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에 질문에 대답한 글..

깨달음의 인가와 불인가?

칠통漆桶 조규일 2007. 4. 10. 17:30
제목  [84회] 깨달음의 인가와 불인가?
등록일  2002-04-21
조회수

 24회

 

깨달음의 인가와 불인가?  / 칠통 조규일

 

 

지난해
선가에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스님이(이름이 가물가물) 수행 끝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깁니다
-지난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참으로 가난이다
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올해는 송곳조차 없다-
그러자 스승이 그대가 여래선은 알았을지 모르나 조사선은 모른다하시며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에 그 스님은 더욱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고 지난날의
게송은 깨달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요즘의 정신세계 쪽의 흐름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을 하고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어
위와 같은 게송과 비슷한 경험들을 말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내가 없다느니 비우고 비워 더 이상 비울 것도 없다느니 본래 내가 없다느니..
거의가 송곳조차 없다는 위의 체험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공언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깨달은 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인 자리를 확연히 보고
전체가 하나인 자리를 체험을 통하여 확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체험이란 우주와 수행자와의 같은 의식으로의 공명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주를 말했으나 우주란 전체가 하나인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척하는 데에는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깨달은 분들의 여러 종류의 책을 통하여 답습하고 또는 알음알이 내고
또는 흉내내고, 척, 눈빛만 배워...
수행 중 어떤 현상에 빠져....
수행 중 알음알이 내어...
전체가 하나인 자리와 수행자 자기 자신과 공명현상에 의하여
자기 자신의 칠통이 깨진 것이 아니라...
한 소식,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우주와 공명현상 없이 하는 소리(말과 행동)들이...
모두 다 깨달은 척하는 부류에 속한다할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지 않고 깨달은 척하는 부류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질문을 던져 놓은 어떤 스님의 게송은 말 그대로 게송에 불과하고
오도송이 아닙니다.
비유로밖에 설명드릴 수밖에 없으니.
비유를 들어 설명하리니.
알음알이 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아름다운 그릇 하나가 있다고 합시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예를 들어 녹차 잔이 있다고 합시다.
녹차 잔을 본 사람은 녹차 잔 전체가 꼭 아닐지라도
자신이 본 녹차 잔 어느 한 부분을 누군가 설명한다면
녹차 잔을 설명하는지 녹차 잔 말고 다른 것을 설명하는지 바로 알 것입니다.
그러나 녹차 잔을 조금이라도 설명한다면
아! 바로 그 녹차 잔을 설명하고 있구나.
그래! 보았구나.
그래서 깨달은 분들이 인가(認可)를 하고 아니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통하여 얻은 것을
깨달음을 얻은 스승에게 점검 받고 인가(認可)를 받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것까지 설명해 주어도 될지 모르겠군요?
혹 또 질문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스님의 게송에 스승이 "여래선을 알았을지 모르지만 조사선은 모른다 하심은"
여기서 여래(如來)의 뜻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나와 내 안의 사람들과 깨달음에 대한 질의 응답"이란
글에 설명한 여래(如來)에 대한 글을 옮겨왔으니.
그 뜻을 살펴 보십시요


["여래란 무엇입니까?"
'모든 사물의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말합니다.
다가오는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보고 듣고,
보면 보는 성품 자체가 되고 들으면 듣는 성품 자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여(如)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를 의지처로 삼으라한 것입니다.
이때 여(如)는 법(法)이 다하여 없어진 것이고 법이 생기지 않는 것이며
법으로부터의 원리고 법의 열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범부 중생 성문 독각 부처의 경지 모두가 여에서 비롯된 경지입니다.
이러한 여는 오는 것도 아니요.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요.
어떤 상태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아니요.
그것을 방해하는 아무 것도 없고,
어디나 존재하고 부서지는 일도 없고,
나뉘어지지 않는 불이(不二)이고,
어떠한 때라도 여가 아닌 일이 없고 항상 여(如)입니다.
여에 들어감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든 법과 상(相)에 들어가고,
여라는 존재 양상에 들어감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든 법의 상에 들어가고,
여를 초월하여 다른 법을 설하는 것을 들어도 의심하지 않고
미혹되지 않고 시비(是非)를 말하지 않으며,
여는 여에 의하여 작용하되 그러면서도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습니다.
즉 모든 법에 저절로 있는 여(如)에,
모든 법은 모두 여(如)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뜻(이치)은 알았을 지 모르지만
조사선이란 무엇입니까?
불립문자에서 오직 한 소식 확철대오를 위하여 수행하는 것입니다.
즉 한 소식, 확철대오의 공명현상에서 오도송(게송)을 읊은 것이 아니니
스승님이 조사선을 모른다하심이고 인가(認可)를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제 문학서재에 역대 고송들의 오도송을 올리고 있는데
아직 다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오도송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스님들의 것에도
오도송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어느 것이 오도송이고 어느 것이 아닌지
읽어보고 알음알이 내어보세요.

2001. 12. 28



한가지 의문은...제가 배운 바로는 깨달음의 과정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우주의식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즉 우주와 내가 하나되는 체험.
또는 신아일체관-신과 내가 하나라는 느낌 이런 것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상태이지만 이것도 결국은 진실한 깨달음과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인도의 많은 성자들이나 티벳의 성자들이 바로 이 우주의식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들의 모습에는 성속을 초월한 것이 아닌
오직 성스러움만이 드러나게 되고 여기에 미묘한 권위나 긴장감등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냥 듣고 배운 것이라 뭐라 판단하기는 힘듭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시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전에 저의 글들을 읽었다면
이 같은 질문은 하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오나
읽지 않은 관계로 그러할 것인 즉
답변은 "오념처"
"불성과 법성의 차이", "돈오 돈수 점수...빛의 세계"란 글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알음알이 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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