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담론

[질문에 대답]공부된 사람의 화는 왜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되고...여여할까?

칠통漆桶 조규일 2006. 8. 10. 08:47
제목  [23회] 공부된 사람의 화는 왜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되고...여여할까?
등록일  2001-12-22
조회수  34회
No: 646 글쓴이: 칠통 시간: 2001-06-18(월) 04:53:56 조회: 51

공부된 사람의 화는 왜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되고...여여할까?  / 칠통 조규일


공부된 사람의 화는 왜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되고
그 어떤 언행을 해도 얽매이지 않고 본성 그대로 여여할까?

"공부된 사람들의 화는 일반인들과 달리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되어 자신은 본성 그대로 여여하다" 라 하시니. 그 뜻을 밝혀주시겠습니까? 650

공부된 정도의 차이에 따라 경지가 다르듯
마음 씀씀이가 다르고
사랑과 자비의 베풂이 다르고
본성 그대로 여여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수행하여 경지가 올라 갈수록 마음 공부가 되면 왜 그렇게 되는지 밝히도록 하지요.
지금 밝히고자 하는 것을 이미 하나나 둘 정도는 경험한 분도 있을 것이고
경험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단계에서부터 그런지 지금 생각이 나지 않으니.
그렇게 되어 가는 과정만을 설명하리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수행하여 경지가 높아갈수록... 공부가 익어갈수록....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을 일념으로 하다보면
공부가 익어가고 경지가 높아지는 가운데
어느 순간부턴가 자신이 화를 내면 자신의 몸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몸이 아프니. 수행에 진척이 없고
아픔을 스스로 치유해야 하는데 그 치유 시간이 오래 지속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 어쩔 수 없는 부딪침에서 자신도 모르게 또 화를 냅니다.
이런 경험을 한 번 두 번 반복될수록...
그대 같으면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그대는 어찌하겠습니까?
자신의 몸을 생각해서 화를 안 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왜 화를 내면 내 몸이 아픈데 어느 누가 화를 내려고 하겠습니까?
이는 수행하는 사람이 공부가 익어가고 경지가 높아지면 마음 공부에 있어
더 높은 경지를 향해 가는 길에 있어
지나쳐야 하는 하나의 코스인가 하면 과정입니다.
이런 과정을 걸치지 않고 가는 길을 달리 저는 모릅니다.
꼭 걸쳐야 하는 코스인가 하면 과정입니다.
화를 안 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래도 화를 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겠지요.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화를 내겠지요.
이런 생각이 들 때
어떤 마음에서 화를 낸다고 그대는 생각하겠습니까?
상대방을 염두 해두지 않고는 화낼 수 없을 것이며
염두 해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상대방에 대하여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할 것이고
배려하는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겠는지요?
사랑과 자비가 근본이 되지 않겠습니까?
수행하여 공부가 되어 가는 사람은 화를 내면 자신의 몸과 마음이 아프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고 화내는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한 두 번은 아니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며
결국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고 화내는 방법을 찾게 되겠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가 된 사람의 화는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고
그것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수행은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한 소식 깨달음까지는 아직도 멀고 험합니다.
이런 속에서 계속 수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화를 내지도 않고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의 동요가 없었는데
그리고 몸이 아플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어떤 사람 옆에 가니. 갑자기 몸이 아픕니다.
몸이 아프니. 자신의 몸이 아픈 부위를 치유하겠지요.
아픈 부위를 치유하고는 '그때 왜 갑자기 아팠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맨 처음엔 이유를 모르다가 한 번 두 번 반복될수록 이상이 여기고
급기야 갑자기 몸이 아픈 부위를...
옆이나 앞에 있는 사람에게 '어디 아프지 않으세요' 물어보게 되고
자신이 갑자기 아픈 부위와 똑같은 곳이 아프다는 사실에 속으로 놀라고
이러기를 여러 차례 갑자기 아팠던 부위를 자아 치료하고
그 사람에게 물어 봤을 때, "이상하네. 근방 아팠는데. 괜찮으니."
이런 말을 듣기를 여러 차례
이때야. 비로소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 말씀하신 유마거사의 말이 생각나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마음 공부는 어찌 되 가고 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그러면 '본성 그대로 여여하다' 한 말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인가?
아닙니다.
수행은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한 소식 깨달음까지는 아직도 멀고 험합니다.
이제는 전보다 공부도 더 되었고 경지도 높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체험합니다.
그런데, 보고 체험한 것을 마음속에 묻어 두고 그것들을 생각하니.
수행이 안되고 진척이 없다.
몇 날 몇 달을..... 이렇게 되면 그대 같으면 어찌하겠습니까?
한 소식 깨달음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전보다 더 수행에 전념하겠지요.
그리고 수행에 전념하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잊져버려야지(방하착) 잊져버리지 않고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수행이 되겠습니까?
그대가 지금 수행을 하니 알겠지만
수행 중 다른 생각이 나면 수행이 되던가요? 안되던가요?
다른 생각이 머리 속에 있는 한 수행이 안될 것입니다.
수행에 깊게 들어가다 보면 자연히 잊져버리게 되지요.
그리고 급기야 한 소식하게 되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담금질하며 왔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았다가 잡았다가, 잡았다가 놓았겠습니까?
이런 가운데 실오라기 풀 듯 얽히고 설킨 것들을 풀어 왔는데
얽히는 것이 무엇이고 얽히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데
그대 같으면 얽히겠습니까?
급기야 마음의 실체, 본성을 보고 체험했다면
그대는 어찌하겠습니까?
그 여여함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 큰사랑과 자비
이름이 없고
말하니 어긋나고
허공 가득 빈 틈 없이 들어 찬..... 이 부분은 여기서 멈추고.....
본성 그대로 여여하다란 설명을 이것으로 부족할 것인 즉,
"공부된 사람 자신은 본성 그대로 여여하다"
이 말은 공부된 분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딪치는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두면 마음에 둔
그것으로부터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당합니다.
이때가 되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당합니다.
앞에서 설명들인 것처럼... 괴롭지 않기 위하여 흘려버리는 것이고
인연에 맡겨두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얽매이지 않게 되고
본성 그대로 여여해 지는 것입니다.
어쩌다 아주 사소한 것에 얽히어
몸과 마음이 괴로우면 그것을 관찰하며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본성의 자리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켜 괴롭히는지.
괴로움의 실체와 그 작용을 보고
본성의 묘한 작용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 놈이 나를 괴롭히는구나' 하며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오고
얽히려는 그 놈을 풀며 빙그레 웃습니다.
공부된 사람들은 이러할 진데
공부된 사람이라면 어찌 본성 그대로 여여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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