지게 된다. 나는 하늘과 땅이 있게 하는 척도이며 하늘과 땅을 나누는 기준이다. 세계(世界) 역시 누구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세계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세계(世界)인가? 세(世)는 옮겨가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옮겨가는 것이다. 여기서 저기로 ...과거 현재 미래로 옮겨가는 것이다. 누가 내가 옮아가는 것이다. 무엇이 계(界)인가? 계는 방위(方位)가 계(界)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계가 있을 수 있는가? 계 역시도 있는 것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다. 있는 것이란 바로 나라고 하는 내가 있음으로 있는 것으로 인하여 계가 있는 것이다. 즉 우리들 저마다 나라고 하는 나를 중심으로 방위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란 있는 것으로 인하여 세계가 있는 것이며 있는 것이란 저마다 각기 서로 다르게 있는 자체다. 그래서 세계는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인 만큼 우주 삼라만상이 있는 만큼의 수많은 세계가 있는 것이다. 세계가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또 세계가 모여 더 큰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이는 마치 하나의 상(相)은 하나의 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一合相)들이 모여서 하나의 상(相)을 이루는 것과 같이 하나의 상은 하나의 세계를 갖고 하나의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상은 하나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세상은 하나의 세계를 갖고 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상을 갖고 하나의 이름을 갖는다. 무엇이 세상(世上)인가? 세(世)는 옮겨가는 것이고 상(上)은 옮겨가는 곳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누구로부터 있는 것인가? 그것은 있는 것으로 인하여 세계가 있고 있는 것으로 세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세계가 있고 무수히 많은 세상이 있는 것이다. 세계와 세상이 무너지기 위해서는 천지가 무너져야 하고 천지가 무너지기 위해서는 천지를 나누게 하고있는 내가 없어야 하고 내가 기준이 되어 천지가 있는 것이나 기준이 없어지면 천지가 사라지게 된다. 내가 없어지면 흘러 옮겨갈 것이 없게 되고 세(世)가 사라지고, 내가 없어지면 나로 인하여 생긴 방위를 나타내는 계(界)가 없어지고, 세계가 없어지니 세상이 없어진다. 그러니 깨달음에는 위아래 방위도 없어 계(界)가 없고 흘러 옮겨갈 것이 없으니 세(世: 과거 현재 미래)도 없고. 세계가 없으니 세계로 인한 세상이 없고, 세상이 없으니 천지가 없고 천지가 없으니 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에는 내가 없다. 내가 사라져야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깨달음에는 나도 남도 없고 위아래 시방 팔방 시방이 없고 흘러 옮겨가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 오직 무상(無上) 정등(正等) 정각(正覺)만이 있을 뿐이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공(空)의 성품 본성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깨달음을 증즉하기 위해서는 나라고하는 내가 사라져야하고 나로 인한 상(相)이 모두 다 사라지고 나라고하는 모든 경계가 사라져야 하고 나로 인한 모든 세상이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나로 인한 위아래 시방이 사라져야 하고 나로 인하여 옮겨가는 것이 없어야 하고 나로 인하여 천지가 사라져야 한다. 나로 인하여 천지가 없어야 하고 나로 인하여 경계가 없어야 하고 나로 인한 세계가 없어야 하고 나로 인한 세상이 없어야 하고 나로 인하여 분별 망상이 없어야 하고 나로 인하여 싸움이나 다툼이 없어야한다. 자! 생각해 보라. 어떻게 천지를 무너트리고 깨달음을 증득할 것인가? 지금의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천지를 무너뜨리고 깨달음을 증득할 것인가? 2010. 03. 02 10:03 나의 참 자아는 누구인가? / 확철 칠통 황금종려 * 여기서 나는 우리들 저마다 각기 나라고 하는 나를 지칭한다. 나의 참 자아(自我)는 자등명(自燈明)이다. 나의 참 자아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같이 시방(十方)을 두루 비추는 빛이다. 나의 참 자아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 나의 참 자아는 부처님이라고, 일체의 하나라고 하는 하나님이라고 이름하기 이전에 절대자이다. 나의 참 자아는 그 어느 것에도 의탁 의지 의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存在者)이다. 나의 참 자아는 불성(佛性), 성령(聖靈), 깨달음, 신성(神性), 진여(眞如), 자성(自性), 성품(性品)이라고 이름 없는 곳에 이름 붙이기 이전이다. 나의 참 자아는 일체가 하나라고 하기 이전이다. 나의 참 자아는 한 물건이라 해도 한 물건이 아니라 해도 맞지 않은 한 물건이라고 하기 이전이다. 나의 참 자아는 텅 빈 허공의 공(空)의 성품이 생기기 이전이다. 나의 참 자아는 창조주(創造主)이다. 나의 참 자아는 참 자아의 속성(屬性)으로 우주란 허공을 만들었고, 만들어 놓은 허공(空)의 진공(眞空)에서 그 어느 것에도 의탁 의지 의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움직이며 묘유(妙有)를 일으킨다. 