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694 글쓴이: 칠통 시간: 2001-06-23(토) 05:32:13 조회: 40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나.../ 칠통 조규일
"자신의 몸을 생각해서 화를
안 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셨는데 병의 뿌리가 어디에 있나요? 간택함을 꺼려할 뿐, ."한소식 깨달음까지는 아직은 멀고 험합니다" 그
향상심이 어디서 비롯되었나 반조하시기를... "괴롭지 않기 위해 흘려 버립니다" 생사번뇌를 버리고 보리열반을 구하시니 본성은 무엇이고 여여는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어허 허... 어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공부가 거기까지
오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들은 것은 있고 책으로 읽은 것은 있어 아는데 왜 그러한 지 스스로 공부가
확연하지 않으니. 당연한 생각이고 당연한 말일 것입니다. 그대의 말처럼 그러하다면 그대의 언어는 어디서 나온 것이란 말입니까?
그 출처가 어디인지 한 번 확인해 보시지요. 그대는 이 말을 하기 이전에 어디에서 맨 처음 작용을 일으켜 하게 되었습니까?
그 작용이 어떻게 어디 어디를 통하여 전달되어 생각을 일으켰고 그 생각이 어떻게 하여 언어로 전달되어 말을 하게 되었고
저에게 묻는 것입니까? 주체가 누구이고 객체가 누구이며 그 주객 사이 어떤 연관 관계가 있나요? 주가 먼저이던가요?
객이 먼저이던가요? 주는 있는데 객이 없던가요? 주는 없는데 객이 있던가요? 주객이 하나로 작용하던가요? 그대의
말처럼 본성의 자리에서 보면 병의 뿌리가 없는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세상에 살면서 물질로 있으면서 물질로부터 구애받지
않는 것은 물질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입니다. 그대 역시 영혼이 아니고 육체를 가진 인간이니 만큼 세상을 살면서 온갖 형상으로부터
부딪치지 않고 살지는 않겠지요. 그대 말처럼 간택함을 꺼려해 본성의 여여함처럼 여여해 지려한다면 육체를 벗어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본성의 자리에서 여여하나 육체는 그러하지 못한 것입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공부가 익어갈 때
작용하는 것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바라보고 여여해져 가는 과정의 변화를 자신의 공부됨을 점검하며 정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로써 옮겨 놓아 보았는데 어찌 하나만을 보는가? "공부된 사람은 왜 여여해 질까?"라는 글을.... 그렇게 써
놓은 마음 작용에 대하여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던가? 아니면 거기에도 못 미치는 자신의 변화에 안일과 방일에 빠지고 싶은 생각에
듣고 읽은 것을 기초로 확연하다 생각하는 것인가? 글을 글로만 읽지 말고 그 글을 왜 썼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고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십시오. 그대 말처럼 "병의 뿌리가 어디가 있나요."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육체가 있을 진데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던가요? 그대는 배고프면 먹을 진데 뿌리 없는 것에 의지하여 먹는 것 아닌가요?
먹고 일정시간 시간이 흐르면 배설하고 싶을 텐데 왜 배설을 합니까? 잠자고 싶을 때 왜 잠을 자야하지요? 그대의
말처럼 뿌리가 없는데 본성은 여여한데,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요?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본성은 여여하나 끊임없이 변하고
변하는 속에도 변하지 않는 근본이 있으니. 이것을 무엇이라 이름할까요? 왜 깨달으신 분들은 있다 없다를 떠나 있고
모든 것으로부터 얽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어찌 말로써 설명을 다 하리요. 그냥 그렇게 보면 본대로 들으면 들은
대로 여여한 것을..... 사족을 붙여 설명한다는 것이 그대가 보기에 향상심으로 밖에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그대가 그만하니
그렇게 보고 듣는 것 아닌가 싶오.
산 정상에 있는 각자는 귀로 들어도 들은 것이 없고
말해도 말한 출처가 없는데 수풀 숲 각자라 생각하는 이는 자신의 싸고 있는 수풀은 보지 못하고 뜬구름 같은 하늘만
말하니 어느 세월에 숲 속을 벗어나 숲 속을 소상히 밝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