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담론

구도자란 누구인가"란 글을 읽고

칠통漆桶 조규일 2007. 10. 19. 10:15


본래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는데 더 닦을 필요가 있습니까?
깨달음은 결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결코 개체적 자아가 부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전세계 인구를 60억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60억을 진리 입장에서 보면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을 수 없지만, 상대세계에 펼쳐진 현상적 측면으로 봤을 때, 크게 네 부류로 구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 본다면 피라밋 모양의 도표로 그릴 수 있는데 가장 저변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층이 세속인입니다. 세속인은 말 그대로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두번째 부류가 종교인, 여기에는 기성 종교인뿐 아니라, 이른바 단전호흡, 기수련, 신통술 같은 종교성을 띄고있지 않더라도 그와 유사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됩니다. 세속인과 종교인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차이만 다를 뿐, 둘 다 자기 자신 즉 에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세속인은 물질이나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종교인은 영적인, 정신적인 에고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신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약간 고차원적으로 보이지만 이 역시 모두 에고적인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에고란 ‘개체적 자아’로 물질이 되었건, 정신이 되었건, 세속인이든, 종교인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 또는 나로 인해서 맺어진 가족이나 자기가 속해있는 어떤 동아리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늘날의 모든 종교가 기복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나 정신세계를 쫓는 것도 물질적인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정신적, 영적 차원일 뿐 똑같은 것입니다. 그 차이를 알게되면 이 단계를 뛰어넘게 되는데 이 상태가 구도자입니다.

그러면 구도자란 무엇일까요.
구도자(求道者)란 순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는 구도자다.” 라고 말들을 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구도자는 매우 드뭅니다.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신앙하고 있다고, 정신세계에 조금 심취해 있다고 자칭 구도자라고 하지만 진정한 구도자는 어떤 에고적인 자아의 완성을 추구하거나, 도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점쟁이들도 도인(道人), 도사(道士)라는 말을 씁니다. 도인이나 도사라는 말은 도 그 자체가 되어 도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업이 출가한 스님이나 성직자들이 구도자입니까?” 하고 물어 보실 겁니다. 이런 외형적인 신분이나 직업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가 순수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 구도자입니다. 순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순수 진리란 ‘무아(현상적 무아=본질적 진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아’ 즉 에고가 없는 차원이 순수 진리 차원인데, 그 쪽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도자라는 뜻입 니다. 60억 인구 가운데 99 % 이상이 세속인과 종교인 범주에 들어가고 실질적인 순수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는 1%도 안 된다고 봐야합니다. 순수 진리를 추구하다가 진리 그 자체가 된 깨달은 사람이 제일 마지막 정점인 붓다인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은 비율로 말할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계나 기타 여러 단체들에서 보면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일주일이면 누구나 깨닫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왜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굴러다니고 있느냐 하면, 깨달음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주는 의미를 잘 생각해 봅시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요.
깨달음이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근본 무명에 의해서 착각하고 있던 것을 바로 잡아서 본래성품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무아’ 즉, 본래성품을 깨닫는 순간에 현상적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불교에서 얘기하고 있는 깨달음이 무엇이냐 하면 돈오점수입니다. 먼저 깨닫고 나서 습기를 점차 닦아서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건 없습니다. 구도자가 수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한국 불교의 내노라하는 고승들이 전부 착각을 해서 돈오점수를 주장했습니다. 자기는 견성은 했는데 아직 성불을 못했다 그럽니다. 그래서 계속 닦아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견성과 성불을 다른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견성(見性)’ 즉 본래성품을 깨달으면 그것이 곧 성불(成佛)인 것입니다.

본래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는데 더 닦을 필요가 있습니까?
모를 때 닦는 것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인 ‘무아’를 체득하고 나면 그때는 두 번 다시 착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견성 즉 성불인 것입니다. 그러면 깨닫기는 했는데 아직 성불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알음알이라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을 머리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결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굳이 ‘체득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머리로가 아니고 가슴으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이 가슴이라는 뜻은 존재의 중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존재라는 것은 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개체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에고적 입장에서 그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니까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나’라고 말할 때 이 ‘나’는 본래성품인 ‘참나’를 의미하는 것인데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개체적 ‘나’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문서답이 되고 마이동풍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까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쳐다보느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똑같은 언어라도 자기 자신이 갇혀있는 틀 만큼밖에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결정적 요인은 성불(成佛)이라는 잘못된 표현에 있습니다. ‘부처를 이루었다’ 또는 ‘부처가 되었다’라는 뜻이므로 그 말에 메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결코 개체적 자아가 부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설명해 나갈 것입니다.

 

* 대자유인의 되는 길(해공) 중에서

 

"구도자란 누구인가"란 글을 읽고


이런 글을 접하면 속이 상한다.


나는 나를 알아주기 바래서 이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잘못 말하면서 마치 자신이 경험이나 체험한 양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과장 광고의 글을 보거나 접하면 속이 상하고
이런 거짓된 말이나 글들에 속는 이들이 안타깝고
이렇게 속이는 분들이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글을 쓴다.



해공이라고 이름한 분들이 많아서
이글을 쓰신 해공이란 분이 제가 아는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글로 보면 이분은 깨달음을 얻은 분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런 글을 접하면서
늘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런 분들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않았음에도
깨달았다고 하는 분들이 자꾸만 늘어나는 것이고
이런 분들이 착각도인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수행자 구도자는
자기 자신이 이룬 경지만큼만 수행된 만큼만 이야기하면 별 상관이 없다.
그러면 틀릴 이유가 없고 보고 따라 오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그게 아니다
자기 자신이 수행한 수행의 경지 이상을 말하고
자신 만큼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자세하게 물어보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피해가며
아예 말을 해주지 않던가 아니면 큰 테두리만을 말해준다.
아예 말해주지 않으면 그나마 낫다.
그러나 대부분이 자세하게 보다는 큰 테두리로 말을 해 준다.
말해주는 큰 테두리도 앞서간 수행자나 구도자로
그 경지에 있던 분의 말씀을 빌려 말해 주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자기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이 들통날까봐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자기 자신의 알음알이로 말해 준다.