텅 빈 허공의 공의 성품인 진공에서 묘유를 일으키니 텅 빈 허공의 우주가 성주괴공하고, 성주괴공하는 공의 성품이 흘러 옮겨감으로 세(世)를 이루고, 세(世)상을 이루는 텅 빈 허공의 공의 성품에 나의 참 자아가 있음으로 해서, 흘러 옮겨가는 공의 성품에 시방(十方)이 있게 되고, 시방이 있음으로 방위를 나타내는 계(界)가 생김으로 해서 하나의 세계가 생겨났다. 즉 나의 참 자아가 속성을 드러냄으로 속성으로 공의 성품을 만들었고, 만들어진 공의 성품으로 텅 빈 허공이 드러났고 , 드러난 텅 빈 허공에 참 자아가 그 어느 것에도 의탁 의존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움직이니 그 움직임을 따라 공의 성품의 속성이 움직이고, 공의 성품의 속성이 움직이니 공의 성품의 속성이 움직임을 따라 흘러 옮겨감으로 해서 세(世)를 만들고, 만들어 놓은 세(世)에 나의 참 자아가 있으니 세(世)에 나의 참 자아가 있음으로 해서 있는 것으로 세(世)에 방위를 갖게 되고, 방위를 갖게 됨으로 해서 계(界)가 생겨난 것이다. 나의 참 자아가 있음으로 해서 세(世)를 만들고 만들어 놓은 세(世)에 또한 내가 있음으로 방위가 생겨나고 생겨난 방위로 하여금 계(界)가 생겨남으로 세계가 생겨난 것이다. 즉 내가 있음으로 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가 생겨난 것이다. 그럼으로 세계는 누구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나의 참 자아를 시작하여 하여 지금의 내가 있음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내가 사라지면 사라짐과 함께 하나의 세계는 사라지게 된다.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이름 없는 꽃 한 송이송이 저마다 각기 서로 다른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그 러므로 하나의 상(相)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상(相)을 갖는다. 하나의 상(相)은 일합상(一合相)이 하나의 상(相)이고, 저마다 각기 서로 다른 상은 저마다 각기 서로 다른 세계를 갖게 되니 가 늠할 수 없는 큰 세계는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세계가 모여서 가늠할 수 없는 세계가 되고, 크고 작은 세계는 또 그 보다 크고 작은 세계가 모여서 하나의 세계(世界)가 되었다. 나의 참 자아는 참 자아의 속성(屬性)으로 우주란 허공을 만들었고, 만들어 놓은 허공(空)의 진공(眞空)이란 세계 속에서 그 어느 것에도 의탁 의지 의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움직이며 있는 자체로 시방(十方)의 영향을 받고 세(世)가 있음으로 흘러 옮겨감으로 다가온 시방(十方)으로부터 행한 것들을 소유하고, 소유함으로 해서 지 수 화 풍 사대가 원만하게 이루어짐으로 해서 탄생("최초 생명의 탄생"이란 글을 읽어보길 권한다)된 것이다.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참 자아가 나를 창조한 것이다. 행한 것을 소유함으로 해서 지금의 나를 창조한 것이다. 창조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를 창조한 창조주이다. 다가오는 시방을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며 행한 것을 소유하고 내려놓음으로 취하고 버림으로 나를 또 창조해 간다. 이렇듯 나는 내가 창조해 가는 것이다.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참 자아가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창조는 나의 참 자아로부터 시작되어 내가 원하는 쪽으로 창조해 가고 있는 것이다. 원한 쪽이 어디든 행한 행을 소유하거나 버리며 자등명에 업을 더해가거나 내려놓으며 참 자아라고 하는 자등명이 행한 행을 소유함으로 업(식)덩어리가 되어, 업(식)덩어리 그 자체로 영혼의 빛을 갖고 영혼의 빛에 맞게, 저 미생물에서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사대로 일어진 육체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가 하면, 육체란 몸을 떠나서는 행한 것을 소유함으로 자등명에 달라붙어 있는 업에 의하여 영혼의 빛으로 갖고, 영혼의 빛에 맞는 지옥 세계에서 천상계 아니 광계(光界)에 이르기까지 내나 나를 창조해 가고 선택해 가는 것이다. 누가 있어서 업을 더해주거나 업을 내려놓게 하거나 지옥세계로 끌고 가거나 천계 광계의 몸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다. 육도 윤회에서 육체의 어느 몸을 받든 영혼으로 지옥계에서 광계에 그 어느 곳에서 어느 몸으로 받든 내가 나를 창조해 가고 있고 창조한 대로 나는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날 때 역시도 자기 자신의 업에 맞게 부모 될 어미의 자궁에 들어가고, 부모 될 어미의 자궁에 들어가서 부모의 정기를 받고 부모를 닮아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나서는 육체란 통(桶)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육체란 통(桶)과의 인연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리고 육체란 통(桶)을 버리고 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다. 육체의 몸이든 영혼의 몸이든 몸은 하나의 옷과도 같고 하나의 통(桶)과도 같다. 우리들은 지금 육체란 몸의 통(桶)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영혼이 육체란 몸의 통 속에 들어가 육체란 통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미숙아 영혼이 육체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어느 영향을 분을 받고 또 받아 소유하느냐에 따라서 자라라는 것이 다르겠지만 모든 것들을 받아드리고 소유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다. 