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에 질문에 대답한 글..

여러 가지 메일 질문에

칠통漆桶 조규일 2006. 9. 22. 16:19

 

여러 가지 메일 질문에 / 칠통 조규일

 


칠통선생님,

 

왜 수련하는 사람들 보면 산에 가서 하는 걸까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산행 모임을 갖는 것은 좋은데,
수련할때... 집에서 하는 것보다 산에 하는 것이 더 좋다든가 하는게 있는지요?
산에 기가 더 많다던가, 더 깨끗하다던가 그렇습니까?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게 기라고도 한다면
그런 것에 연연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져서요.

 


물론 어디서 하든 안팎없이 조용하면 좋겠지요.
그런데 도시는 시끄럽고 그 시끄러움으로 기의 파장이 많고
파장이 많은 만큼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 파장은 자기 자신에게 전달되어
하고 있는 수행에 쉽게 몰입하여 들어갈 수가 없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있는 것보다는
산에 가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좋아서...
(산에 가면 자연이 있는 그대로 안심법문의 법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모르게 안심의 법음에 기의 파장이 안정적이기에
이를 본성에서 감지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
이런 관계로 수행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고
꼭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가듬거나 마음을 차분히 하기 위해서 산을 찾지요.
산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차분해지고 조용해서 찾아가 수행하는 것이지요.
물론 개중에는 산에서 중음신을 몸에 받아드려서 즉 접신되서
어떤 영적인 능력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도 개중에는 있다 하겠습니다만
산에 가면 산이 가지고 있는 자연 그대로 법음이 그러내고 있고
본성을 드러내고 있는 속 사회를 살면서 시끄럽게
업의 병 육체를 흔들어 되었기에 이 업이 들어있는 병
칠통이란 육체를 가만히 하고 있음에
밖에서 시끄러운 여러 가지의 파장이 몰려오는 것과
밖에서 법음의 파장이 몰려오는 것과의 차이라 하겠지요.
즉 내 밖이 조용하니 내 안에 들어가 수행하기가 좋고
또 산기운이 도시의 기운보다 맑고 깨끗하고 좋기 때문입니다.

 

 

우주 전체가 기이고 기의 바다이니
어느 곳에서든 열린 호흡문을 통하여 기를 흡수하여
몸 안에 기를 축기하며 될 것입니다만
기가 부족한 사람으로는
어디서 어떻게 맑고 탁하고를 떠나서 기를 축적하는 것이 먼저이고
기가 축적되면 이제는 혼탁을 가려서 맑은 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고
맑은 기를 가지는 것이 좋겠지요.
그리고 우주 전체가 기의 바다이니
어디서든 물을 마시면 되고 물을 끌어다가 사용하면 되지만
물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 물을 끌어당기줄 모르는 사람은
그 물줄기가 강하게 쏟아지는 곳에 가서
즉 기가 강한 곳에 가서 수행하는 것이
기를 강하게 받을 수 있고 기를 많이 받을 수 있는 만큼
방법을 모르고도 충분하게 받을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기가 강한 사람과 함께 또는 기가 강한 곳에서
기가 맑고 깨끗한 곳에서 수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를 언제든지 어디서든 마실 수 있고
끌어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에서 수행하든
수행처가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있는 그곳이 바로 수행처라 할 것입니다.

 


칠통선생님께 여쭈고 싶은 것이 참 많은데
그냥 저냥 그렇게 지나쳐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위의 어느 분보다 "깨달음"에 대해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주실 수 있는 분 같은데 말입니다.

 


차분하게 하나 하나 궁금한 것을 질문하여
수행을 통하여 하나 하나 밝혀가시길 바랍니다.

 


저번 모임에서 아무 때나 어떤 준비같은 것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본성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님이 보고 싶은 것을 보되
막힌 상태에서 보고 싶은 것만으로 보고
다른 것과의 연관성을 보지 못하고
일체가 하나로 통하여 있는 지를 못보는 곳에 비하여
저는 우주 일체가 하나로 통하여 있는 곳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질문한 것을 듣고 질문한 것을 통하여
질문한 것을 막힘에 두고 통함에서 막힘의 질문을 살펴보고
질문에 대답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깊은 선정에 들어가서야 보이는 게 아닌지,
그런 상태에 들어가려면 그래도 몇 분동안 참선해야는 거 아닌가...
그런 저런 생각들을 가졌었으니까요.