잘못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앞 서간 이는 앞서간 만큼 말해서 풀어놓아야
밑에서 앞서간 이를 보고 오르는 사람이 올바르게 보고 따라 올 것이나
앞서갔다는 이들이 하나같이 풀어놓지 않고
수행의 이루어짐의 현상의 체험이나 경험을 말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되다 보니
(스스로 수행들의 경험이나 체험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어긋나서는 착각도인이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도 보면
돈오점수가 착각도인을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도 처음 돈오점수를 주장하며
그 상태로 있어야 함에 있지 못함으로 그리 표현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수가 아니라 돈오돈수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래서 나 역시 돈오돈수를 주장하고 돈오돈수를 말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바로 '깨달음'과 ‘견성(見性)’ 즉 본래성품을 깨달으면
그것이 곧 성불(成佛)인 것입니다. 에 있다.


누차 이야기했지만
견성이 성불도 깨달음도 아니다.
견성은 견성이고
돈오돈수의 깨달음이야 말로 성불이다.


항간에 보면
자기 자신의 내부 또는 외부에서 빛을 보는 것을 두고
견성을 말하는 사람도 있으며
외부 보다는 내부에서 보는 것을 두고
견성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를 두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경험이나 체험도 하지 못한 이들이
'견성 성불' 이란 말만 듣고 머리로 해석하고서는
성불했느니 깨달았느니 하며 하는 거짓말이다. 전부다 거짓말이다.
이런 거짓말들이 착각도인을 만드는 것이고
깨닫지도 못한 이들을 깨달았다고 하게 하는 것이다.



일전에 어디서 말했는지
누구의 질문에 말했는지 모르겠으나
견성은 빛을 보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가 은백색의 빛으로 빛나고
그 속에 수행하는 수행자 자신도 빛으로 함께 있으며
빛이 빛을 보고 인식하고 있게 되는 경험 내지는 체험을 하게되는데
이때가 바로 수행으로 이루어진 견성이다.
이렇듯 수행으로 이루어진 경성이 아닌
견성의 단어를 머리로 해석해서 말한다면
본성을 보는 것으로 본성의 빛을 보는 것을 말할 것이며
또 본성을 보면 이것이 성불이라고 할 것이며 깨달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수행이 거기까지 이루지 못한 이들이 만들어 내는
머리로 해석한 잘못된 알음알이로 착각도인 착각 깨달은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니
이런 일들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미 수행이 완숙해서 이루어진 사람들은 전부다 밝혀 놓아야 한다.
수행의 체험이나 경험을 숨기지 말고...
그래서 속이려는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어도
올바로 가려는 사람들 마저 속지 않도록 해야 한다.



수행 중
빛이 빛으로 빛을 보고 인식하고 나서
여러 수행자들에게 물었을 때
이러한 사실을 말했을 때
깨달았다 했다.
그럼에도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래서는 아니 되고
무엇인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깨달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하던 수행을 계속 했었고
하던 수행을 계속 하던 중
덜커덩 꽝 하는 순간
눈을 뜨고 있음에도 눈이 한 번 더 떠졌고
눈이 한 번 더 떠지는 순간 일체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그 순간이 연상이 되면서 몇일동안 웃음이 나왔다.


깨달음의 웃음을 이야기하니
또 어떤 사람들은
수행 중 태양혈이 열리며
태양혈이 당기는 힘에 자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깨달았다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이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태양혈이 열려서
자연스럽게 웃게 되는 웃음이 나오는 웃음은
깨달음의 웃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하겠다.


돈오의 깨달음은
자연의 유무형의 소리에
눈을 뜨고 있음에도 한 번 더 눈을 뜨고 일체를 보고는 것이다.
보고 있음에 보이는 모든 형태의 형상이 전체가 하나로 보이고
그 하나로 보이는 형태의 형상 속 바라보는 있는 자기 자신도 있고
이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자기 자신 속에서 모든 형태의 형상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도 이상해서 내가 나를 보게 되었는데 나를 보았을 때 그랬었다.)



빛이 빛 속에서 의식 인식할 때가
바로 견성이고
눈을 뜨고 있음에도 한 번 더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내 속에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을 볼 때가
돈오의 깨달음이다.


그럼 성불은 무엇이냐 묻는다면
성불은 불이 되는 것이니
불이 무엇인지 모르니
모르겠다 하겠으니
이 글을 읽는 그대가 언제가 성불인지는 간파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거짓말들에 속지 말기를 바라며
본인이 수행하여감에
견성과 성불 돈오의 깨달음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경험과 체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 올바르게 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짓됨이 없이 진실된 수행자 구도자는
깨달음을 인가 받고 아니 받고를 떠나서
수행 중 돈오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누가 인가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인가를 받는 것은 혹여 자기 자신이 착각했을 지 모르는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지 위한 것임에 작금의 사태들을 보면
어히려 본인들은 확연 확신이 없는 깨달음에
인가를 받고들 있고 인가를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럴까?
올바른 수행자라면
그런 만큼 돈오의 깨달음을 얻는 그 순간까지
스스로 돈오의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들 때까지
바른 마음을 가지고 수행해 가기를 바란다.



2005.1. 1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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