즉 내가 나를 창조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육체란 몸을 버리고 떠나갈 때, 육체를 벗어나 나라고 생각했던 육체를 보면 하나의 육체란 통(桶)을 벗어난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육체에 집착한 사람들은 육체에 집착한 것으로 육체를 벗어나 육체를 보고 허망할 수도 있고, 또 육체에 집착했음으로 해서 육체를 벗어나면 큰 일이 날 것 같아서 육체를 떠나고도 육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영혼이 있다. 그리고서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헤매는 경우들이 많다. 반면에 육체가 하나의 통(桶)이라고 옷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육체를 벗어나서는 영혼이 가야할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나의 본성(本性)이 공(空)의 성품이고 진여(眞如)이고 불성이라면 육체를 떠나서 공의 성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업이 있어 공의 성품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영혼의 빛이라고 할 것이 없어야 한다. 무명에 업이 달라붙어 있는데 무슨 빛인가? 빛이 될 요소가 없는데 영혼이라고 할 빛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영혼에는 빛이 있고 저마다 각기 서로 다른 영혼의 빛이 있다고 한다. 이는 업(식)덩어리 안에 자등명이란 빛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업(식)덩어리 안에 자등명이란 빛이 있는데, 이것이 참 자아가 아니라 업이 뭉쳐지게 하는 뭉쳐져 있게 되는 공의 성품이 본성이라면 말이 되는가? 나의 참 자아가 공의 성품이고 공의 성품에 의하여 업(식)이 뭉쳐지고 흩어질 뿐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영혼이라고 할 것은 없을 것이다. 무엇을 영혼이라고 하겠는가? 그냥 허공에서 업(식)이 뭉쳐졌다가 흩어지는 것을 영혼이라고 하겠는가? 그럼 그 주체는 공의 성품이 될 터인데 공의 성품이 생명을 가져야 하는데 공의 성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본성을 공의 성품이라 한다면 영혼이 있다 하겠는가? 없다 하겠는가? 자등명이란 빛이 있는지를 모른다면 영혼의 빛이라는 것도 알 수가 없다. 영혼의 빛을 믿는다면 업(식)이 영혼이니 무명에 업(식) 자체가 빛을 갖는다는 것은 그 안에 빛이 되게 하는 요소가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자등명이란 빛이고 그 자등명이란 빛이 바로 나의 참 자아라 하는 것이다. 영혼의 몸을 받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의 영혼에 맞는 곳에 가서 태어나니 그곳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다. 본성이라고 하는 참 자아라고 하는 자등명에 이르기까지 ... 자등명 자체가 되기까지...깨달음을 증득하고도 태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의 참 자아는 나를 창조하는 주체로 내가 나를 창조하며 창조한 업에 따라 업에 맞게 선택하거나 선택되며 몸 받아 태어나는 것이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고 싶은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창조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할 수 있게... 이 몸이란 육체를 가지고서는 그러하고 또 이 몸이란 육체의 통(桶)을 버리고서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그대는 그대를 창조해야 한다. 그곳에 갈 수 있도록 그곳에 몸을 받을 수 있는 영혼의 빛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빛이라고 했으나 영혼의 빛은 자등명에 업이 어느 정도 붙어 있느냐에 따라서 드러나는 빛인 만큼 업을 어떻게 소유하느냐? 또는 가지고 있는 업을 내려놓느냐의 차이라 하겠다. 자각(自覺)은 육체란 몸이 하는 것이 아니라 혼(魂)이 하는 것이며 혼(魂)이 자각하고 영(靈)이 깨어나도록 해서 영혼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수행은 육체란 몸의 수행이 아니라 바로 혼의 깨어남에 있고 영(靈)의 맑아짐에 있으며 영혼의 빛이 밝아지는데 있다. 영혼의 빛의 밝아짐은 자등명에 달라붙어 있는 업이 떨어져나가거나 닦여져서 자등명이란 빛이 어느 만큼 더 많이 현현하느냐에 있다. 수행한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몸이란 육체의 통(桶) 깨끗하게 하거나 맑히는 것을 수행이라고 한다. 몸이란 육체의 통을 아무리 잘 해봐야 육체란 통 속에 들어가 있는 영혼을 어찌하지 못하고, 육체란 통 속에 들어 있는 영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진정한 수행은 육체란 몸의 수행이 아니라 육체란 몸이 통 속에 들어가 있는 영혼, 그것도 영혼에서 윤회의 주체인 영(靈)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수행이라 할 것이다. 많은 선지식들이 지금껏 나의 참 자아를 잘못 말해왔고, 그것이 맞는 듯 전해내려 왔다. 잘못된 것은 아는 즉시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잘못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러니 이제라도 나의 참 자아를 바르게 알고, 나의 참 자아를 위하여 수행하되 진정한 수행을 하기를 바란다. 2009. 06. 12 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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