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는데 더 닦을 필요가 있습니까?
깨달음은 결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결코 개체적 자아가 부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전세계 인구를 60억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60억을 진리 입장에서 보면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을 수 없지만, 상대세계에 펼쳐진 현상적 측면으로 봤을 때, 크게 네 부류로 구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 본다면 피라밋 모양의 도표로 그릴 수 있는데 가장 저변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층이 세속인입니다. 세속인은 말 그대로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두번째 부류가 종교인, 여기에는 기성 종교인뿐 아니라, 이른바 단전호흡, 기수련, 신통술 같은 종교성을 띄고있지 않더라도 그와 유사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됩니다. 세속인과 종교인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차이만 다를 뿐, 둘 다 자기 자신 즉 에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세속인은 물질이나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종교인은 영적인, 정신적인 에고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신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약간 고차원적으로 보이지만 이 역시 모두 에고적인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에고란 ‘개체적 자아’로 물질이 되었건, 정신이 되었건, 세속인이든, 종교인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 또는 나로 인해서 맺어진 가족이나 자기가 속해있는 어떤 동아리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늘날의 모든 종교가 기복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나 정신세계를 쫓는 것도 물질적인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정신적, 영적 차원일 뿐 똑같은 것입니다. 그 차이를 알게되면 이 단계를 뛰어넘게 되는데 이 상태가 구도자입니다.
그러면 구도자란 무엇일까요.
구도자(求道者)란 순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는 구도자다.” 라고 말들을 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구도자는 매우 드뭅니다.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신앙하고 있다고, 정신세계에 조금 심취해 있다고 자칭 구도자라고 하지만 진정한 구도자는 어떤 에고적인 자아의 완성을 추구하거나, 도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점쟁이들도 도인(道人), 도사(道士)라는 말을 씁니다. 도인이나 도사라는 말은 도 그 자체가 되어 도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업이 출가한 스님이나 성직자들이 구도자입니까?” 하고 물어 보실 겁니다. 이런 외형적인 신분이나 직업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가 순수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 구도자입니다. 순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순수 진리란 ‘무아(현상적 무아=본질적 진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아’ 즉 에고가 없는 차원이 순수 진리 차원인데, 그 쪽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도자라는 뜻입 니다. 60억 인구 가운데 99 % 이상이 세속인과 종교인 범주에 들어가고 실질적인 순수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는 1%도 안 된다고 봐야합니다. 순수 진리를 추구하다가 진리 그 자체가 된 깨달은 사람이 제일 마지막 정점인 붓다인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은 비율로 말할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계나 기타 여러 단체들에서 보면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일주일이면 누구나 깨닫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왜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굴러다니고 있느냐 하면, 깨달음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주는 의미를 잘 생각해 봅시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요.
깨달음이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근본 무명에 의해서 착각하고 있던 것을 바로 잡아서 본래성품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무아’ 즉, 본래성품을 깨닫는 순간에 현상적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불교에서 얘기하고 있는 깨달음이 무엇이냐 하면 돈오점수입니다. 먼저 깨닫고 나서 습기를 점차 닦아서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건 없습니다. 구도자가 수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한국 불교의 내노라하는 고승들이 전부 착각을 해서 돈오점수를 주장했습니다. 자기는 견성은 했는데 아직 성불을 못했다 그럽니다. 그래서 계속 닦아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견성과 성불을 다른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견성(見性)’ 즉 본래성품을 깨달으면 그것이 곧 성불(成佛)인 것입니다.
본래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는데 더 닦을 필요가 있습니까?
모를 때 닦는 것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인 ‘무아’를 체득하고 나면 그때는 두 번 다시 착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견성 즉 성불인 것입니다. 그러면 깨닫기는 했는데 아직 성불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알음알이라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을 머리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결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굳이 ‘체득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머리로가 아니고 가슴으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이 가슴이라는 뜻은 존재의 중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존재라는 것은 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개체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에고적 입장에서 그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니까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나’라고 말할 때 이 ‘나’는 본래성품인 ‘참나’를 의미하는 것인데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개체적 ‘나’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문서답이 되고 마이동풍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까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쳐다보느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똑같은 언어라도 자기 자신이 갇혀있는 틀 만큼밖에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결정적 요인은 성불(成佛)이라는 잘못된 표현에 있습니다. ‘부처를 이루었다’ 또는 ‘부처가 되었다’라는 뜻이므로 그 말에 메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결코 개체적 자아가 부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설명해 나갈 것입니다.
* 대자유인의 되는 길(해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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