 

어디에 있느냐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보고 있는 위치 즉 경지에 따라서
말씀하신 대로 선정에서 볼 수도 있고
그냥 볼 수도 있고
선정에 들어도 볼 수가 없을 수도 있다 하겠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수행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수행을 통하여 올라선 만큼
올라선 수행의 경지에서 볼 수 있는 만큼
바라볼 수 있고
또 선정에 들어서 더 높은 경지의 것을 볼 수도 있다 하겠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수련을 할때 "현재의식"을 자각?하는데 좀 더 신경을 써보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수련을 한다치면, 왠지 깊은 상태에 들어가야할 것같은데,
그 깊은 상태라는 것이 무의식? 같은 것이라 생각하다보니,
일부러 몽한... 잠잘 때와 같은 의식상태를 조장하곤 했었나본데
그 말씀을 듣고 그게 잘못된게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수련 수행은 현재의식에서 시작합니다.
현재의 생각 의식을 통하여
처음은 생각한 쪽 의식하는 쪽으로 마음을 가게 하고
마음이 가면 마음을 따라 생각이 가고 의식이 가고
이렇듯 생각하고 의식함으로 하고자 하는 수행이나 수련에 집중하게 되고
집중함으로 더욱 더 집중함으로 몰입해 가고 몰입해 감으로
정에 들고 정에 들어서 더욱 깊게 파고들면서 선정에 든다 하겠습니다.
이런 관계로 선정은 하나의 선정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정이 있고 선정을 통하여
지금 하고 있는 수행이과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한 단계 뛰어넘고 뛰어넘음으로 또다른 계단의 막힘에 걸려서
처음은 생각 의식하고..그럼으로 집중 몰입 정 선정에 들어서 또 뛰어넘고
이렇게 올라서는 것이 수행입니다.

 

 

처음도 현제의식이고 나중도 현재 의식입니다만
다른 것은 맨 처음은 아래 단계에서의 현재의식이라면
한 단계 올라서면 한 단계 올라선 상태에서의 현재의식으로
아래 단계는 위 단계를 포괄하지 못한 현재의식이지만
위 단계에서는 아래 단계를 포괄함으로
아랫단계와 함께 현재 있는 곳의 의식까지를 포함에서 현재의식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수행해 가는 길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이
그 위 아래의 단계가 다르며
계단을 오르듯 수행의 단계가 다르지만
첫 계단에 있던 2번재 계단에 있던
맨 꼭대기에 있던 전체가 하나로 현재의 의식에 있고 현재에 있다 하겠습니다만
첫 계단에서는 위 계단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겠지만
맨 위나 그 아래는 너무 멀면 가늠조차 어렵겠지요.
그러나 맨 위에서 아래를 보면
맨 위나 처음 아래나 전체가 하나로
현재에 있고 현재 의식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로 수행자의 의식은 서로 다르데 의식은 현재 의식에 있고
현재 의식이 아닌 다른 의식으로 수행해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있는 현재의식으로 수행해 간다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 형상을 한 통이 하나있습니다
그 통안 중심에 핵심엔 빛이 있는데...
이 통안은 업이라고 할 수 있는 먼지의 흙으로 가득 차 있어
중심에 있는 핵이랄 수 있는 빛은 통 밖으로 드러내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무명의 우리들이라 할 것입니다.

 


이미 밖은 투명하게 통하여 있고
이 통안만이 불투명한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통에 옻칠을 해 놓은 상태 같은 칠통
이 상태에서 수행해 가는 것입니다.
어디를 향해서 밖이 아니라 바로 안입니다.
밖은 이미 투명하게 통해져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있으니
통으로 경계를 가지고 밖을 통하여 보지 못하고
통을 통하여 통으로 보고 있으니
이 통을 투명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럼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의식에서부터 파헤치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파헤치면 파헤친만큼 투명할 것이며
파헤쳐 투명한 만큼까지가 이제는 현재의식입니다.
이렇듯 현재의식을 키워가며 가는 것이 수행해 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마지막에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핵의 빛을 보고
빛으로 보고는 본성을 보고 본성을 보고는 본성의 속성을 보고
그럼으로 형태의 형상을 하고 있는 하나의 테두리만이 있는지를 알고
이 테두리 안에 본성의 속성을 가득하게 하여
안의 테두리와 밖에 있는 그대로의 본성이 공명현상으로 일으킴으로
일원상의 테두리 경계가 사라지면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깨달음, 본성에 대해 듣고 싶은 말씀이 참 많은데... 참...

영화 "매트릭스"를 보셨나요? 거기보면 이 세상이 가상세계라는 것을 깨달은
주인공 눈에 드디어 모든 것이 디지탈 코드... 숫자들로 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깨달은 눈으로 볼때 세상을 어찌 보일까요?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깨달음이라던데,

도대체 있는 그대로가 어떤 모습입니까?

 

깨달은 눈으로 볼때 세상을 어찌 보일까요?


있는 그대로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성이고 본성의 속성이고
저마다의 상이 있고 형태의 형상이 있습니다.
안팎 없이 투명한 상태로
있는 그대로라 할 것입니다.
전에는 칠통안에서 밖을 볼 때에
통 안의 업으로 분별을 일으키고 아는 것 식으로
아는 것 식 안에서 아는 것 식을 통하여 보되
중심에 있는 핵의 빛 본성의 참견으로 보지 못하고 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본다는 것은
중심 핵의 빛 참견으로 본다 할 것입니다만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안팎없이 투명하니 투명한 상태로 보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어떻게 보는 것인가? "란 글을
한 번 더 살펴보세요.

 


있는 그대로가 어떤 모습입니까?

 

 

지금 있는 그대로 님이 보는 것과 똑같다 할 것입니다.
다만 님은 보면서 업을 통하여 칠통 안에서 보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투명한 통하여 있는 상태에서
통함에서 통함을 본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명에서 보면
무명이 업이 막힘이 되어 막힘에서 통함을 보니
통함도 막힘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깨달아 통하여 있는 분은
통함에서 통함을 보고
또한 통함에서 막힘을 볼 적에도
막힘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통함에서 막힘을 본다하겠으며
이를 일러 전체로 통하여 있다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님이 산을 볼 적에 바라보는 쪽의 산은 보지만
넘어의 산 저쪽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만
여기 조그마한 볼펜이 있습니다.
님은 볼펜을 볼 적에 전부다 볼 것이며
전부다 보되 볼펜이 불투명하여 전체를 보지 못하지만
투명하다면 볼펜을 볼 적에 볼펜 전부를 볼 것입니다.
막힘과 통함 사이 통함 속 막힘이 이와 같고
깨달은 분이 보는 것과 무명에서 보는 것의 차이가 이와 같다 하겠습니다.

 

 

칠통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그냥 "기"로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기를 보려고 할 때 기를 보는 것입니다.
님이 아무 것이나 볼려고 하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것과 같이
제가 볼 수 있는 한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맨눈에 세상 모든 만물의 "본성"이 보이십니까?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볼려고 할 때 보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모습입니까?

 

모습있는 상이 있고 없고를 떠나 있다 할 것입니다.

 

만물의 각기 가운데 불켜진 촛불마냥 있는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상이 있고 없고 오롯히 있습니다.
오롯히 있는 본성에 상이 있음으로
오롯히 있는 저마다의 상으로 저마다의 만물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귀신을 본다면 그 장면은,
귀신이 있는 부근만 다른 차원의 공간이 보이는 겁니까?
아니면 지금 이 공간에 귀신이라는 놈만이 옮겨와 있는 듯 보이는 겁니까?

 

 

오롯히 있는 본성의 성품에
상이 있음으로 상을 통하여 저마다 만물이 드러나 있는 것처럼
귀신 역시도 본성이 오롯히 있는 공간에 허공에
우리 인간과 같이 형태의 형상만 다를 뿐 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육체라는 물질을 가지고 있기에
물질 갇혀 생활하고 활동하지만
귀신은 물질이 없는 형태의 형상이니
물질을 벗은 형태의 형상 상으로 생활하고 활동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귀신이라는 놈만 옮겨와 있는 듯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것과 같이 귀신도 형태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더 쉽게 설명드린다면
현재 님의 상태에서 육체만 없는 상태로
지금 여기에 있는 상태가 바로 님의 영혼으로
이 세상을 떠돌면 중음신이고 귀신이며 잡귀라 할 것입니다.

이들이 업보에 따라
지옥에 가고 천당에 가며
지옥도 수많은 지옥이 있으며
천당도 수많은 천당이 있다 하겠습니다.

 

 

지옥은
"나"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며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아만심에 가득한 사람들로
그 악업의 업보에 따라 끼리 끼리 모이는 것이고
천당은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행동하는
이기적이지 않고 아만심보다는 자비심으로 베풀고 배려하는 사람들로
그 선업의 업보에 따라 끼리 끼리 모여 사는 곳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천당과 지옥은
바로 "나"라고 하는 것이 경계로 하여금
내가 이 "나"를 위하여 얼마나 이기적이며 아만심에 빠져
남을 뺏았으며 악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수많은 지옥을 업보에 따라 갈 것이며
또는 이 "나" 보다는 얼마나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자비심으로
선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수많은 천당을 업보에 따라 간다 할 것입니다.

 


그 상으로 보면
기운의 혼탁으로도 볼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지옥으로 갈 영혼이라면
영혼의 상을 한 테두리 안의 기운의 탁함이 흐리고 탁한가 하면 검고
점점 탁해지며 어둠 깊이까지 가는 반면
천당으로 갈 영혼이라면
영혼의 상을 한 테두리 안의 기운이 탁하거나 흐리기 보다는 맑고 투명하며
맑고 투명함을 지나 점점 더 빛에 까지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 밤은 모든 게 답답할 뿐이네요...

 

많은 질문에 대답을 한다고 했으나
혹여 너무 많은 말로
님을 어지럽힌 것은 아닌 지 조심스럽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맞이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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